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87화
노을빛의 마왕성 (7)
오랜만에 찾아온 기쁜 소식이었다.
마치 균열박물관을 떠올리게 하는 규모의 수집품들, 무려 20번대 악마 군주의 수집품들이라면 균열박물관 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성이에 의해 운명하신 우리 전 21군단장은 특별한 기물에 대한 수집벽이라도 있었던 모양, 벨리알의 창고도 충분히 멋지기는 했지만 저것과는 조금 결이 다르다.
‘벨 이사는 쓸데없는 예술품 같은 거나 긁어모은 것 같았는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부족 깃발이나 토템 같은 것들, 심지어 지구에 있는 예술품들까지.
그것들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었지만 21군단이 지금까지 쌓아 온 것들과 비교가 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 대륙을 기준으로 전설 등급이나 준 신화 등급의 기물들이 널려 있는 것처럼 보였고 심지어 10번대 넘버링이 붙어 있는 컬렉션들은 신화등급의 아이템처럼 보였다.
이 시련을 이겨낸다면 아군 전력이 대폭 강화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지사.
물론 저 수집품들을 사용할 수 있는 인원은 다섯이 채 넘지 않을 테지만, 우효열이나 윌리엄 같은 네임드들에게 힘을 실어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머지는 다 내 거자너.’
물건의 주인은 당연히 김현성이었지만 본래 내 것도 내 것, 김현성 것도 내 것이라는 게 현성이와 나의 끈끈한 우정을 유지시켜 주는 비결 아니었던가.
‘암만 생각해도 최고의 선물이야.’
이 정도면 술 처먹고 실수한 것 정도야 눈감아줄 수 있다.
‘아냐. 저게 끝이 아니지. 무기창고 관리자도 있지 않았나? 유아영이였지?’
심지어 창고가 하나 더 있다. 기상천외하고 신기한 수집품들 외에도 무구만 따로 관리하는 창고가 하나 더 있단다.
재물은 이미 많았지만 본래 많을수록 더 가지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
어떻게든 표정 관리를 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입꼬리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거 빨리 가야겠다.’
“채령 씨.”
-부… 부파티장님! 효열 오빠가….
“저도… 저도 보고 있어요.”
애써 울음을 참는 듯한 목소리를 선보이자 오열하는 임채령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흐윽… 흐으으윽… 어떻게 해요… 효열이 오빠 죽나 봐요. 흐윽… 안 움직여요… 흐윽… 흐윽… 언니들이 계속 붙어 있는데도… 계속 안 움직여요. 흐윽….
“…….”
-흐으윽… 이런 건… 이제 싫어….
“괜찮을 거예요. 채령 씨. 우효열 씨라면 반드시…. 반드시 살아 있을 거예요.
-…….
“일단. 제가… 제가 그쪽으로 가야겠어요.”
-아!
그제야 화색이 도는 얼굴이 눈에 보였다. 이쪽 역시 성자급의 사제였으니 기대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물론 그런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어두워지는 것에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효열은 죽어가고 있었고, 시간이 촌각을 다투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이 넓은 마왕성에서 자신이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분 1초가 아까운 지금 같은 상황에서 꽃기영이 해당 장소에 도착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 답은 열려 있다.
그녀에게는 조금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마동력 위치 전환기가 필요해요. 3연대를 이동시켰던 그 아티팩트….”
-네?
“할 수 있겠어요?”
-…….
“…….”
-네.
“작전에 대한 백업은 이쪽에서 해 드릴 거예요. 노담혜 씨도 남궁선 씨도… 전부 뒤에서 채령 씨를 뒤받쳐 줄 거예요.”
-네. 부파티장님.
“정말로… 할 수 있겠어요?”
-네. 할 수 있어요. 아니, 해야 돼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에요.
‘가능하려나.’
임채령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성공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우효열의 목숨이 자기 자신한테 달려 있는 것 같은 기분일 테니 적당한 동기부여가 됐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볼트 할아버지를 보내길 잘했어.’
