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81화
노을빛의 마왕성 (1)
“빨리빨리 움직여! 뭣들 하고 있어?”
“보급품들 확인 전부 끝냈어?”
“어이! 그건 이쪽으로 들고 와야지!”
“한 시간 후에 출발이라는 공지 못들은 머저리들 있나?”
“부대 정렬! 부대 정렬!”
‘이제야 좀 활기가 넘치자너.’
“빨리 움직이라고 이 거북이 같은 새끼들아!”
이걸 활기라고 부르는 게 옳은 표현이라면 말이다.
‘그러게 진작 준비 좀 해놓지.’
언제든지 출발할 준비를 해놓으라고 언질을 놓은 게 며칠 전이었는데…
‘지들 딴에는 다 준비되었다고 생각했었나 봐.’
막상 상황이 닥쳐오니 이것저것 확인할 것이 많았던 것 같았다. 물론 이해할 수는 있었다.
노을빛의 마왕성 공략은 로헨 대륙에서도 유례가 없었던 규모의 원정이었으니 너도나도 경험이 없었겠지.
나름 유능해 보여 자리에 앉혀 놨던 본부 인선들은 대공황 사태라도 맞은 것마냥 패닉을 호소하고 있었다.
“곧 선봉대가 출발한다고 합니다.”
“본대 출발은? 예정대로 인가?”
“네. 예정대로 진행한다고 합니다.”
“제기랄. 출정을 늦추는 방향은….”
나 들으라고 이야기하는 거지. 니네?
“이견은 없답니다.”
“후우… 뭣들하고 있어! 빨리빨리 안 움직여?!”
‘김미영 팀장이 그립기는 해.’
정확히 말하면 김미영 팀장이 꾸린 그녀의 팀이었지만 최종 결재나 업무지휘는 김미영 팀장의 역량이었으니까.
물론 우리 대륙에서도 원정 준비가 늘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이런 사태를 겪어본 적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커다란 마차에 이것저것 짐을 옮기고 있었고 여기저기에서는 고성과 고함 소리들이 들려온다.
어제저녁부터 이 소란스러움이 계속됐으니 아마 보급대대는 어젯밤부터 한숨도 자지 못했을 것이다.
‘조금 느린 것 가지고 뭐라고 안 할 테니까. 확실히만 해줘라. 좀. 확실히 좀.’
바로 옆에서 인기척이 들려온 것은 원정 준비를 하고 있는 이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이기영 님.”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그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앗! 윌리엄 님! 왠지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실제로도 오랜만일 겁니다. 그간 이기영 님께서는….”
“네. 파티원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으니까요. 새삼스럽지만 이렇게 둘이 대화하는 것도… 뭔가 낯선 것 같아요. 죄송해요. 제가 그간….”
“하하… 괜찮습니다. 이기영 님께서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파티가 반가우셨을 테니….”
“제가 너무 눈치가 없었을까요?”
“…….”
조금 눈치 없게 굴기는 했지. 물론 선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를 문제 삼는 이들도 있기야 있었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이 넘쳐흐르는 상황이었으니까. 로헨은 분명 원정을 앞두고 있었고, 그간 꽃기영의 행적은 마왕성 원정의 총지휘관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아마 많은 이들이 꽃기영의 모습을 훔쳐봤을 것이고, 그것은 당연히 윌리엄의 귀에도 들어갔겠지.
“노래를 부르거나 시끄럽게 수다를 떤다거나 하는 것들은 병사들 앞에서는 보이면 안 되는 행동이었는데… 분명히 말이 나왔겠죠?”
“장담하건대….”
“네.”
“그 누구도 이기영 님을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기는 해.’
“동료들을… 아니, 친구들을 잃으실까 두려우신 겁니까?”
“…….”
“…….”
“네. 비슷해요. 이번 원정의 위험성은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테니까요. 이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 끝맺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떠나고 많은 이들이 남겨지겠죠. 할아버지… 아니, 레이먼 볼트 님처럼 말이에요.”
“…….”
