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74화
몰래 온 손님 (2)
‘너무 이른 것 같기는 한데….’
곧바로 피드백이 올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로 바쁘기야 하겠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바로 반응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짭현성 론이나 광증현성론이나 둘 다 위험하게 들리기에는 마찬가지.
구태여 예를 들어보자면 바다 한가운데에서 선장을 잃은 격이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당연했다. 파란 길드는 본래 그랬다.
이기영이나 김현성이 없을 때는 조혜진이, 조혜진이 없을 때면 선희영이 바통을 이어받는 것이 원칙이기는 했지만 길드마스터와 부길드마스터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 보니 정작 바통을 이어받더라도 제대로 된 운영을 하기 어려워할 때가 있었다.
만약 이기영이라면, 만약 김현성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질문은 조혜진, 선희영뿐만이 아니라 모든 길드원들에게 틀어박혀 있는 고질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기영은 기억을 잃었대.’
김현성은 가짜일지도 모른대. 아니면 이기영이 가짜일지도 모르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갈피를 잡을 수 있을 리 만무.
그나마 선희영이 발언권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니 그녀의 주장이 받아들여지기야 했겠지만 그게 길드원들의 방향성을 결정해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 잃은 아기 새들마냥 쫄래쫄래 올 줄 알았자너.’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그녀의 발언이 설득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선희영의 발언권이 길드 내에서 꽤 강하다고는 그렇다 해도 무작정 믿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점이 없지 않을 테니까.
“누구…시죠?”
그게 바로 김예리가 내 눈앞에 있는 이유였다.
‘창렬이 아니면 박리안, 것도 아니면 얘가 올 줄 알고 있었자너.’
다른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들어올 정도로 은밀 행동이 가능한 인선은 저 셋이 전부였으니까.
예리 같은 경우에는 북벌에 참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창렬이가 올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그 바쁜 와중에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몸소 행차해 주신 모양인 것 같았다.
천천히 겉모습을 살펴본다. 선희영 처럼 폼의 변화가 극적일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특별한 변화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 내가 놀랄 거라고 생각해 나름대로 해결책을 가지고 온 것이리라.
모습을 숨길 수 있다든지, 악마 폼을 온 오프 할 수 있다든지 하는 수단을 쓰고 온 것 같아 오랜만에 보는 꼬맹이의 모습은 로헨으로 떠나오기 전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이쪽을 바라보는 김예리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이쪽을 꿰뚫어 보는 듯이 느껴졌다면 기분 탓일까.
‘얘 눈치 빠른데….’
“누… 누구시죠? 당신은….”
“…….”
“사람을 부르겠어요. 지금 나가지 않는다면….”
‘아니지. 이게 아니지. 이런 스토리로 가는 건 아니지.’
때마침 달빛에 천천히 드러나는 김예리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성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앳되어 보이는 모습은 꽃기영으로 하여금 경계심을 풀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린아이?”
김예리를 빡치게 하기에는 충분한 발언이었지만 아쉽게도 김예리는 현재 화를 낼 수 없는 입장이었다.
“…….”
“여기는 어떻게 들어온 거죠?”
‘얘 왜 말을 안 해?’
“길을 잘못 들었나요?”
“…….”
“어느 패밀리아 소속인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아헨델? 아니… 보지 못했었는데….”
“…….”
“세인트 벨의 생존자?”
물론 이미 공장화가 가동 중인 세인트 벨에 남은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하겠지만 왠지 모르게 그럴듯한 설정이기도 했다.
일단 김예리를 어린애 취급했으니 계속해서 어린애 취급해야 했으니까.
잿빛 노을이 세인트 벨을 덮쳐 오기 전에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사람 목소리가 들리자 이제야 바깥으로 나왔다는 정도가 김예리에게 부여해 주기 좋은 스토리였다.
‘그치? 너도 이게 낫지?’
“…….”
“…….”
“괜찮은 거니?”
