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71화
버림받은 성녀의 군대 (2)
한소라야말로 파란 길드원 중 가장 저평가된 재원 중 하나였다.
사업이나 행정적인 부분뿐만이 아니라 흑마법사라는 직업 특성상 파란에서 전면에 나서서 활동할 수 없었던 것이 문제, 실제로 한소라의 전투능력이 외부로 드러난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마저도 정하얀의 백업으로 출진했던 것이 전부였으니 한소라의 흑마법사로서의 능력이 세상에 드러난 적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빛기영의 이미지 메이킹은 흑마법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한소라가 흑마법사라는 게 밝혀졌다고 해도 대놓고 네크로맨시를 사용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 파란 길드의 이미지에 방해가 되는 모든 능력과 스킬을 봉인당한 셈, 물론 그녀의 경우에는 전투 인원이 아니라 정하얀의 보모 느낌으로 고용된 것이었기 때문에 애초 전면에 나설 일도 없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니….
‘든든하자너.’
전장이라는 특수성이 있기야 했지만 수많은 블러드 골렘들이 몸을 일으키는 것은 장관 아닌 장관이었다. 버림받은 자들을 짓밟고 팔로 밀쳐내며 전진하고 있는 작은 군단의 모습은 환호성을 일으키게 하기에 충분했다.
물론 폼이 올라오지 않은 만큼 퀄리티가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런 난전에서 고기방패들은 머릿수를 채워 놓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되고도 남는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
심지어 계속해서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수십, 수백, 수천. 명백하게 현재의 한소라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기예를 목도한 순간 일이 어떻게 흘러가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한소라가 정하얀을 백업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인 모양, 정하얀이 한소라를 백업해 주고 있는 것이리라.
‘시바.’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단기간에 성장 잘했네.’
로헨에서는 흑마법사로서 활동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목표를 위해서 이미 한번 밟아봤던 전철을 밟는 것이 유리하다 판단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이쪽이 약속했던 것이 그녀가 마음을 바꾸게 된 계기가 됐을지도 모른다.
‘근데 나랑 한 약속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어. 소라야. 만약 내가 짭기영이면… 전부 없었던 일이 되니까.’
대륙으로 돌아간 이후에 한소라가 날개를 펼칠 수 있게 여러모로 도와준다고 약속했던 것 같기는 했지만 만약 내가 진짜가 아니라면 모두 무산될 수밖에 없는 약속이었다.
유피테르 쪽과 계약한 내용도 사기계약일 가능성이 넘쳐나는 판에 그녀와의 약속이 남아 있을 리 만무, 만약 찐기영이 최소한의 이쪽을 지켜보고 있고,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정도 배려해 주겠지만, 아쉽게도 이 새끼는 언제든지 말을 바꿀 수 있는 쓰레기였다.
‘그래도 만약 내가 진짜가 맞으면 있자너… 약속 꼭 지킬게.’
그런 생각을 할 만큼 한소라 한 사람이 전장의 끼치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했다.
물론 아헨델의 플레이어들이 세인트 벨로 지원을 왔다는 사실 자체가 가장 큰 도움이 됐었지만 버림받은 자들과 소규모 전쟁을 벌이고 있는 골렘들의 비주얼은 아군의 사기를 고취시킬 수 있을 만큼 효과적이다.
“아헨델이다! 아헨델이 왔다!”
“길을 열어!!”
“골렘이다!!”
거대한 슬라임처럼 보였던 블러드 골렘들이 점점 형태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한다.
정하얀의 마력을 뽑아 먹으며 함께 형태를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무기까지 쥔 녀석들이 검을 휘두른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검에 맞은 버림받은 자가 튕겨 나갔다.
‘괜찮은데.’
대열 또한 유지하며 진영을 갖추고 있는 것 또한 훌륭하다.
‘이거 완전히 괴수 대격돌이자너.’
