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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96화 (1,19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96화

노을빛의 마왕성 (16)

“내가 네놈에게 숨기고 있는 게 있다고 해도?”

“…….”

“…….”

대답이야 뻔했다.

“믿어요.”

“뭐?”

“믿어요.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게 아니라면 지금 이렇게 같이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

“그리고 그렇게 비밀이 있다는 식으로 광고하듯 이야기하지 않아도 효열 씨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누구나 숨기고 싶은 게 한두 가지 정도 있게 마련이고… 그게 효열 씨를 믿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아요.”

“…….”

“제가 본 효열 씨는… 직설적으로 말하면 싸가지 없고….”

“뭐?”

“인간관계에 굉장히 서툴고… 인격적으로 약간…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대충 알 것 같거든요.”

“…….”

“효열 씨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

“또 무슨 개소리를 지껄이려고….”

“진심이에요. 효열 씨는 자기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따뜻한 사람이에요. 말수가 적은 것은 다른 사람을 배려하기 위해서고… 쉽게 흥분하는 건 그만큼 감성적인 사람이라는 뜻인걸요.”

“…….”

“아마 저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느끼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임채령 있자너.’

“모두가 효열 씨를 믿고 있을 거라는 데에 제 모든 걸 걸 수 있어요.”

녀석이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 이 순간을 어색해하는 것만 같은 느낌.

우효열로서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리라. 누가 녀석의 면전에 대고 이런 말들을 해주겠는가.

사실은 따뜻한 사람이라거나 감성적인 사람이라거나 믿을 수 있다거나 하는 손발이 오그라드는 대사들은 굳이 녀석이 아니라고 해도 맨정신에 듣기 민망한 이야기였다.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얼굴로 부끄러운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으니 녀석이 어색해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괜히 물어본 것은 아닌가 후회하는 듯한 표정. 방어기재를 가지고 있는 녀석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무척 뻔했다.

“네놈의 칭찬을 듣고 싶어서 물은 것이 아니다. 멍청한 놈.”

‘이것 봐.’

심지어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것인지, 초조해 보이기까지 한다.

갑작스레 찾아온 훈훈함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어서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답이 됐을까요?”

“흥.”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고는 제 갈 길을 가는 녀석.

여전히 사회성은 없었지만 이 사달을 겪은 이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했다.

‘이 새끼… 이거 진짜로 준비됐나 보다.’

어쩌면 받아들이는 사람의 차이일지도 모른다. 회귀자라는 사실을 마치 석고대죄하듯이 고백했던 김현성과는 반대로 녀석은 이 사실을 무게감 있게 생각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김현성이야 감추고 있던 시간이 길어지고 여러 가지 관계성이 쌓이니 혹시나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처럼 비칠까, 지레 겁을 집어먹었던 것이었지만….

우효열의 경우는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기영은 녀석에게 뭔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상황, 말하자면 서로가 비밀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성격 차이도 있을 거고.’

녀석은 뭐든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느낌이었으니까.

별것 아닌 거로 전전긍긍하는 김현성과는 확실히 배포가 다르다.

조금 의아한 점이 있다면… 빨라도 너무 빨랐다는 것.

이번 서브 퀘스트에 믿음과 신뢰 같은 종류의 인간찬가를 첨가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로 빠르게 반응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딱히 녀석의 반응을 유도한 것이 아니라는 게 포인트.

‘쟤는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자너.’

어떻게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든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은 확신했다. 물론 이쪽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지만 말이다.

‘회귀자 사용설명서 싱크로율도 조금 올라가려나.’

중요한 것은 유대였으니까.

괜스레 한번 콜록거려주니 곧바로 윌리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기영 님….”

“네?”

“이쪽은… 아니, 일단은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기초적인 현장지휘는 제가 맡도록 하겠습니다. 이기영 님께서 만들어주신 매뉴얼을 따르되 변수가 생긴다면 곧바로 연락을 취하는 방식은 어떠십니까.”

“하지만… 콜록. 콜록….”

“오늘만 날이 아니지 않습니까. 던전 공략을 끝까지 완료하고자 하신다면 휴식을 취하는 게 적절해 보입니다.”

평소의 이기영은 절대 져주지 않지만….

“아… 네. 그러는 게 좋겠네요.”

지금 이 순간만은 져주는 것이 맞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템포 올리는 게 나아.’

어쩌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기회, 근 시일 안으로 본인이 회귀자라는 걸 밝힐 것 같기는 했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지금 이렇게 고백할 것 같은 냄새를 풍기고 있지만 한번 숨어버리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 줄 누가 알겠는가.