작게 고개를 끄덕여 온다.
슬그머니 손을 부여잡아주고
“계속 숨어 있었던 거니? 어른들은… 다들… 다른 사람들은… 혹시….”
나는 너를 위로해 주고 싶다는 스탠스를 취하는 것이 정석이다.
김예리의 별명이 파란의 딸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얘는 정말 파란 길드의 어른들을 부모님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티를 내지는 않고 다니고 사춘기를 맞은 딸마냥 틱틱거리기는 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은근히 잘 챙겨줬자너.’
내 일에 쉽게 흥분하기도 하고… 마치 부모님 이슈를 겪고 있는 10대들마냥 은근히 사랑받는 걸 갈구하고 있었다.
제정신인 상태에서 이런 행동을 보인다면 질색팔색하면서 뒤로 가서 미소 짓겠지만….
‘너 왜 울려고 그래. 미안하게….’
기억을 잃은 꽃기영을 본 김예리는 틱틱댈 수 없었던 것 같았다.
빈민촌에서 처음 파란 길드 하우스로 왔던 때가 떠오르는 것일까. 아니면 갑작스레 감정이 격해진 것일까.
앞에서는 절대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김예리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당연히 23살 꽃기영에게 이런 김예리의 시그널은 자신을 위로해 달라는 시그널로 보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어느새 김예리는 잿빛 노을 사태로 인해 부모님과 친구들을 잃어버린 소녀가 되어 있었고, 꽃기영은 그런 김예리를 위로해 주는 포지션에 앉아있게 됐다.
‘우리 예리 한번 안아줘야겠자너.’
“괜찮단다.”
“으… 으윽….”
“전부 다 괜찮아질 거란다.”
“흐윽….”
“여기서 널 해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안심해도 돼.”
“흐으윽… 흐윽.”
“많이 힘들었구나. 내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안심해도 돼.”
한번 따뜻하게 웃어주구.
“아! 혹시 배가 고프지는 않니? 아니면 필요한 게 뭐가 있는지 말해줄 수 있겠지?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괜찮아.”
“그러지 말고…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
“…….”
얘는 평소에 머리 쓰다듬어 줄려고만 해도 발작을 일으키더니 너무 얌전하자너.
이게 고양이 발톱을 숨긴 김예리의 본성이라는 사실이야 알고 있었지만 막상 눈으로 확인하니 더 놀랍다.
너무 오래 포옹한 것이 아닌가 싶어 슬그머니 밀어내려고 했지만 더욱더 꽉 몸을 껴안아 오는 탓에 몰아내기도 부담스럽다.
계속해서 눈물을 훌쩍이고 있는 모습에 얘가 갑자기 왜 이러니 싶기도 했지만… 김예리의 성장 배경을 보면 부자연스러운 게 아니었다.
부모님처럼 믿고 따르던 사람이 한순간에 기억상실증에 걸려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됐다는데 얘 입장에서 얼마나 그게 서글플까.
운 좋게도 중얼거리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가짜일 리가 없잖아….”
라는 목소리 말이다.
‘그래 그거야.’
온기가 진짜자너. 이건 가짜는 흉내 낼 수 없는 온기자너. 그렇지?
“가짜일 리가 없어….”
“응? 뭐라고 했니?”
“…….”
그제야 나를 살짝 밀어내는 모습, 한 손으로 눈물을 쓱쓱 닦은 뒤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본다.
안절부절못하는 쪽은 오히려 내 쪽, 제정신으로 돌아온 김예리는 아까의 행동이 부끄러웠는지 괜스레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고서는 한 손으로 눈물을 슥슥 닦았다. 이제야 평소의 김예리로 돌아온 것이리라.
아직도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있는 꽃기영에게 김예리가 꺼낸 것은 작은 구슬 조각이었다.
‘이거 뭐야.’
이게 뭔데 얘 손에서 나와.
‘이거 시바 기억의 구슬 조각 아니야?’