“이제는 이런 종류의 이별에 대해 담담할 수 있을 거라고, 전에 다시 일어섰던 것처럼 이번에도 일어설 수 있을 거라고, 마음속에 있다면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그렇게… 여기고 있었지만….”
“이기영 님….”
“타인의 죽음뿐만이 아니에요. 윌리엄 님과 함께 많은 죽음을 겪으면서도 항상 생각했었어요. 이제는 죽음이 두렵지 않을 것 같다고, 로헨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목숨이 초개처럼 사라져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저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겁쟁이였었나 봐요.”
“…….”
“소중한 사람들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게 얼마나…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인지….”
“어째서…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이기영 님께서 생각하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 이기영 님을 해하려고 한다면….”
말 길어질 것 같자너. 빨리 끊어야지.
“위로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 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를 명백히 보여주자 입을 꾹 다문 채로 한 발자국 물러선 근본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슬픈 표정 좀 선보이고, 이제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활짝 웃기. 방금의 우울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이기영 님….”
“그럼… 슬슬 출발할까요?”
“잠깐… 드리고 싶은 말이….”
“정찰대와 선봉대가 출발한 지 꽤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 지금에라도 출발해야 늦지 않을 거예요.”
“네.”
“출정식은 생략하도록 할게요. 얼마나 안전하고 빠르게 잿빛노을 지역을 통과하느냐가 관건이니 윌리엄 님도 병력관리에 힘써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뭔가 석연치 않은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물러나 주겠다는 심산인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이 순간 외에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을 것이다.
‘내가 거부할 거자너.’
이미 23살 꽃기영은 자신의 역할에 대해 깨달았으니까. 설정상 알맞은 흐름이었고 준비를 마치기도 했다.
“출정한다.”
“출정한다!!”
그렇지?
‘우리 조금 친해진 거 맞지? 효열아?’
함께한 시간은 배신하지 않는다.
“어? 부파티장님도 우리랑 같이 가시는 거예요?”
“일부러 부대를 옮겨달라고 요청드렸어요. 가는 길이라도 함께 있고 싶어서….”
“에이. 요즘 우리 너무 좋아하신다니까. 헤헤….”
“흥.”
‘우리 더 친해진 거 맞지?’
워낙 티를 내지 않는 녀석이라 정확한 진단을 내리기는 힘들었지만 이전보다 훨씬 가까워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매번 시바 땀 냄새 나는 훈련장에 처박혀 보냈던 시간은 결코 허상이 아니다.
봐. 지금도 은근슬쩍 이쪽이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은가.
“할 일도 더럽게 없나 보군.”
‘먼저… 말을 걸어줬어.’
“상황이 터지기 전까지는….”
“여기서 이렇게 있을 시간이 있는 건가?”
“제가 할 일은 많지 않으니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돼요. 병력이 워낙 많으니 자잘한 일들은 전부 세분화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이렇게 나와서 걸을 수 있는 시간도 많지 않아요. 보통은 마차 안에 마련되어 있는 상황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원칙이라.”
“…….”
“휴식 시간이나 부득이하게 캠프를 만들어야 할 때가 아니면 보통 나오지 않을 거예요.”
남궁선이 말을 이어왔다.
“그럼 지금은….”
“아직 잿빛노을 지역에 진입하기 전이니까요.”
“네놈.”
“네?”
“너무 여유 부리는 것 아닌가?”
“아니, 갑자기 또 왜 딴지를 걸어요? 부파티장님 괜히 마음 쓰지 마세요. 이 오빠가 오늘 뭘 잘못 먹고 왔나 봐요. 꼭 잘 나가다가 가끔 지랄병이 터진다니까요.”
“너는 입 다물어라. 천둥벌거숭이. 내가 결코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니까. 출정 전에 의미 없는 시간을 보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지금은 전시 상황이 아닌가? 이해하기 힘들군.”
‘이 새끼 업보스택 쌓네.’