애들이 트라우마가 생겨 가지고 이런 상황만 오면 절박해지자너.
벌떡 일어난 임채령은 정면을 바라본다. 머리를 질끈 묶은 이후에는 방어구들을 하나씩 땅바닥에 떨어뜨린다.
최대한 빠르게 달리기 위해 민첩 스탯이 붙은 아이템을 제외한 모든 걸 해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눈동자에 우효열을 살리고 싶다는 열망이 깃들어 있는 것은 당연지사.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채령 씨를 수집품 관리자에게 닿게 만드는 것 뿐이에요. 그 외에는 모두 채령 씨에게 달려 있어요.”
-네.
“그럼 무운을 빌어요.”
-네. 부파티장님.
“…….”
-…….
“가요.”
-민첩함의 선율!
이동속도 증가 버프가 그녀에게 쏟아지는 순간,
임채령이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우워어아아아아아어아아!!
눈앞에 있는 것은 수집품 213번 지옥마력골렘. 녹색의 불에 타고 있는 골렘의 크기과 위압감은 압도적이라는 말로 전부 표현되지 않을 정도였다.
3연대의 몇몇 놈들은 겁을 집어 먹고 숨을 죽이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반대로 동료들을 독려하며 레이드를 펼치고 있는 이들에게 곧바로 메시지를 보낸다.
목표는 당연히 길을 여는 것.
-최대한 사거리를 유지해! 녀석이 달라붙지 못하게 하라고 젠장!
-우워아아아아!
쿠웅! 콰아아아아아앙!
녀석은 커다란 팔을 휘두른 이후 입에서 지옥마력불길을 뿜어내는 중, 마법사들이 계속해서 보호마법을 외기는 했지만 너무나 허무하게 투명한 막이 녹아내린다.
수십 개의 마법이 중첩됐음에도 불구하고 버티는 것은 몇 분이 한계였지만,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시간을 벌기에는 충분했다.
이를 악문 채로 달리고 있는 임채령이 열기를 뚫고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불길이 잦아들기는 했지만 지속적인 마력에 의한 열기는 남아 있는지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이 보인다.
아직도 바닥에서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지만 임채령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듯이 더 빠르게 발을 놀린다.
-채령아!
남궁선이 그녀에게 계속해서 회복주문을 걸어주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뚫고 나오는 대미지를 전부 회복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얘 죽기 일보 직전이자너.’
그녀가 계속해서 고통을 참고 달릴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레이먼 볼트의 유산이 아니었을까.
-절대… 이번에는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채령아….’
-절대로… 절대로!
뭔가 보여줘야 하는 타이밍이라 생각하기는 했었지만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뭔가를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발버둥 치는 벌레가 한 마리… 밟아 죽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만….
최소한 황정연의 눈에도 그녀가 들어온 것을 보면 말이다.
-수집품 412번 랜덤마법박스 이 수집품도 정말로 사용해 보고 싶었는데 마침 좋은 타이밍인 것 같군요.
황정연의 머리 위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하학적인 무늬가 그려져 있는 작은 상자.
이윽고 상자가 열리자 거대한 해일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쉬운 마법이 나온 것 같습니다. 후우… 이건 실수로군요.
-아아….
임채령은 허무하다는 얼굴로 자신의 키에 몇십 배는 더 커다란 파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 끝인가라는 말이라도 내뱉을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이내 다시금 입술을 깨문 그녀는 단검을 든 채로 파도 앞으로 한 발자국을 더 움직인다.
그리고.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임채령의 몸을 감싼 남궁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임채령의 방패가 되어준 것이다.
-언… 니!!
-가! 채령아!
파도에 휩쓸리며 남궁선은 말을 내뱉었고 임채령은 그녀가 만들어준 작은 틈을 향해 단검을 내지르며 반대쪽으로 빠져나온다.
