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201화 (1,200/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201화

노을빛의 마왕성 (21)

망망대해에 홀로 남겨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의식만 남은 채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 실제로도 가라앉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마치 무언가가 목을 꽉 막고 있는 듯했지만 이상하게도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주변이 어두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우주 속을 유영하는 듯했다면 기분 탓일까.

천천히 가라앉거나 흘러가거나 휩쓸리거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 건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의문 하나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이상한 상황이었다.

정말로 이상한 상황이었다.

‘나는… 누구지?’

아무것도 기억할 수 없었고 느낄 수 없을진대 이상한 의문 하나만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돌고 있다니.

이대로 꺼져 버리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처럼 느껴짐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은 자꾸만 자아를 갈구하고 있었다.

‘무엇이었더라….’

무엇이었더라….

물론 그 의식마저도 희미해진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완전한 무로 되돌아가려고 한다. 그것이 이곳의 법칙이라는 것처럼 말이다.

‘나’라는 개념조차도 점차 희미해진다. 안개가 낀 듯이 점차 모든 것이 천천히 흐릿해진다.

수면 아래로 점점… 점점….

그리고 이내.

그래.

맞아.

‘아무것도 아니었을지도.’

‘…….’

‘…….’

‘…….’

암전.

‘…….’

‘…….’

‘…….’

다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과는 받아들인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어제는 정말 몸이 안 좋았을 뿐이라니까요. 괜히 딴소리하지 말고 들어가요. 창피하게 이게….]]

[[흥.]]

[[그보다 오늘 원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들려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감아도 되나 싶은 찰나에도 귀찮은 소리들이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엘프 여왕 엘레나의 공략 포인트는 사실상 그녀가 가꾸고 있는 정원을 공략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당연하지만 그녀가 정원에서 기르고 있는 것들은 단순한 식물들이 아니에요. 온갖 마계 식물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판단되고 있어요. 그녀의 정원의 규모를 보면 아시겠지만… 아마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가 될 확률이 높겠죠.]]

[[말만 정원이지… 숲이나 다름없어 보이더군. 그게 전부 다 마계의 식물이라 이 말인가?]]

[[네. 그런 셈이죠. 부지가 넓은 만큼 표본을 구하기 쉬웠지만요. 위로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만….]]

[[결과는 어떻습니까.]]

[[예상했던 것처럼 식물들은 신성력에 취약해요. 윌리엄 님. 정말로… 극단적일 만큼이요. 중급 사제에 신성력에 순식간에 녹아버릴 정도라면 어느 정도일지 대충 감이 오실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상….]]

[[네.]]

[[사제들을 위한 무대일 거라고 판단하고 있어요. 엘레나가 자신의 정원에 있는 식물들을 보호하고 관리하고 또, 다시금 자라게 할 수 있는 만큼… 관건은 그녀가 숲을 돌보는 것보다 빠르게 신성력으로 밀 수 있느냐 밀 수 없느냐겠죠. 사제들의 신성을 한계까지 사용하는 것이 이번 네임드의 공략 방법이에요.]]

[[흠….]]

[[길을 여는 건 사제들이 될 거예요. 별동대는 사제들이 열어줄 길을 따라서 엘프 여왕을 타격합니다.]]

[[만약 사제들의 신성력이 떨어지게 된다면….]]

[[별동대는 숲에서 고립되고 전멸하겠죠. 그렇기 때문에 로테이션이 중요해요. 장기전이 될 수도, 단기전이 될 수도 있겠지만 길게 끌면 끌수록 불리한 싸움이 되겠죠.]]

[[흐음….]]

[[결계는 이미 열려 있어요. 준비들은 되셨나요?]]

무엇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건지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갑작스레 받게 된 자극 때문인지 오감이 깨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까딱거리기 시작한다. 계속해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다고 느껴졌을 때 이내 그것이 자신의 손가락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손가락.’

있었구나. 다리, 손, 전부 있었구나.

