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88화
노을빛의 마왕성 (8)
“부…파티장님….”
“…….”
“부… 파티장… 부파티장님….”
“…….”
“효열이 오빠는 괜찮아요? 효열이 오빠는….”
‘시바 내 정신 좀 봐.’
“살 수 있는 거죠…?”
행복한 기운이 감싸는 이기영 프레젠트 룸을 조금 더 감상하고 싶었지만 나를 부르는 임채령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 쟤를 깜빡할 뻔했자너.’
슬쩍 시선을 돌리자 여전히 누워 있는 우효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거의 다 치료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여전히 움직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효열 오빠는….”
“괜찮을 거예요.”
“네. 그… 그렇겠죠? 괜찮겠죠?”
말을 내뱉는 것도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쓰러진 우효열이 눈에 밟히는 모양.
사실 임채령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애초 아까의 전투에서 자기 자신이 가진 한계를 아득히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황정연을 상대로 얻은 상처도 상처이겠지만 아마 지금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을까.
그녀 생에 통틀어 가장 집중했던 순간이었던 만큼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에 있다는 것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순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우효열을 찾고 있었다.
‘얘네 진짜 뭐 있나.’
레이먼 볼트 영감의 유지보다 더 끈끈했던 게 둘 사이에 정말로 있었던 것일까.
단순히 함께 움직이면서 정이 들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애틋하게 보이는 상황에 내가 다 당황스럽다.
최소한 임채령 얘는 우효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제가… 반드시 살릴 거예요.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채령 씨.”
“꼭… 부탁드려요. 부파티장님.”
“…….”
‘그런데 있잖아요. 쟤 어차피 안 죽어요.’
박덕구가 아무리 진화했다고 한들, 팔 휘두르기 한 방에 미국행 티켓을 꺼내볼 정도로 우효열은 물렁하지 않다.
물론 그전에 스미스 대령에게 벌집이 된 것이 주원인이겠지만 두 가지 다 마무리 일격이라고 부르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녀석은 기본적으로 내구 수치도 탄탄했고, 정신력도 높고, 무엇보다 본인이 살고 싶어 하는 의지가 크다.
바퀴벌레처럼 끈질기다는 것이 녀석의 유일무이한 장점이 아니었던가.
‘목 날아가기 전까지는 안 죽는다니까.’
서둘러 우효열에게 향한 것은 당연지사. 그 와중에 황정연이 나를 반갑다는 듯 바라보기는 했지만 역할을 잃지는 않았는지 정하얀과 윌리엄을 노려보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윌리엄 님. 하얀 씨. 수집품 관리인을 부탁드려요.”
“네.”
“네… 오, 오빠.”
레이드는 다시 2차전으로, 다음 페이즈에 들어가기 적절한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인지 황정연의 몸에도 여러 가지 수집품들이 떠올랐다.
한 번에 한 가지, 최대 두 가지 수집품을 사용한 것과 다르게 지금 그녀의 몸에는 서너 개, 혹은 대여섯 가지의 수집품들이 떠 있었다.
전격이 떨어지고, 해일이 생성된다.
“하아… 또 꽝이야.”
지옥마력골렘이 다시금 몸을 일으키고,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이 생성된다.
중력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모자라 몇몇 플레이어의 몸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허공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천재지변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대부분의 플레이어들은 멍하니 상황을 바라보고 있다.
‘확실히… 원년 길드원들은 다르다 이거네.’
버림받은 성녀, 선희영 때도 한 번 느꼈었지만, 평범한 고위악마, 더 나아가서는 지하수로의 문지기들과도 격이 다르게 설계된 것 같았다.
기믹 자체도 질이 올라간 것은 물론이거니와 공략법을 찾기도 쉽지가 않다.
