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68화
붉은 꽃 (2)
‘됐어.’
이 정도면 상상 이상이야. 해낼 줄 알고 있었어. 믿고 있었어. 근본아.
마치 거울이 깨지는 것처럼, 잿빛 노을로 물든 세상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지기 시작했다.
만들어진 세상이 붕괴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미쟝센들이 조금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예산 문제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프로의 눈에는 미비하게 보일지도 몰라도 윌리엄의 눈에는 또 그게 아니겠지.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무너지는 세상을 바라보는 녀석이 시야에 비쳐왔다.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인 듯한 얼굴, 성취감이 가장 많이 들어가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겨우 성취감 한 단어로 정의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았다.
녀석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꿈속의 세계라고 하지만 여기는 또 하나의 세계나 다름없었으니까. 무려 501회 차, 초반에 의미 없이 날려버린 트라이를 생각해 보면 그 이상의 시간을 보낸 것이었다.
처음 느꼈던 두려움부터, 마지막 순간에 느꼈던 환희까지. 울고, 웃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기뻐하고….
윌리엄은 이곳에서 추락했고 이곳에서 성장했다. 이곳에서 자신을 버렸고, 이곳에서 자신을 얻었다.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쳤던 장소를 떠나보내는 것은 지금의 녀석에게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끝났네요.”
“아니요. 정확히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네. 그 말씀이 맞네요.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하는 게 더 옳은 표현이겠네요.”
“네. 현실에서도 이곳에서도 아직 싸워야 할 적들이 많으니 말입니다.”
윌리엄이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비현실적으로 깨지며 붕괴하는 세계의 저편에 거대한 검은색 그림자가 시야에 비친다.
천천히 손을 뻗으려고 하는 모습.
설정상 저것의 정체가 바로… 꽃과 풍요의 성자 안에 잠들어 있는 어떤 존재였다.
이 모든 비극과 세기말 감성의 시작.
다행히 어떤 존재는 붕괴하고 있는 세계에서 영향력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이 이벤트는 윌리엄이 악마를 물리침으로써 녀석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씬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존재의 첫 번째 음모가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단순히 바라보고만 있어도 어마어마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는 그것이 다시금 꿈의 가장자리로 이동하고 있었지만 그의 존재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거대한 광기와 악의, 공포를 그대로 형상화해 놓은 것 같은 고대의 군주의 잔상이 계속해서 눈에 아른거린다.
“저게… 이기영 님의 안에 있는 봉인된 ‘어떤 것’이군요.”
“네.”
“이길 수 없겠군요.”
“…….”
“지금은 말입니다.”
‘자신감 올라온 거 봐.’
“아마 저것은 이기영 님을 끊임없이 시험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꿈을 만든 것처럼, 다시 한번 이기영 님께 다가올 겁니다. 마음의 구멍을 파고들어… 끊임없이 이기영 님을 갉아 먹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때도…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 물론 예전이라면 확신이 없었겠지만… 조금 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사실 가장 고생하신 윌리엄 님 앞에서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부끄럽지만요….”
“아니요. 이기영 님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싸우셨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이기영 님이 없었다면 무너지는 것은 이 꿈속의 세계가 아닌 저였을 겁니다.”
“네? 제가요? 하지만 저는….”
“아마 어째서인지 설명해 드려도 이해하지 못하실 겁니다. 설명할 만한 말주변도 없어서 말입니다. 다만. 저 역시 이기영 님 덕분에 이겨낼 수 있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그래. 네 마음 다 알아.
하지만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이 궁금증 어린 표정을 보낸다.
싸운 것도 윌리엄이고 이겨낸 것도 윌리엄인데, 어째서 시바 내 덕분이라는 걸까. 하는 얼굴로 말이다. 꽃기영은 이런 거 잘 모르거든.
그 모습을 본 윌리엄은 조용히 웃었다.
“빛은… 자신만 밝히지 않습니다.”
선문답 같은 개소리를 지껄인 이후에 말이다.
‘그러니까 시바 내가 빛나서 너도 같이 빛날 수 있었다는 거잖아.’
그냥 말하면 되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내 어째서 녀석이 말을 흐렸는지 알 것 같다.
둔감한 23살 꽃기영은 자신이 저 문장의 빛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에만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이즈음 마무리하는 게 오히려 이롭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좋네.’
많은 말을 주고받는 것도 좋지만 이런 담백한 마무리도 나쁘지 않다.
충분히 후속 빌런 떡밥도 뿌렸고, 거대한 적을 앞두고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는 엔딩까지 완벽한 것만 같다.
앞으로 더 많은 싸움이 남아 있고 끊임없이 발전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이다.
물론 저것과 싸우기 전에 이쪽이 어떤 식으로든 로헨을 벗어나겠지만 이 전쟁 동안은 마음을 다잡아 주면 좋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그리고… 좋은 아침입니다.”
“네. 좋은 아침이네요.”
그리고 나는 조용히 눈을 떠 아침을 맞았다.
“…….”
“…….”
“…….”
‘너무 피곤하자너.’
제대로 잔 것 같지가 않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성벽 위에 서 조용히 적들을 지켜보는 윌리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망가진 꿈속의 세계가 아닌, 아직 지킬 것들이 남아 있는 세계. 그 가운데 있는 녀석은 조용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일어났었나 보네.’