선희영이 컨트롤하고 있는 버림받은 자들과 한소라가 컨트롤하고 있는 골렘들이 맞부딪치는 모습은 마치 세기말 신화 속에서나 나오는 전쟁.
둘 모두 공붓벌레인 만큼 파란 길드의 전술 교범을 토대로 움직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한쪽은 힘으로, 한쪽은 물량이라는 특징을 살리고 있다는 것.
한 기 한 기에 많은 투자가 들어가 있는 한소라와는 다르게 선희영의 소환수들은 들어간 것이 적다.
수십 기를 잃더라도 한 기만 제대로 처리해도 된다는 식으로 소모전을 걸어오는 통에 블러드 골렘들의 공세가 소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녀석들은 전보다 조금 더 똘똘 뭉치기 시작한다.
이미지 한 것이 박덕구와 유아영처럼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열을 맞춰 병력을 밀어내고 공간을 후위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다.
수십의 버림받은 자들이 골렘의 공격에 맞고 공중을 날아다니지만 악착같이 달려드는 녀석들 때문에 골렘들도 하나하나 쓰러진다.
퍼어어어어억!
“키에에에에엑!”
콰지직!
-우우우우우!!
“이 블러드 골렘들은 도대체….”
“아헨델에서 원군이 왔어요.”
“마치 우리를 위해 길을 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하… 하하… 이건… 도대체….”
“제 눈을 믿을 수가… 없군요.”
힘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은 당연히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였다.
블러드 골렘들이 일직선으로 나아가라는 듯이 길을 열어주고 있는 타이밍, 달리지 않으면 이상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시 한번 발걸음을 옮긴다.
물론 성벽 측에도 변화는 있었다.
더 이상 성벽에 올라가 있는 게 무의미하다는 판단을 내린 모양인지, 병력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헨델에서 온 플레이어들의 수준이 그리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원군의 숫자는 지친 병력들 대신 방패를 들어주기에는 충분했다.
‘소라 얘는 일부로 타이밍 맞춘 것 같아.’
“로헨을 위하여!!”
“로헨을 위하여어!!”
“싸워라!”
“돌격하라! 돌겨억!”
‘흐름이 변했어.’
아마 그 누구보다도 선희영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장기전으로 가면 갈수록 아군 측에 불리한 싸움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머리가 있는 지휘관이라면 이런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버림받은 자들은 계속해서 쓰러지고 있었고 기세가 오른 병사들은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는 듯이 거칠게 적들을 몰아붙인다.
폭음과 괴성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환호성마저 섞여 온다.
“움직여요!”
“네.”
“움직이라고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빛의 화관을 쓴 채로 손을 뻗자 찬란한 빛무리가 꽃잎처럼 휘날린다.
본능적으로 빛을 뿜어 줘야 하는 타이밍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두운 전장에 퍼지기 시작하는 한 줄기 빛, 전방을 바라보고 있는 아군 병사들에게는 마치 이정표처럼 느껴질 것이다.
이길 수 있다고, 빛은 결국 승리할 수 있을 거라고 모두에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질 거라고 확신할 수 있다.
“빛이여!”
“꽃과 풍요의 여신을 위하여!”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 한계를 맞이한 병사들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롯이 자신들의 앞날을 비추어 주는 빛. 일부 드라마 퀸들은 눈물을 흩뿌리고 있지 않을까.
[벌레 같은 놈들! 몇 번을 밟아도 시원치 않을 벌레 같은 놈들이! 감히!]
‘희영아. 너무… 너무 악당 대사 같자너.’
[그래. 그렇게 발버둥 치거라. 그 같잖은 희망을 짓밟아 주마!]
‘너무… 너무 찐텐이야.’
어느덧 선희영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왔다는 것을 금방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얘가 왜 이렇게….’
일그러진 얼굴이 시야에 비쳐온다. 누가 봐도 분노로 얼룩져 있었고, 약간의 망설임이 감춰져 있었다.
나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녀도 나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에게는 명백히 적의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복잡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은 것은 아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어딘가 익숙했다고 느껴서일지도 모른다.