아티팩트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며 계속해서 로테이션을 돌리는 그녀는 물 만난 물고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마법사로서 정하얀에게는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지만 그게 그녀가 무능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순수한 연구자로서는 정하얀, 아니, 대륙 그 누구보다도 낫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본능적으로 모든 것을 깨달아 버리는 정하얀과는 다르게 황정연은 언제나 공부한다. 이론을 정립하고, 주문을 해석하며 마도를 탐구한다.
그녀는 계속해서 지식을 갈망하고, 그 지식을 언제든지 꺼내 들 수 있는 커다란 도서관을 머릿속에 가지고 있다.
마음의 눈도 가지고 있지 않는 주제에… 단지 머릿속에 있는 마도지식만으로 이 수많은 수집품들을 탐구하고 연구하고 활용하고 조합하는 일련의 과정들은 어찌 보면 위업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막스처럼 컴퓨터도 아닌데….’
사실상 황정연에게 부족한 것은 마력 수치뿐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왠지 하얀이랑도 해볼 만할 것 같다고 느끼는 거 같은데.’
호승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지만 약간의 궁금증이 서린 것처럼 보였다.
‘어디까지 통할까.’
마도, 마법, 그 정점에 선 자에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어디까지 통할지에 대한 궁금증, 질투 같은 애매한 감정이 아니라 순수한 탐구열 그 자체로 보였다.
정하얀이 주문을 외운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리고,
해일을 막는 거대한 얼음의 장벽이, 전격을 삼켜버리는 마력의 응집체가, 지옥마력골렘을 짓밟는 물의 화신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콰자자자자자자작!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수집품 11번 얼음가루시계.”
다시 한번 얼음모래시계에서 결정들이 떨어지자 모래시계 주변에 모든 것들이 얼어붙는다.
“앗 뜨거.”
라고 정하얀이 입을 열자 바닥에서부터 열기가 피어오른다.
‘쟤… 슬슬 폼 돌아오고 있는 건가 봐. 성장하는 속도가… 뭐 저래….’
한쪽 손으로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자 마력의 구체가 피어올라 모래시계 위로 떨어졌고, 남은 한쪽 손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흔들거리자 긴 채찍 같은 것이 지옥마력골렘을 쳐낸다.
어린아이가 손장난을 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미세한 마력들이 정하얀의 손끝에서 계속해서 감돌고 있었다.
‘장난 아니네, 진짜.’
윌리엄을 비롯한 일부 플레이어들은 그 모습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각자의 방법으로 수집품 관리인을 견제하는 중.
정하얀이 딱히 아군 플레이어들을 보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좋은 윌리엄은 자신이 뭘 해야 할지, 무엇이 주어진 역할인지 이해하고 있었다.
단 한 줌의 공간도 남아 있을 것 같지 않았던 마력과 마력, 마법과 마법, 그 충돌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며 계속해서 붉은 꽃잎을 그려내고 있었다.
“치잇.”
“터져라.”
콰아아아아아아앙!
“지원.”
결국 윌리엄에 의해 지옥마력골렘이 그 형태를 잃자. 하늘에서는 거대한 가고일 석상 세 개가 떨어진다.
“수집품 7번 클란다스의 가고일.”
어느덧 움직이기 시작한 가고일들은 황정연에게 접근하는 플레이어들을 계속해서 밀어내고 있었고 심지어 정하얀에게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거대한 물의 화신이 가고일 하나를 잡아내자 어느새 생성된 커다란 불꽃이 물의 화신을 증발시킨다.
눈을 한 번 깜빡이자 정하얀의 마력구체는 어느새 커다란 불꽃을 찍어 눌렀고 이에 대응하듯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8개의 팔이 마력 구체를 집어삼켰다.
우리 대륙에서도 이런 전투를 보기 쉽지 않았지만 이쪽 기준으로는 그야말로 괴수대격돌이라고 부를 만한 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이것들을 눈 속에 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통탄스러울 지경,
이쪽 역시 긴박한 상황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상황이리라.
“효열 씨… 효열 씨!”
‘사실 별로 안 긴박해 보이기는 해.’