조금이지만 분위기가 바뀐 것 같은 녀석의 얼굴이 눈에 띈다. 아니, 분위기가 바뀌었다기보다는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물론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500번이 넘는 죽음을 경험했는데 달라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상황, 녀석은 말수가 조금 줄었고 눈빛이 약간 변했다.
당연하지만 그 변화를 인지하고 있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조금 어색한 것 같지?’
함께 자리한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 역시 뭐라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는 위화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함께한 시간은 이쪽보다 길었으니 아마 윌리엄이 변했다는 걸 더 실감하고 있지 않을까.
만들어진 것은 아주 약간의 거리감.
윌리엄에게서 풍겨 오는 기운도 기운이지만 아우라 자체가 변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윌리엄 님, 혹시….”
“네. 말씀하셔도 됩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같은 대화도 들려온다.
‘윌근본 얘는 근데 지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잘 모를 거야.’
잠깐 시선을 거둔 이후에는 평소의 루틴대로 움직인다. 씻고, 옷을 고르고, 바깥으로 몸을 움직인다. 이윽고 평소보다 더 조용한 세인트 벨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작됐네.’
마치 폭풍이 치기 직전의 고요함.
평소와 다른 듯 같은 듯,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 같은 것이 있다. 이미 사전에 공지가 되어 있었지만 실감하지는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퇴로가 없는 전쟁.
준비하는 방식은 제각각이었다.
마지막으로 무구를 점검하는 이들도 있었고, 유서를 쓰는 이들도 있었다.
친구들끼리 잠깐 모여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무 생각 없이 웃고 떠들거나. 전쟁이 끝난 이후에 대해서 이야기하거나. 기도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있는 이들을 지휘관들도 딱히 제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각자 마지막을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에 대해 존중하고, 군기를 강요하기보다는 배려하고 있는 거로 보였다.
세인트 벨을 탈환할 때와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희망이 팽배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의 전쟁은 진짜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병사들이 많아졌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일주일 전 선희영의 버림받은 자들을 본 모두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어쩌면 정말로 세인트 벨이 인류의 마지막 전쟁터가 될지도 모른다고.
일반 병사들뿐만이 아니라. 패밀리아의 수장이나 지휘본부 역시 전력 차에 대해 인지하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가져왔죠? 기적.’
양반은 아니었는지 곧바로 모습을 드러내는 윌리엄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근본아. 네가 기적이야.’
“이기영 님.”
“아! 윌리엄 님. 좀 어떤가요?”
“네. 말씀드린 사안은 전부 마무리했습니다. 병사들의 사기가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아헨델에서도 연락을 받았으니 좋은 소식을 기대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후우. 다행이네요.”
“이제 곧이로군요.”
“네. 참 짧은 시간이었던 것 같은데.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렇지 않나요?”
“네. 세인트 벨을 막 탈환했을 때가 벌써 일주일 전이라니. 솔직히 조금 당황스럽습니다.”
“그렇죠.”
“…….”
“…….”
“이길 수 있을까요?”
“네. 이겨야 합니다.”
적들이 점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저 멀리서 보이던 검은색의 언데드들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마지막에 봤을 때보다 숫자가 늘어난 것같이 느낀다면 기분 탓일까. 심지어 종류들도 많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끊임없이 흑색의 늪에서 꾸역꾸역 몸을 일으키는 녀석들의 모습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니. 이길 겁니다.”
처음에 봤던 것처럼 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숫자.
[호의를 배신한 대가는 죽음입니다.]
커다란 비명 소리와 함께 선의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호의를 배신한 대가는 죽음. 죽음입니다.]
“…….”
대기가 울린다.
슬그머니 윌리엄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성장 잘했어. 결코 나쁘지 않아. 필살기도 하나 가져갔고. 무엇보다 능숙해졌어.’
이건 충분히 할 만한 싸움이야.
그리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윌리엄은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을 들어라! 로헨의 아들딸들아!”
패기 넘치는 목소리.
[네놈들의 무지함과 추악함을 원망하며 죽어라. 로헨의 벌레들아.]
‘희영아?’
[곱게 죽이지 않겠다. 네놈들 스스로가 저지른 죄를 입 밖으로 내뱉을 때까지 영겁의 고통을 선사하겠다.]
‘조금 워딩이 쎄….’
[호의를 배신한 대가는 죽음이다.]
동시에 검은색의 신성력 안에서 거대한 크기의 본 드래곤이 몸을 일으켰다.
“크우워어어어어어어어아아아아아아아아아!!”
지면이 떨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모든 것 흔들린다.
“전투 준비!”
“전투 준비하라!”
“전투 준비해!”
전령들이 성벽을 뛰어다니며 깃발을 흔든다. 무의식적으로 전투준비라는 말을 복명복창하던 이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본다.
육중한 날갯짓을 하고 있던 본 드래곤의 입가로 검은색 기운이 뭉치기 시작한다.
세인트 벨의 성벽을 부숴 버릴 것 같은 기운이 막 쏘아지려던 그때.
8개의 붉은 꽃이 하늘을 수 놓았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뭐야… 이건… 뭐야아아아아….”
뭐긴 뭐야.
‘영웅 등판한 거지.’
아직 육체와 싱크가 맞지 않는지. 조금 어색하기는 했지만.
땅바닥에 사뿐히 착지한 윌리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