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86화
노을빛의 마왕성 (6)
물론,
‘돼지 새끼.’
피떡이 된 채로 나뒹구는 우효열이 보이기는 했지만 반가운 돼지 새끼에게 시선이 먼저 가는 것은 당연했다.
오랜만에 녀석을 봤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늠름해 보이자너.’
덩치가 더 커 보여서 더욱더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장성한 자식을 보고 있는 아버지의 심정이 이러할까. 흑색의 삐까번쩍한 장비가 가장 두드러진다.
항상 들고 다녔던 커다란 방패는 없었지만 흉측한 장식이 달려 있는 검은색 방패는 충분히 이전의 장비보다 급이 높아 보였다.
실상 전에 차고 있었던 박덕구의 장비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내 손을 전부 거친 상태였다.
딱 박덕구에게 맞는 것으로만 엄선하고 엄선한, 커스텀한 장비 세트.
대륙 전체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질이 좋고 값이 나가는 아이템들로 무장을 했었고, 장비를 장착한 녀석의 모습에 캐릭터를 육성하는 것과 같은 뿌듯함을 느낀 적도 있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완전히 새로운 장비를 차고 있던 박덕구의 모습이 괜스레 새롭다.
21군단의 장비 창고에서 걷어온 아이템들이겠지만… 그래도….
‘뭔가 그렇자너.’
구태여 예를 들자면 둥지를 떠난 아기 새가 장성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본 것만 같은 기분.
그것도 전에 보지 못한 화려한 깃털을 장착한 채로 돌아온 것처럼 보였다.
“돼지 새끼.”
물론 그 외에도 반가운 얼굴들이 있기야 했지만….
‘뭐 좋을 게 있다고 여기 이렇게 다 모여 있어?’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리라.
스미스 대령이 무자비하게 얻어맞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아프기야 했겠지만 구태여 파란 길드 전원이 튀어나올 필요가 있나에 대해 고민해 볼 수밖에 없었던 시점이었다.
그리고 저거….
‘효열아 너 죽은 건 아니지?’
시선을 돌리자 박덕구의 무게 있는 한 방에 나가 떨어져 있는 인형 하나가 눈에 보인다.
안 그래도 스미스 대령과 생사를 넘나드는 결투를 벌였던 녀석이 온몸의 뼈가 부러진 것 같은 모습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효열 오빠아!!!!!
임채령의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고.
-효열 씨!
-파… 파티장님!!
남궁선 노담혜까지 크게 당황한 듯이 뛰쳐나간다.
-언니! 빨리!! 언니!
-치유의 선율!
-죽지 마… 죽지 마! 죽지 말라고! 이 멍청한 놈아!! 이 멍청한 새끼야!!
-언니! 빨리! 빨리요! 빨리!!
-지금….
-안 죽는 거죠? 효열 오빠 괜찮은 거 맞죠? 그렇죠? 괜찮은 거 맞는 거죠?!
‘걱정되면 연주에 집중 좀 하게 내버려 둬.’
우효열을 바라보는 임채령의 얼굴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멘탈이 나가도 단단히 나가 있는 모습, 계속해서 치유의 선율을 연주하고 있는 노담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궁선도 함께 신성력을 쏟아붓고는 있었지만 우효열은 계속해서 울컥울컥 피를 토하고 있었다.
심지어 간헐적으로 손발이 점점 굳어가는 것을 보면 정말로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기는 한 모양.
임채령의 생각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았는지 결국 창백한 표정으로 우효열의 위에 올라가서 심장을 압박하고 있었다.
-죽지 마! 죽지 마요! 제발… 죽지 마! 이 성격 나쁜 양아치 새끼야!
-…….
-이대로 죽을 거야? 이대로? 정말로 이렇게 죽을 거냐고!
‘그래도… 당연히 안 죽겠지.’
쟤가 그나마 가능성 있는 놈이라는 걸 김예리 역시 이해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곤죽이 된 스미스 대령을 구하기 위해 90년대 일진마냥 우르르 몰려든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가기는 했지만 김예리는 공과 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성격이었다.
이렇게 모습을 드러낸 것 역시 극을 다음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했고, 언제나 그렇듯 내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아니면 저렇게 복장을 갖춰 입고 등장하지도 않았을 테니까.