“우리는 캠핑하러 가고 있는 게 아니야. 아직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적을, 메인스트림에 등록되어 있는 던전을 공략하러 가는 것 아닌가? 적어도 조금은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하하호호 떠드는 게 네놈을 위로한다면 어쩔 수 없다만… 독기가 빠져 있어.”
“그런….”
“내가 할 말은 그것뿐이다.”
‘이 새끼도 조금 예민하네.’
그냥 이런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지, 단순히 화풀이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지만 행군 내내 평소보다 예민해 보이는 우효 녀석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녀석 역시 이 원정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로헨 대륙을 관통하는 메인스트림의 첫 원정이었고… 악마 군단장은 우효 녀석의 회귀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리 둔감한 녀석이어도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상황이었으니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어쩌면….
‘동료를 잃을까 봐 불안한 걸 수도 있자너.’
제발 우효 녀석의 무의식에 이런 감정들이 숨어 있었으면 좋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레이먼 볼트의 죽음에 영향을 받았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동료들이 더 정이 들어 버렸다는 이야기였으면 좋겠다.
매번 틱틱대는 임채령, 말없이 파티를 지지해 주는 남궁선, 1회차에서 연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노담혜.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삶에 쑥 비집고 들어온 그 녀석 꽃기영.
무의식에서는 가족이라고 여기고 있는 이들이 혹시나 이번 원정에서 죽을까 본인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느낀 불안함이 지금과 같은 상황으로 이어진 거라면 좋겠다.
‘왠지 그런 것 같아.’
우리 그동안 더 친해졌잖아. 솔직히 이제 정들 때도 됐잖아.
원정이 상상하기 싫은 최악의 결과로 이어질까 예민했던 거지? 그런 거 맞지?
물론 아직은 어린 23살의 꽃기영은 그런 우효열을 이해할 생각 따위는 없다.
어른스러운 척, 객관적인 척, 모든 것을 이해한 척하고 있었지만 23살의 꽃기영은 아직 멋 모르는 청년에 불과했다.
초조한 것은 이쪽 역시 마찬가지. 오히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내가…. 모르면서….”
“뭐?”
“내가 어떤 심정으로 여기 있는지도 모르면서….”
원망하는 듯한 눈동자로 녀석을 노려보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라고?”
‘마침 딱 적당한 타이밍이야.’
관계성은 이미 궤도에 올라간 것처럼 느껴졌고, 배우들이 무대로 향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원래 이런 종류의 비극은 관계가 약간 멀어졌을 때 감칠맛 난다는 것은 그 어떤 극작가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꽃기영은 애써 목구멍으로 올라오려는 섭섭함을 주워 담으며….
“이기영. 네놈….”
곧바로 마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당연히도 정하얀이 곧바로 이쪽을 따라붙었고 그렇게 로헨의 원정대는 본격적으로 잿빛노을 지역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무척이나 스무스하게 말이다.
간혹 거센 바람과 높은 파도가 우리 앞을 막아서기는 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시련들이 밝은 내일을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
원정대원들은 여전히 힘차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사실. 그냥 열려 있는 길로 가는 거지만….’
중간중간에 초조해진 우효 녀석이 은근슬쩍 마차의 주변을 서성이는 것을 본 것은 성과 아닌 성과.
시간이 조금 지난 이후로는 대놓고 마차 안에서 내가 나오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지만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말 한마디 하지 않는 게 가장 이롭다 느껴졌다.
그렇게.
“…….”
로헨은 노을빛의 마왕성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실수를 만회할 기회도 안 줄 거자너.’
당연히,
‘사과 같은 것도 안 받아줄 거자너.’
물론,
‘오해와 갈등도 쌓은 채로 내버려 둘 거자너.’
도착해 마차 안에서 내린 직후,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근처를 서성거리는 우효열이었지만….
나는 녀석을 애써 외면했고… 그 모습을 본 자존심 센 녀석도 인상을 한 것 찌푸린 채로 이쪽을 외면했다.
녀석은 확실하게 애새끼였다.
[메인스트림, 노을빛의 군주의 두 번째 이야기. 노을빛의 마왕성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