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77화
주연과 조연 (2)
저 멀리서 정하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앗!”
하는 감탄사를 내뱉고는 남궁선과 임채령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임채령은 조금 정하얀을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남궁선은 정하얀을 반겨주는 쪽. 의외였던 것은 정하얀이 남궁선을 대하는 태도였다. 지구에 있는 언니가 생각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남궁선에게 우호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우다다 달려들어가 한소라나 나에게 안기는 것처럼 점프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오, 오, 오랜만…….”
“네. 정하얀 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빠른 걸음으로 들어가 고개를 숙이며 부끄럽다는 듯이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남궁선도 딱히 정하얀을 밀어내고 싶지는 않은 모양, 마치 정하얀을 돌보아주는 것처럼 머리를 쓰다듬고는 살짝 포옹하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이기영 님도 잘 지내셨나요?”
“잘 지냈어요? 부파티장님.”
“네. 선 씨. 채령 씨.”
‘남궁선 쟤가 하얀이 언니랑 나이가 비슷하려나?’
잘은 몰라도 느낌은 비슷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정하얀이 가족사에 대해 말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자세하게 캐묻지는 못했지만 버림받기 전까지는 첫째 언니가 부모님 역할을 대신했다고 들었으니까. 어쩌면 그녀와 이미지가 비슷할 수도 있으리라. 내가 보기에도 남궁선은 뭔가 따뜻한 돌보미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내, 내가 저번에 소, 소, 소라라는 친구 말해줬었던 거…….”
“네. 기억하고 있어요. 와! 혹시 만나신 건가요? 다행이네요!”
“응. 소, 소개시켜 줄게……. 소, 소라야. 이…… 이리로 잠깐 와볼래?”
“네. 정하얀 님.”
“처음 뵙겠습니다. 정하얀 님께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남궁선이라고 합니다.”
“한소라…… 라고 해요. 정하얀 님과는 여기 오기 전부터 단짝친구였고……. 아무튼 처음 뵙겠습니다.”
서로 동질감을 느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은 모양, 한소라의 눈이 가늘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심지어 은근슬쩍 정하얀을 자신을 향해 당기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남궁선의 심성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까지 정하얀을 이용하려고 한 사람들이 셀 수도 없이 많다는 걸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있는 반응이기는 했지만…….
‘저건 너무 싸고도는 것 같은데.’
내가 어련히 거르고 걸렀을까 봐.
“저도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혹시 어떤 경로로 정하얀 님과 만나셨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너무 과보호자너.’
“그러니까…….”
“참. 우연이네요?”
“네. 우연…… 이었죠.”
만난 경위와 뭘 하는 사람인지, 여러 가지로 호구조사를 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쳤지만 구태여 내가 신경 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쪽은 이쪽 나름대로 임채령을 상대하느라 바빴기 때문이었다.
“제 이야기 듣고 있으신 거 확실하죠?”
“네.”
“그래서 던전을 한, 두 개 돌았을 거예요. 사냥을 몇 번 나갔는지는 진짜……. 아예 잠도 밖에서만 자고, 아니! 잘 시간도 없었다니까요. 얼마나 사람을 혹독하게 굴리는지……. 이기영 님이 그리웠어요, 진짜. 아! 그건 그렇고, 봤어요! 메인스트림 버림받은 성녀의 군대! 랭킹 1위로 클리어하신 거! 진짜 대단하시더라고요.”
“…….”
“원래는 일정이 하나 더 잡혀 있었는데, 그걸 보더니 효열이 오빠가 곧바로 세인트 벨로 향하자는 거 있죠? 얼마나 초조해 보이던지. 근데 자기는 그걸 몰라. 사람이 솔직하지 못해서…….”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마라. 천둥벌거숭이.”
“틱틱대는 건 똑같다니까요.”
“하하하…….”
“몸이 힘든 것도 몸이 힘든 건데, 저 성격 받아주는 게 제일 힘들었다고요, 진짜.”
“하하…….”
“그래도 뭐…… 결과는 좋은 것 같아요.”