‘아무리 그래도 시바. 저렇게 일렬로 쫘르륵 서 있는 건 너무 옛날 연출 아니야?’
전형적인 빌런 집단의 모습, 주인공 일행이 앞으로 상대해야 하는 개성 넘치는 악당들의 단체 등장 씬 같은 느낌이었다.
몇몇은 망토나 후드로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있는 것도 포인트, 김예리 같은 경우에는 드러낸 쪽이었다.
-흥.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인간들이. 개미떼들처럼 몰려 있군요.
서큐버스 여왕 매혹의 예리엘이라는 이명치고는 너무나도 바른 발음과 바른 옷매무새.
상채와 다리 쪽에 약간의 노출이 있기야 했지만 사실상 평상복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재질의 옷은 암살자로서의 그녀가 매번 갖춰 입던 옷이었으니 사실상 거기에 몇 가지 악세사리들을 첨부한 것이 전부였다.
그 와중에 망토는 꼭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질질 끌리는 망토를 입고 있었다.
-아니면… 이 서큐버스 여왕 매혹의 예리엘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찾아온 건가요?
‘미치겠다. 진짜.’
미치겠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정말로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한 느낌이 든다. 저도 모르게 몸을 꼬고 싶다.
-저 역시 바라는 바, 하지만… 아직 당신들은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무슨 준비?’
-쾌락에 흠뻑 빠질 준비 말이에요.
큰일 났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기 시작했다.
-조금은 재미있는 ‘여흥’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습니다만….
-크윽….
-어쩌면 제가 너무 큰 기대를 하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사천왕 중 최약체. 암흑 방패 수문장에게 저리 허무하게 나가떨어지는 꼴이라니.
-우옴!
심지어 시발 암흑 방패 수문장은 말을 할 수 없는 설정인가 보다.
-그렇지 않나요? 암흑 방패 수문장?
-우움! 우우움!
암흑 방패 수문장 박덕구의 과장된 몸짓과 부자연스러운 소리.
-오우움! 오움! 오우우움!
-하? 가능성? 방금 가능성이라고 했나요?
-우움! 오옴! 우오옴!
-저자를 지금 당장 죽여야 된다고요? 하! 암흑 방패 수문장… 그런 쓸데없는 걱정으로 우리의 여흥을 망칠 생각이신가요?
-우옴! 오오오오옴!
-당신은 쓸데없는 걱정이 너무 많아요. 제대로 걷는 법도 모르는 필멸자 따위를 걱정하는 꼴이라니. 흑집사 스미스가 쓰러지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 흑집사가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거예요.
-우옴….
-하핫. 너무 그렇게 암흑 방패 수문장을 몰아붙이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서큐버스 여왕 매혹의 예리엘이시여.
-호오… 광란의 성전사 아르기르모. 당신도 할 말이 있는 건가요?
-아니요. 그건 아닙니다만… 암흑 방패 수문장의 말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한낱 인간이 흑집사를 쓰러뜨렸다는 것은 저 역시 믿기지 않지만 실제로 우리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 아닙니까.
-그래서. 아르기르모 당신 역시 저의 여흥을 망치시겠다는….
-그런 뜻으로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예리엘 님.
-그렇다면….
-저 역시 지금 당장 저들의 피로 목을 축이고 싶지만… 아직 저들은 많이 부족합니다. 여흥의 대상이 되기에도… 예리엘 님을 만족시키기에도 말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눈앞에 있는 자들은 구태여 예리엘 님이 신경 쓰실 필요도 없는 벌레들입니다.
-우옴! 우오오오옴!
-흐응… 일리가 있어요. 아르기르모.
-…….
-…….
-수집품 관리자에게 저들을 상대하게 하시지요.
-흐음….
-그곳에서 죽는다면 예리엘 님께서 상대하실 필요도 없는 존재들 이라는 게 증명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시나 그들이 수집품 관리자를 쓰러뜨린다면 그것 또한 좋은 여흥이 될 것입니다.
비열한 미소를 띄우고 있는 피에 미친 성전사 아르기르모.
확실하게 박기리 삼남매의 캐릭터 시트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어째서 이런 흐름으로 가고 있는지 역시, 이해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패턴이었다.
인간을 벌레 취급하다가 역으로 당하게 되는 너무나 전형적인 클리셰.