애초에 허락된 시간 자체도 무척 짧았으니 인스턴트식 운영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 정답이었다.

‘분위기 좀 만들어야겠다.’

일단 파티원들과 함께 모이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정석.

나를 계속해서 살펴보는 유아영을 뒤로하고… 캠프로 돌아간 이후에는 곧바로 파티원들을 호출하기 시작했다.

방보다는 억지로 추억을 끌어낼 수 있는 야외.

장소 자체는 문제가 없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 볼 수 없는 장소이기도 했고, 던전 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꽤나 프라이버시를 지킬 수 있는 공간이었으니 말이다.

이기영의 편안한 휴식을 위한 윌근본의 배려였다.

‘모닥불 세팅해야지.’

없어도 별 상관은 없었지만 분위기가 살지 않는다. 담요도 준비하고….

‘식사도 준비하고.’

괜히 코인으로 비싼 식재료를 사기보다는 레이먼 볼트와 함께 먹었던 모험가 정식으로.

할아버지가 해준 것만 같은 푸짐한 고기스튜는 파티 내에서는 꽤 인기가 많았다.

23살 꽃기영이 좋아라 하기도 했지. 물론 이기영의 취향은 아니었다.

‘촛불 켜놓고 진솔한 이야기 하는 느낌으로다가.’

“아앗! 무슨 요리까지 하고 그러세요? 부파티장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조금…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

“몸도 안 좋으신데… 이럴 줄 알았다고요. 앉아 계세요.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할아버지 레시피는 다 꿰고 있거든요. 아! 잠깐만요. 저 그거 가지고 왔거든요.”

“네?”

“저희 식기요. 정리한다는 게 깜빡하고 그대로 다 가져온 거 있죠. 근데 가져오길 잘한 것 같다. 히… 할아버지 음식은 보급식판보다 여기에 덜어 먹는 게 제맛이거든요.”

‘아니야. 그 식기 너무 더러워.’

“부파티장님, 앉아 계세요. 몸도 성치 않으신데….”

“아니요. 저는 괜찮아요. 담혜 씨. 지금은 거의 다 회복해서….”

“그래도요.”

안 그래도 슬슬 힘이 빠질 타이밍에 때맞춰 온 남궁선, 임채령, 노담혜, 그 3인방이 계속해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하얀 님은 임무 나가셨어요? 그 한소라라는 분이랑….”

“네.”

정확히 말하면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저주받은 엘프 여왕 엘레나의 실내정원로 향하는 길에 걸려 있는 결계를 해지하기 위해서였다.

“다들 쉬는데 고생하시네요.”

‘그렇지도 않을 거야.’

제법 재미있어 보였으니 말이다. 정하얀을 기준으로도 퍼즐을 푸는 재미를 느낄 수 있게 설계가 되어 있었던 모양.

투기장 투사를 물리치고 오는 와중에 한소라가 발견한 결계였으니 더욱이 동기부여가 됐을 것 같았다.

조금 의아했던 것은 정하얀이 흥미를 느낄 만한 퍼즐을 누가 설계했느냐에 대한 것이었지만….

‘아마 누나겠지.’

도미니온스 놀이 하느라 정신은 없지만 준비는 전부 해놨다고 했었으니까.

어쩌면 스스로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잠깐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현시점에서 고민하는 게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일단은 눈앞에 닥쳐 있는 문제를 해결하자고 미리 다짐한 것이 비교적 최근이 아니었던가.

“부파티장님… 혹시 조금 편찮으신 건가요?”

“아니에요.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제가 몸을 좀 살펴봐도 괜찮을까요?”

“정말 괜찮아요. 남궁선 씨.”

“하지만….”

“정말로요. 알고 계시잖아요. 몸을 살펴봐 주신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딱히 없을 거라는 거… 선 씨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아….’

분위기 안 좋아졌다.

애써 밝은 척하고 있었던 3인방의 표정이 이미 어둑어둑해지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행동하던 것들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셈.

‘아… 안 좋은데.’

이미 노담혜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걸려 있는 상황, 담담한 척해보려고 했지만 역효과가 날 것 같아 침만 삼키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은 괜찮을 거다.”

“…….”

입을 열어온 것은 우효열이었다.

‘효열아.’

“본인이 나서서 요리하겠다고 설치는 꼴을 보니 상태가 썩 괜찮은 모양이야.”