동료들과 함께 투쟁하며 로헨을 위해 싸우고 있는 성자의 모습, 피와 땀에 젖어 땅바닥을 구르며 정의와 빛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모습은 언제나 봐왔던 빛기영의 모습이 아니었던가.
그녀는 꽃기영에게서 빛기영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더 찾아줘.’
얼굴에 괜스레 흙먼지 같은 거 조금 더 묻혀주고, 눈에서는 눈물을 떨어뜨린다.
허억허억거리면서 숨이 차오른다는 듯이 거칠게 호흡해 주고, 계속해서 빛을 뿌려대며 소리친다.
“모두들 힘을 내세요!”
“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함께 구르던 시절 기억나지?
악의와 어둠에 맞서 싸우던 시절이 분명히 파란 길드에서도 있었다.
가진 것 하나 없이 오롯이 빛에 대한 믿음으로만 함께 나아가던 시절이 분명히 존재했다.
당연하지만 그 시절 이기영과 지금의 이기영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자신보다 타인을 우선시했고,
“에밀리아 님. 괜찮으신가요?”
언제나 빛의 편에 서 싸운다.
“빛이여….”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으윽… 저는 괜찮아요.”
희망을 절대 놓지 않았다.
“이야아아아아아!”
김현성이 내가 진짜가 아니라 못을 박기는 했지만 23살의 꽃기영은 여전히 꿋꿋하고, 용감하며, 가슴속에 빛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넌… 뭐야… 도대체.]
“하윽… 하아….”
[너는 도대체 뭐야!]
‘누구긴 누구야. 이기영이지.’
기억을 잃어버린 이기영.
[그분을 흉내내지 마. 이….]
흉내 내는 게 아니야. 이게 꽃기영의 본성이야.
멘탈이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지배력이 현저하게 약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꽃과 풍요가 점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그녀는 내게 더욱더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처럼 선희영은 근접 전투에 대한 패턴이나 기믹은 부여받지 못한 모양, 대신 검은 신성력의 늪에서는 다시금 버림받은 자들이 기어 나온다.
이전에 나왔던 것보다 더욱더 강하고 퀄리티 있는 개체들이었지만 술사 본인의 정신이 미국에 가 있으니 제대로 된 효율이 나올 리 만무했다.
금세 블러드 골렘과 꽃과 풍요에게 공략당하는 네임드 개체들.
선희영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야 안 봐도 뻔했다.
어째서 한소라와 정하얀이 이쪽을 돕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한 것이 많겠지.
확신하지는 못하고 있겠지만 블러드 골렘과 작은 태양이 로헨산이 아니라는 것 정도야 눈치챘을 테니까.
전술 교본대로 싸우던 것도 있고 말이야.
‘김현성이야 이상한 점을 알아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선희영은 아니다.
도박이었지만 적어도 의구심은 심어줄 수 있었다. 눈앞에 이기영이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말이다.
그리고 그 의구심은 다른 의구심과도 연결된다.
만약 이기영이 진짜라면….
반대로 자신들을 이곳으로 끌고 온 김현성이 진짜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그녀의 머릿속이 금방 복잡해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제가… 혹시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시바 아무튼 김현성이 가짜야.
개연성이고 나발이고 일단 김현성이 가짜야.
내가 찐기영인지 짭기영인지는 모르겠고 내가 찐이든 짭이든 정치는 현성이보다 잘하니까. 아무튼 김현성이 가짜야.
“…….”
“당신은….”
선희영을 눈앞에 목도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떨어지는 눈물. 필사적으로 즙을 짜내는 것이 합당한 시점이었다. 당연히 명대사도 놓칠 수 없다.
“어라… 어째서… 나… 눈물이….”
희미한 기억 속에 있었던 그녀와의 추억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이 진실된 눈물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을까. 설정상 기억을 잃은 23살 꽃기영의 영혼은 선희영이라는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혹시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아무튼 간에 가짜는 김현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