흑집사 스미스가 당한 것은 방심했기 때문이라고, 진심을 다해 싸웠다면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방치하다 경험치가 되는 스토리는 빌런들에게 비일비재하기 일어나는 비극이 아니었던가.
‘아니….’
캐릭터도 나름 입체적이다.
하늘 높은지 모르는 오만한 서큐버스 여왕.
묵묵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지만 사천왕 중 최약체로서 무시당하는 암흑 방패 수문장.
-우우으으음!
문제는 저 둘의 상태가 최악이었다는 것이었지만 피에 미친 성전사가 아르기르모가 외줄을 타 듯 밸런스를 잘 잡아주고 있다.
아르기르모가 그나마 이 극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이유였다.
살짝살짝 웃고 있는 실눈 재질에 불현듯 피어나는 피에 대한 광기와 갈망을 잘 표현하고 있었고, 너무 티가 나지 않게 스토리의 흐름을 안내 해주고 있기까지 하다.
실제로 김예리는 안기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처럼 보인다.
-흐응… 제법 멋진 의견을 내주었군요. 아르기르모.
-받아들여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예리엘 님.
-하지만 만약 저들이 허무하게 죽는다면… 당신의 갈증은 제대로 해소되지 않을 텐데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리엘 님. 그때는 그 분노를 로헨에게 물을 테니 말입니다.
-참… 당신도… 여전하군요. 지나치게 잔인하고… 에… 엣취! 네… 잔인하고….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게 먹힌다는 거자너.’
우효열을 한 손으로 날려 보낸 암흑 방패병도 방패병이었지만 일단 눈앞에 있는 빌런 무리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존재감이 심상치 않다는 것은 저들 역시 인지하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갤러리들은 김예리의 어설픈 서큐버스 여왕 역할극의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그냥 두려 하거나….
-제길….
-죽고싶지… 않아. 제기랄….
-제길… 저딴 게… 저딴 게….
반감을 가질 뿐이었다.
-개소리하지 마라! 이 더러운 악마들아!
방금 전 안기모가 했던 로헨에 분노를 묻는다는 발언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모든 인간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킬 것이 있을 때 강해지는 종류의 인간들이 있다.
영웅 DNA 같은 걸 타고나는 녀석들이었다.
안기모가 가능성 있는 녀석들에게 싸워야 하는 이유를 다시금 상기시켜 준 셈.
‘그래. 그나마. 네가 살린다. 진짜… 네가 캐리하고 있는 것 같아. 기모야. 시바.’
-그럼. 아르기르모의 말대로 하도록 하지요.
-네. 예리엘 님.
-수집품 관리자. 황정연. 이곳은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매혹의 예리엘 님이시여.
뜬금없는 질문인 데 도대체 왜 시바 몇 명은 한국 이름 쓰고 있는 걸까.
‘심지어 그걸 아무도 지적 안 하는 거야?’
예리엘 아르기르모 막 튀어나오는데 갑자기 코리안 네임 황정연이 튀어 나오는 게 이상하지 않은 것일까.
어설픈 구석이 한두 가지가 있는 게 아니었지만 극은 계속해서 진행된다.
황정연이 주문을 외우자 커다란 하얀색 빛이 바닥에서 반짝이기 시작한 것.
-수집품 4번 마동력 위치 전환 기입니다. 21군단이 자랑하는 넘버링 수집품 중에 하나. 미개한 당신들에게 마왕성의 수집품을 모두 보여드리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답니다.
순식간에 전환된 배경, 수집품 관리자라는 이명에 알맞듯 3연대 전체가 이동된 장소는 거대한 창고였다.
빼곡하게 들어선 온갖 수집품들이 마치 물류창고에 나열된 것처럼 빽빽하게 진열되어 있다.
-이 수집품을 정말로 사용해 보고 싶었답니다.
초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그녀에게 딱 알맞은 기믹이라는 생각을 했을 때.
-수집품 213번 지옥 마력 골렘입니다!
녹색 불에 불타는 거대한 골렘이 창고에서 떨어져 내렸다.
-우…으어아아워어어어어어어어어!!!
-부디 저를 즐겁게 해주시길.
-…….
-…….
우효열의 부상으로 커다란 전력을 잃은 3연대에게는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시바. 현성아. 저 수집품들… 이제 전부 우리 거야?’
입꼬리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