“…….”
“부파티장님이 보시기에는 어때요?”
“네?”
“저희 좀 강해진 것 같나요?”
“…….”
“…….”
그 질문에 살짝 고개를 들어 그녀를 다시 바라본다.
사실 만났을 때부터 이미 한 번씩은 다 스캔했었지만…….
‘얘 진짜 많이 성장했네.’
솔직히 조금 놀라울 정도였다.
아직 3레벨에 머물러 있는 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일부러 안 한 거네.’
딱 리틀 우효열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두 사람은 크나큰 차이점이 있지만, 검사인 김현성과 암살자인 김예리가 스타일이 비슷한 것처럼 임채령이 우효열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았다.
대놓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성장치가 어느 정도인지 굳이 평가하자면 검은백조 입단이 가능하다고 느껴질 정도. 올려치기가 아니었다. 아직 나이도 어린 편이고 성장 가능성도 가능성이지만 눈으로 보이는 스펙 역시 나쁘지 않다. 전투 능력뿐만 아니라, 추적이나 흔적지우기 같은 레인저들의 스킬을 장착해 온 것도 참 마음에 든다.
“헤헤. 놀랐나 보다. 저 알고 보니까 은근히 재능이 있는 편이었나 봐요.”
“…….”
물론 2선으로 올라오기에는 재능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기는 하다. 당장 파란의 막내 벨리에만 해도 활약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지, 타고난 재능과 센스만 보고 영입한 경우였다. 그 벨리에와 눈앞의 임채령은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얘가 벨리에보다 못하리라는 법도 없지.’
파란이야 벨리에처럼 마법권투사라는 듣도 보도 못 한 고유 직업을 쓴 인선도 무리 없게 감당할 수 있지만, 아마 검은백조나 무난한 인선을 뽑기 원하는 대다수의 길드들은 임채령을 선호할 가능성이 높을 테니까.
“아 빨리 말해줘요! 어때요?”
“많이 달라진 것 같네요. 조금 놀랄 정도로 말이에요.”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근데 더 놀랄 일이 남아 있어요. 이야기했었나요? 담혜 언니도 드디어 전직했어요! 무려 레벨 5라니까요!”
“…….”
“직업은 뭐라더라…….”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녀가 입을 열어왔다.
“아…… 그러니까…… 잠시만요. 선율의 음유시인이에요.”
‘그래. 넌 솔직히 볼 것도 없었어.’
전투직군이 아니었을 뿐이지 원래도 레벨 5였고, 마력 재능도 웬만한 재능충들 이상이었으니까. 배고픈 음악을 하길 바라는 그녀의 게니우스를 갈아치우고 전투직군으로 활동할 수 있게 세팅만 해준다면 알아서 올라올 재목이었다.
“이제 여러분들께…… 버프를…… 걸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그동안 너무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죄송…… 했었는데…… 이제부터라도 도움이 될 수 있어서 다행이에요…….”
“엄청나다니까요. 담혜 언니가 막 노래를 부르는데 힘이 샘솟는 거 있죠. 심지어 상처도 치료해 줬어요. 그것뿐만이 아니라니까요? 몬스터를 잠재우기까지 하고……. 사실 이런 강행군을 버텨낸 것도 담혜 언니 덕분이에요. 아시죠?”
‘뭘?’
“원래 포션이나 신성마법 받아도 피로는 뭔가 안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 있잖아요. 근데 담혜 언니 거는 진짜로 피로가 싹 사라지는 것 같다니까요? 저희가 어떻게 잠 안 자고 버틸 수 있었겠어요.”
그래, 알았어.
“물론 열정과 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쟤는 못 본 사이에 수다가 더 는 것 같다.
우효열은 익숙한지 귀마개를 꺼내 자신의 귀를 막고 기둥에 등을 기대 팔짱을 끼고 있었다.
“선 씨는요?”
“아! 언니는 있죠!”
임채령의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천천히 마지막 타자를 살펴봤다.