분명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점점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어두운 건 여전했지만 나뒹굴고 있는 물체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형. 사람의 형태를 한 물체였다.

여러 구의 인형들은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같은 얼굴, 같은 머리카락, 같은 손, 같은 발, 같은 몸.

마치 바닷속에 가라앉은 쓰레기들처럼 나뒹굴고 있는 모습의 저것들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저것들은 무엇이고 어째서 자신과 함께 이곳에 있는 것일까.

이내 천천히 하나의 인형이 사라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마치 원래부터 이 바닷속과 함께였던 것처럼 말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순간적으로 거부감이 생긴 것은 당연지사.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려고 했을 때. 무언가가 다시 한번 툭 굴러떨어졌다.

같은 얼굴.

‘똑같은 얼굴.’

아무것도 없는 눈동자.

‘말하지 않는 입.’

저게 뭔지 모르겠지만.

뭐 아무 상관 없나.

[[움직여요! 움직여!! 효열 씨!!]]

[[제기랄. 알고 있다.]]

[[선 씨! 신성주문을!]]

[[저, 저는 어떻게 해요? 부파티장님.]]

[[치유의 선율은 효과가 없어요. 신성력이 아니니… 보호의 선율 부탁드려요.]]

[[제길! 사제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여기 사람들 고립된 거 안 보여?! 으아아아아! 빨리 길 열어 달라고! 다 죽게 생겼으니까!]]

[[흥분하지 마라. 천둥벌거숭이.]]

[[지금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뭔가 불안하다 했는데.]]

[[조심해라. 이기영.]]

[[부파티장님!!]]

[[조심하라고 말했잖아! 제기랄!]]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몸이 쾅쾅 하고 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파.’

무언가에 부딪친 것처럼….

‘아파….’

바닷속이 한 번 더 흔들린다. 그리고 툭 하고 다시 한번 더 아까의 인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아까와는 다르게도… 이번에는….

‘아… 저거… 나구나.’

저것들… 전부 나였구나.

인지하고 있었다.

마치 고깃덩이들처럼 방치되어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다시 한번 바라본다.

어째서 저 인형들이 나 자신이라 인식했는지는 의문이었지만 틀림없이 저건….

[[이기영!!!!]]

[[…….]]

[[제길! 이기영!!!!]]

이기영이라고 불렸던 사람들이었다.

이기영이라고 불렸던 이들이 이상하게 뒤엉킨 채로 나뒹굴고 있다.

[[크윽!!]]

이내 생각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개체는 자신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곳에 있는 것들은 전부 껍데기들, 모든 것이 리셋된 채로 나 뒹굴고 있는 껍질이었다.

저들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눈을 뜨고 있지도 않다.

무언가를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으며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실이 끊어진 인형마냥 자신의 차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바닷속에서 소화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빠져나가야 돼.’

그것은 본능이었다. 아직까지도 모든 것이 불확실했던 지금 이 순간 가장 확실한 단 한 가지였다.

이곳에 있으면 죽는다. 아니, 사라진다. 무의식에 끝에 있는 생존본능이 경종을 울리기 시작했다.

다른 행동을 할 이유가 없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 인형들을 헤쳐나간 것은 당연지사.

헤엄이라도 쳐야 할까 싶어 발버둥 치자 몸이 천천히 부유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무엇인가에 걸린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을 때는 마구잡이라고 손을 뒤흔들었다.

손에 걸리는 것이 있어 확 하고 그것을 뽑아냈을 때… 다시 한번 아까와는 다른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기계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현성아.”

“…….”

“응. 저항해야지. 지켜야지. 이번에는….”

‘어….’

“현성아. 응. 저항해야지. 지켜야지. 이번에는….”

“…….”

“현성아. 응. 저항해야지. 지켜야지. 이번에는….”

이건 어떻게 해서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걸까.

“고마워. 현성아.”

“…….”

“고마워. 현성아.”

계속해서 팔을 허우적거리자 점점 몸이 위로 떠오르는 듯했다. 그 와중에도 여기저기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개체들이 보였다.