물에 빠진 생쥐가 된 꼴이었지만 여전히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수집품 11번 얼음가루시계.
-이야아아아아아아!!!
황정연의 뒤에 커다란 모래시계가 생성되기 시작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모래가 아닌 눈 결정으로 안이 채워져 있었다는 것.
눈 결정이 한 번 떨어지자 시간이 멈춘 듯 갑작스레 한파가 불어닥쳤다.
‘랜덤 뭐시기는 그냥 재미로 꺼내는 것 같고… 저건… 저건 진짜다.’
나도 웬만하면 임채령에게 집중하고 싶었지만 마치 이기영 프레젠트 쇼케이스를 보는 듯한 느낌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세상 행복하자너.’
하나하나 선물이 시연될 때마다 두근거린다.
-수집품 56번 샤넬리아 에르메스의 전투가방.
‘저건 좀 치워 시바.’
곧바로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은 당연지사.
-이야아아아아아!!
-쓸데없는 발버둥입니다.
쇼케이스에 혼을 빼앗긴 사이에 임채령은 다시 한번 달린다. 온몸이 얼어붙는 한기에 맞서며 말이다.
얼음가루시계가 전부 떨어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정확히 저것이 어떤 아이템인지는 알 턱이 없지만 가루가 전부 떨어진다면 아군 측에 좋지 않을 영향이 미칠 건 바보가 아니라면 깨달을 수 있는 사실이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임채령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동료들의 도움을 받거나 상처투성이가 되면서 계속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황정연의 눈빛이 흔들리는 게 보인 것은 바로 그때였다.
‘쟤 마음 너무 약하자너….’
저도 모르게 안경을 고쳐 잡으며 연기에 열중하고 있었지만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임채령이 가여워 보인 것이 분명하리라.
당연히 동정심을 가지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만큼 임채령과 황정연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격차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엄연히 지금 그녀는 누군가를 동정해도 될 위치에 서 있었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임채령이 자신의 코앞까지 닥쳐왔을 때도 별다른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던 것은.
-수집품 9번. 아이기스의 방패 조각.
둘의 몸이 잠깐 뒤엉킨 것 같기는 했지만 임채령의 단검은 허공에서 생겨난 방패에 허무하게 가로막힌다.
심지어 그 반탄력으로 튕겨 나가기까지 해 벽에 몸을 강하게 부딪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제게 공격은 통하지 않습니다. 아쉬운 시도였군요.
-히… 히힛. 그런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거든….
-당신.
-나. 원래 도둑이야.
임채령의 손에 쥐어진 것은 작은 원형 팔찌.
-부파티장님! 이거 어떻게 작동시켜요?! 빨리요! 빨리!
사용법 따위는 보자마자 금방 깨달을 수 있다. 나는 곧바로 그녀를 향해 입을 열었고. 이윽고….
하얀색 빛과 함께 나타난 임채령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부파티장님?”
“고생하셨어요. 채령 씨.”
나를 보자마자 곧바로 쓰러지는 그녀를 그대로 받아 든 이후에는….
‘일단 곰탱이나 다른 곳으로 보내야겠다.’
아직까지 레이드에 열중하고 있는 1연대와 마수조련사 알프스의 균형에 파문을 내던진다.
마동력 위치 전환기를 작동시키자 눈앞에 있는 곰이 빛에 휩싸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세 마리가 있어야 효율을 보여주는 패턴이었으니 한 마리가 빠진다면 아군 네임드 몇몇이 빠진다 해도 적당히 공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앗! 곰돌이가! 아니… 호오홋홋!”
‘에밀리아만 있으면 될 거야.’
다음 차례는 우리.
“이기영 님?”
“윌리엄 님. 하얀 씨.”
둘의 손을 꽉 잡은 이후, 다시 한번 위치 전환기를 작동시키자,
마치 보석상자 안에 들어온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이게 다 내 거야. 시바.’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찐기영이길 바라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상 행복해 죽겠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