“아. 오빠는 왜 말을 그런 식으로밖에 못해요! 진짜! 사람 참 꼬였다니까.”

“흥.”

“흥은 뭐 맨날 흥이래. 할 말 없으면 꼭 저러더라.”

“할 말이 없는 게 아니라 구태여 너와 말을 섞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어서일 뿐이다. 천둥벌거숭이.”

“그런 것치고는 말이 길어지셨는데요?”

“흥.”

“두 사람… 꼭 이런 날도 싸워야 하나요?”

“아니, 언니. 효열 오빠 하는 것 좀 봐요. 내가 안 이러게 생겼나!”

“오늘이 무슨 날인가?”

“오랜만에 다들 모여서 편하게 식사하는 자리잖아요. 저한테는 의미가 깊어요.”

사실 그리 오랜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원정을 떠나기 전에는 억지로라도 시간을 만들어서 이런 자리를 마련했었으니까.

아무래도 강행군을 겪고 난 이후기 때문에 조금 더 소중한 시간인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파티원들이 제법 만족스러운 눈치였다.

“부파티장님은 고기 좀 더 가져가세요. 효열 오빠는 고기 싫어한대요.”

“하….”

스튜에 들어 있는 고깃덩이 가지고도 실랑이를 하고….

언제나 그렇듯이 여러 가지 대화들도 나눈다. 물론 공적인 이야기도 함께 말이다.

“인계받으신 수집품은 어떤가요? 노담혜 씨.”

“아! 정말 좋은 것 같아요. 슈틸리케의 바이올린… 제가 사용자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는데….”

“좋은 기물이니 분명히 도움이 되실 거예요. 담혜 씨의 적성에도 딱 맞고요.”

“그런데 부파티장님. 저희 언제 다시 출발하는 거예요?”

‘에밀리아 쪽에서 진행하고 있는 서브 퀘스트 끝나면 출발하겠지.’

쉴 땐 쉬고, 놀 때는 놀 줄 아는 꽃기영은 작은 일탈도 즐긴다.

“혹시 럼주… 드실 분 있나요?”

“아앗! 먹어도 돼요? 이거 군기 위반….”

“몰래 먹는 거예요. 몰래. 저도 가끔은 이러고 싶다고요.”

“부파티장님!!”

“부파티장님은 드시면 안 돼요.”

어떻게 생각하면 분위기를 만들어준 셈이다. 술의 힘을 빌리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고 추천하고 싶지도 않지만 꽉 붙들고 있는 이성을 자유롭게 해주는 효과 정도는 있었으니까.

우효열도 거부할 필요가 없다 생각했는지 연거푸 알코올을 들이켜는 중이시다. 다른 파티원들은….

“흐윽… 흐어어어엉… 죽지 마요… 흐어어어어어어엉… 부파티장님 죽으면 안 돼요.”

“같이 노래 부르기로 하셨잖아요. 부파티장님… 끄으윽… 갑자기 이러시면 어떻게 해요.”

“후우….”

왜 너희들이 갔어? 정작 우효열은 멀쩡한데.

“이래서 이 천둥벌거숭이를 말렸던 건데… 제길… 이렇게 취할 정도로 퍼마시다니… 손이 많이 가는 것도 정도가 있지….”

파티원 세 명은 그렇게 리타이어. 이미 잠에 취해서 뒹굴고 있는 임채령과 조용히 중얼거리며 기도를 외우고 있는 남궁선이 보인다.

방에서 계속해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먼저 들여보낸 노담혜 씨께서 작은 연주회를 하고 계시는 모양이다.

‘분위기 적당한데?’

타닥타닥 타오르고 있는 모닥불.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살짝 취해 있는 녀석.

심지어 흐릿하지만 음악까지 들려온다. 대화 자체도 성공적이었으니 슬금슬금 비밀에 대한 빌드업을 쌓는 것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효열 씨….”

라고 막 운을 띄웠을 때였다.

갑작스레 몸을 일으키는 녀석이 눈에 들어왔다.

“이만 들어가겠다. 밤이 늦었으니.”

아니, 그냥 가면 어떻게 해?

“이기영….”

“네?”

“…….”

“…….”

“나는 회귀자다.”

‘뭐?’

“…….”

아니, 뭐 이렇게 말하면… 내가 뭐 어쩌라고.

대답을 끝으로 곧바로 뒤로 돌아 지 갈 길을 가는 우효열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시바 대답은 듣고 가야 할 거 아니야.’

그 어떠한 감상이나 피드백을 거부한 채로 저 멍청한 놈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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