“언니야 뭐 말할 것도 없죠! 이젠 저도 언니 못 이겨요. 그래도 명색이 근접직군이었는데…….”
‘얘가 제일 의외야.’
이미 예상했지만 떠나기 전 성기사를 목표로 했던 것이 나쁜 선택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사제직군으로 활동하기에는 애매했던 신성력을 계속해서 늘리려고 노력하기보다는 다른 스탯에 집중했던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체력과 근력, 민첩 스탯이 눈에 보일 정도로 크게 상승했고, 부실했던 무장 상태도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요……. 아무래도 효열 오빠가 언니를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대답할 가치도 없군.”
“왜요! 맞잖아요! 그렇게 티를 내면 누가 모를 것 같아요? 언니만 장비 계속 바꿔주고! 심지어 직업도 진짜 좋은 걸로 사줬잖아요! 나는 아직도 3레벨 단검 무법자인데! 언니는 4레벨 비밀 성기사라고요!”
“가장 장비가 필요한 사람의 장비를 맞춰줬을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차이가 나는 것 같단 말이에요.”
“내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나? 노력한 만큼 보상을 주겠다고 말이다. 내 눈에는 그녀가 가장 노력한 것처럼 보였을 뿐이다.”
‘다 들을 거면서 귀마개는 도대체 왜 끼고 있었던 거야? 쟤는…….’
부끄러운 듯이 살짝 고개를 숙인 남궁선의 모습이 보인다.
‘그래. 대충 봐도 보이기는 한다.’
얼마나 네가 노력했는지.
임채령이나 노담혜가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남궁선이 그들 이상으로 노력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 떠나기 전에는 굳은살 하나 없었던 손은 붕대로 칭칭 감고 있었고 얼굴 여기저기에 생긴 흉터도 두드러진다.
그녀를 이 상태로 처음 봤다면 전장에서 구르고 구른 용병으로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당연히 23살의 꽃기영은 그녀가 어째서 이토록 필사적이었는지 알고 있다.
“할아버지도 놀라시겠네요.”
그 사람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방패술을 가르쳐 준다고 하셨던 게 엊그제 같았는데…….”
“네…….”
순식간에 분위기 울적해지자너.
모두가 그날의 일을, 그 노전사의 희생을 기억하고 있다.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았던 우리 파티원들을 하나로 만들어준 존재, 세상을 향해 용기를 낼 수 있게,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는 희망을 안겨준 그 노전사 말이다.
‘잘 살아계시겠지?’
“…….”
“…….”
“에잇! 우울하게 이게 뭐예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할아버지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오랜만에 만난 회포부터 풀어요. 안 그래도 원정 끝나자마자 여기까지 달려오느라 피곤한데…….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서…… 아니면 우리 술 먹을까요? 대낮부터는 조금 그런가?”
“흥. 속 편한 소리 하는군.”
“또 나만 이상한 사람 만들지. 또 나만!”
“회포를 푸는 건 나중이다.”
“…….”
우효열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이제.”
“네?”
“네놈이 생각하는 기준점에 들어온 것 같나?”
‘이 새끼 떠나기 전에 레벨 업 하라고 한 거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여기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미세하게 입꼬리가 올라간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렇다면 원정에 등록해라.”
‘네가 직접 가서 등록해. 이 새끼야.’
“네!”
물론 밝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꽃기영의 아이덴티티.
하지만 직후에 나온 질문에는 살짝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네.”
“윌리엄은 지금 어디 있지?”
“윌리엄 님은 갑자기 왜…….”
“네가 알 필요는 없다. 장소나 이야기해 줬으면 좋겠군.”
본인이 생각하기에 어느 정도 폼이 올라왔다고 생각했을 테니 그때의 설욕전이라도 하고 싶어진 건진 모르겠지만…….
‘너 아마 얻어맞을 텐데…….’
500번이 넘는 회귀를 견뎌온 윌리엄을 상대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윌리엄은 시바 검으로 붉은 꽃을 그린다.
‘걔는 시바 검으로 붉은 꽃을 그린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