스토리상 구슬 조각이 나와야 되는 타이밍이기야 했다. 심지어 기억의 구슬 조각처럼 생기기도 했다지만….
‘아니, 어떻게 생겼는지는 이야기 좀 해주지. 누나.’
뭔가 신비로운 기운이 감도는 듯, 희미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는 조각, 심지어 점점 내게 가까이 가면 갈수록 반짝이는 주기가 더욱더 빨라진다.
나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억의 구슬 조각을 김예리가 갑자기 내민다는 게 황당하다.
사방팔방 엄청난 개수로 흩어져 있는 컨셉이었으니 김예리가 하나 정도는 보유하고 있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이걸 이렇게 난데없고 뜬금없이 내밀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혜 누나가 힌트를 준 건가? 아니면 아예 하나 가져다줬나?’
“이건 뭐니? 선물이니?”
“응.”
‘김현성이 가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건가. 아직 거기까지는 결론이 안 나왔나?’
솔직히 의심할 만한데….
어쩌면 이기영이 기억을 잃은 것과 관련해 김현성이 위화감을 느낀 것일지도 모른다는 스토리로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김예리가 대뜸 기억의 조각을 들이댄 것이리라.
‘시바. 어림도 없지.’
수상한 물건이지만 마치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마냥 아무런 위화감 없이 손을 뻗은 것은 당연지사.
작은 기억의 조각에서 갑작스레 빛이 뿜어져 나와 내 몸을 감싸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이런 종류의 이펙트도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해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워낙 누나가 철두철미한 성격이다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깜짝 놀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한 느낌으로.
“어….”
빛은 내 몸을 휘감고 있었다. 김예리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내게서 일어나는 변화를 감지하려고 하는 것일까.
‘겨우 이 정도로 근데 뭘 기억할 수 있겠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주 약간의 기억의 파편. 뭘 떠올리면 좋을까 잠깐 동안 고민을 해볼 수밖에 없는 시점이었다.
흐름상 김예리와 관련된 작은 추억들을 기억해 주는 게 조금 감동적인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김예리 기분 좋으라고 이런 절호의 기회를 날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예리와 함께 한 작은 추억 대신 떠오른 것은 우리 대륙도 로헨도 아닌 어딘가에서의 기억.
순발력으로 떠올린 작은 기억.
어떤 존재가 김현성의 목을 한 손으로 들어 올린 채로 웃고 있는 기억이었다.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는 우리 현성이는 괴로운 듯이 발버둥 치지만 이내 칠흑에 기운에 둘러싸여 점점 먹혀가고 있다.
어둠의 존재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고 김현성은 점점 정신을 잃어가고 있다.
‘현성이… 괜찮은 거니?’
마침내 완전히 칠흑의 기운에 묶여 십자가처럼 매달리게 된 김현성.
어떤 존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웃음 짓고는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분명 형태가 없었던 얼굴이 점점 형태를 갖춰 나간다. 움직이는 그림자 같았던 몸도, 익숙한 몸으로 변해간다.
소름 돋게도 시바! 녀석은 김현성의 겉모습을 모방하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할 셈이냐….
-굳이 알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네놈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서 지켜보는 것이 전부일 텐데….
-네놈… 혹시 기영 씨를….
‘역시 나를 걱정해 주는구나. 현성이.’
-이 개자식!
-크크큭… 크하하하하하하하!
전형적인 악당의 웃음소리 역시 맴돈다.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통해 김현성의 시야로 본 기억.
이런 상황에서도 23살 꽃기영이 떠올린 기억은 자신의 것이 아닌 절친한 친우 김현성에 대한 것이었다.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김예리는 주먹을 꽉 쥐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김현성이 누군지 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것 하나 만은 확실했다.
“현성 씨를… 구해야 돼.”
“…….”
“현성이가… 위험해.”
멍한 얼굴로 중얼거려보자.
“현성이가… 위험… 누군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