노담혜와 남궁선이 탈진 직전까지 가면서 얘 목숨을 붙여놓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표정만큼은 긴박해야 한다.
“다른 사제들을 불러오세요!”
괜스레 한 번 고함도 쳐준다.
“네… 아… 네!”
어떻게든 우효열을 살리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찬 표정을 선보인다.
힘이 다한 육체를 애써 붙잡고 있었던 노담혜의 표정에도 다시금 초조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안정권으로 진입했다고 판단했다고 느꼈던 것일까 조금은 안심했던 얼굴을 했던 것도 잠시.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꽃과 풍요의 성자가 무척 긴박한 상황을 연출하고 있으니 지도 뭐가 잘못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리라.
“끝… 끝난 게 아니었군요.”
대답은 하지 않는다.
빠르게 주문을 외우자 바닥에는 빛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주문진이 생성된다.
아무 의미도 없는 주문진이었지만 빛나니까 예쁘긴 했다. 하지만 예쁜 것이 중요했다. 미관상 중요한 파트였으니까.
녀석에게 다가가 정체불명의 물약을 먹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발작하는 우효열의 모습이 보인다.
“붙잡아요!”
“네… 네!”
효과가 좋은지 거품을 물고 꿈틀거리고 있다. 이성이 없다고 한들, 전사는 전사, 팔과 다리를 꼭 붙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을 진정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주문진에 서세요. 지금부터 소생주문을 외워야 해요. 집중해야 하는 일이니… 한 치의 오차도 없도록 부탁드려요.”
“네… 네.”
“효열 오빠… 흐윽… 효열 오빠 괜찮은 거 맞아요?”
“…….”
“효열 오빠! 힘내요. 힘내… 힘내요….”
“채령 씨를 부탁드려요. 거기 두 분 이쪽으로 오세요!”
다시는… 그 누구도 내 앞에서 죽게 하지 않겠다는 그날의 다짐이, 그날의 약속이 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전사들까지 녀석에게 달라붙었고, 우효열은 자신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말해주듯 녀석의 온몸이 뻣뻣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핏줄이 크게 부풀어 올라 계속해서 꿈틀거린다. 마치 몸이 터지기 직전처럼 보인다.
입으로는 계속해서 검은색 혈액이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는 중, 어째서 이런 증상이 일어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을 맞이한 것만은 확실했다.
연대에 남아 있는 사제들 역시 무거운 얼굴로 주문진에서 비치된 곳에 자리를 잡는다.
해야 할 일을 당연히 알고 있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신성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물론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
주문진 가운데에선 꽃기영은 이곳에 온 이래로 가장 커다란 빛을 뿜어댄다. 그야말로 눈이 부셔 제대로 바라볼 수조차 없는 빛.
‘신성해 보이자너.’
너무나 찬란하고 거룩하게 비치는 빛.
나는 머리 위로는 여전히 빛으로 만들어진 꽃 화관을 쓴 채로 계속해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 빛의 영향을 받은 것만으로도 상처 입은 이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그래 봤자 경상이었지만 신비롭게 비칠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그래.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 이 순간, 이 장소에 바로 성자가 강림했다.
빛의 화관에서 꽃잎들이 하나둘, 천천히 떨어진다.
지금의 주문이 꽃기영의 생명력을 태우고 있다는 암시였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못해 슬픈 상황, 남궁선이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부파티장님… 그건….”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어차피…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이었으니까.”
“네?”
의문이 깃든 목소리를 뒤로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신성한 의식은 계속해서 진행되어야 한다.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부파티장님….”
“…….”
“그게 무슨 말이냐구요….”
“별것 아니에요. 그냥… 그냥 제 생명력을 조금 나누어 드리는 것뿐이니까.”
“그게 어떻게 별것 아니….”
“다시는… 다시는 그 누구도 잃지 않을 거예요. 다시는.”
슬슬 의식을 찾아가는 우효열의 귀에도 틀림없이 이 명대사가 들려오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