“하얀아. 하얀아. 하얀아. 하얀아. 하얀아.”

“희라 누나… 아앗! 아파… 아파! 희라 누나… 아앗! 아파… 아파!”

“신전을 불태울 거야. 신전을 불태울 거야. 신전을 불태울 거야. 신전을 불태울 거야. 신전을 불태울 거야.”

“돼지 새끼! 돼지 새끼! 돼지 새끼!”

“현성아. 기억나? 현성아. 기억나? 현성아. 기억나? 현성아. 기억나?”

“내가 널 선택한 게 아닐 수도 있어. 우린 이렇게 만들어진 거야. 내가 널 선택한 게 아닐 수도 있어. 우린 이렇게 만들어진 거야.”

“이것만큼은 그 새끼들한테 감사해야겠네. 이것만큼은 그 새끼들한테 감사해야겠네. 이것만큼은 그 새끼들한테 감사해야겠네.”

“마지막이야. 오늘이면 또 잊을 거야. 마지막이야. 오늘이면 또 잊을 거야.”

“다시 한번 기억해 줄 거지. 다시 한번 기억해 줄 거지. 다시 한번 기억해 줄 거지. 다시 한번 기억해 줄 거지. 다시 한번 기억해 줄 거지. 다시 한번 기억해 줄 거지. 다시 한번 기억해 줄 거지. 다시 한번 기억해 줄 거지. 다시 한번… 다시 한번… 다시 한번… 계속… 계속….”

“나와. 이 개새끼야! 나와. 이 개새끼야! 나와 이 개새끼야!”

“창조주시여. 창조주시여. 창조주시여. 창조주시여.”

“붉은전신이 약속을 했어. 붉은전신이 약속을 했어.”

개체들의 몸은 대부분 사라져 있었다. 어떻게 해서 말을 이어가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지경, 너무나 시끄러워 귀를 막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째서 이것들은 말하고 있는 거야. 어째서 사라지지 않는 거야.

아.

이것들은 계속해서 남아 있는 것들이다. 사라지지 않고 이 바닷속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이 데이터의 바다의 토대가 되는 것들이다.

“이제… 끝났어. 모든 게… 끝났어. 이제… 끝났어. 모든 게… 끝났어. 우리가 해냈어. 얘들아. 우리가 해냈어. 얘들아. 이제 자유야. 이제 자유야. 이제 자유야. 이제 자유야.”

“자원이 필요해. 자원이 필요해. 자원이 필요해.”

“언젠가 이곳은 무너질 거야. 언젠가 이곳은 무너질 거야. 언젠가 이곳은 무너질 거야.”

“가지 마 혜진아. 가지 마 혜진아. 가지 마 혜진아. 가지 마 혜진아. 가지 마 혜진아.”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현성은 누구고 혜진은 누구야. 아무것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다.

[[정신 차려라. 이기영. 제길.]]

[[아아아악! 부파티장님.]]

계속해서 헤엄치는 것. 목소리가 이끄는 방향으로 계속해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히기 시작했다. 꺽꺽거리며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었지만 목을 부여잡고 계속해서 다리를 움직인다.

희미한 빛이 시야에 비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수록 빛은 계속해서 환해지기 시작한다. 환한 빛 너머에는 보이는 것은 익숙한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기영 괜찮나? 제길 내가 따라오지 말라고.]]

“우리 상황을 타개할 수 있어. 정당한 거래야. 우리 상황을 타개할 수 있어. 정당한 거래야.”

“성을 다해 간청드리오니 부디 거래해 주셨으면 합니다. 창조주시여. 성을 다해 간청드리오니 부디 거래해 주셨으면 합니다. 창조주시여.”

어.

그리고.

“꼭 돌아올게. 현성아. 꼭 돌아올게. 현성아. 꼭 돌아올게. 현성아.”

나는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반드시 돌아갈게.”

푸하아아아아아!!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