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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66화 (1,165/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66화

내실 (5)

‘어째서… 어째서 웃을 수 있는 걸까.’

“다행히… 다행히 윌리엄 님에게까지는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된 것 같아요. 괜히 저 때문에 끔찍한 일을 겪으시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어째서 이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행동할 수 있는 걸까?’

“정말로… 다행이에요. 어쩌면 윌리엄 님 덕분에… 악마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일 수도 있겠군요.”

어마어마한 자괴감과 죄책감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마음이 벌레들에게 갉아 먹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멍하니 의자에 자리를 잡는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했지만 피곤함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그 지옥 같은 곳을 빠져나올 수 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오랜만에 휴식을 취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물론 마음은 편하지 않았다. 안도하고 안심하고 있는 생각만큼이나 가슴 한구석은 썩어 문드러지는 것만 같았으니까.

‘나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을까.’

정말로 다행이라며 자신을 위로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을까.

아니,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진대, 어떤 표정이었는지 기억을 하는 게 더 이상한 상황이겠지.

어떻게 그 자리를 빠져나왔는지조차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잠깐 동안 기억을 잃었던 것처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자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술병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반 정도가 비어 있었지만 전혀 위로가 된 것 같지가 않았다.

예전에는 그토록 좋아했던 것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은 위로가 될 거라는 생각이 무색하게도… 술맛이 너무나도 써 견딜 수가 없을 정도였다.

괜스레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강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의지가 강한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내 의지는 고작 이 정도였구나.

죽음의 공포 앞에서는 염치도 자존심도 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구나.

두렵고 무서웠다. 이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불구하고 그를 외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두려움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 영원히 끝나지 않는 악몽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괴로웠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는 어째서… 그렇게 웃을 수 있었던 걸까.’

두렵지도 않았던 것일까?

타인의 죽음에 그렇게 무너져 내렸던 그가 어째서 자신의 죽음에는 무감각할 수가 있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문.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처음에는 자신도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으니까.

그깟 악몽 따위에 무릎 꿇을 수는 없다 마음을 다잡았었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고작 이틀 만에 다잡은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심지어는 이기영을 원망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함께 싸우겠다는 다짐은 고통스러운 죽음 속에서 풍화됐고, 그에 대한 동정심은 원망으로 바뀌어갔다.

만약 이런 상황이 계속됐다면 자신을 정말 그를 원망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제길….”

괜스레 창밖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한 사람에게 고정시킨다.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매일같이 보던 모습이었다.

병사들을 응원하고, 상처 입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

“꽃과 풍요의 여신님께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실 거예요.”

쓰러지고 두려워하는 이들을 함께 이끌기 위해 그들을 독려하는 모습.

“어려운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 희망을 잃지 않으셨으면 해요.”

“네.”

“인류는 아직 패배한 것이 아니에요. 우리의 믿음과 힘을 하나로 모은다면 우리들은 충분히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보면 상투적인 대사 같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다르다.

그는 진실했으니까.

이기영이라는 인간을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가장 들어맞는 단어였다.

진실함.

그는 모든 것이 진실한 사람이었다. 자신뿐만이 아니라 저기 저 병사들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꾸밀 줄 모르는 종류의 인간이었고, 거짓이라는 단어와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아가는 인간이었다.

이기영이라는 인간에게는 리얼함이 있었다.

순수함, 어리숙함을 숨기지 않았고, 자신이 상처받았다는 것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숨기지 않는다.

대신, 그는 진실로 믿고 있었다.

“꽃과 풍요의 여신님께서는 결코 우리들을 저버리지 않으실 거예요.”

꽃과 풍요의 여신을 비롯한 신들이 인류를 저버리지 않았음을.

“어째서 두렵지 않겠어요? 저 역시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것들이 두려워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저는 이 싸움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

“분명히 이길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승리할 수 있음을.

“제가 만약 죽더라도. 그것은 분명히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닐 거예요.”

자신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울고 있었다. 희미하게 창에 비친 눈에서 계속해서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연거푸 술을 들이켰고.

다시 한번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의 앞에서 입을 여는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맨정신에 용기가 나지 않아 술기운을 빌리는 모습이 어떻게 비칠지 알고 있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신가요?”

“이기영 님.”

“네?”

“이기영 님께서는 두렵지 않으신 겁니까?”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윌리엄 님. 괜찮으신 건가요?”

“악몽이… 무섭지 않으신 겁니까?”

“…….”

“어째서… 어째서 이기영 님께서는 웃을 수 있으신 겁니까.”

“…….”

“그 모든 고통을 겪고 나서도 어째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으신 겁니까. 괴롭지 않으신 겁니까? 이… 지금 이런 상황이… 바깥에는 금방이라도 세인트 벨에 들어올 적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이… 불안하지 않으신 겁니까?”

“네?”

“어째서… 어째서 저를 원망하지 않으실 수 있으신 겁니까. 도망친 저를… 어째서….”

“무슨…말씀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제가 거짓말을 했다는 거… 그 악몽 속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거짓말을 했다는 거… 이기영 님이 모를 리가 없잖습니까.”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도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어째서 제 말을 믿으신 겁니까. 어째서 의심도 하지 않고… 그렇게 저를 위로해 주실 수 있으신 겁니까. 저는 약한 사람이라 알 수가 없습니다. 단단해지고 싶어도… 단단해질 수가 없습니다. 잘난 듯이 의지해 달라고 말했지만… 저는… 저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악몽을… 말입니다. 이기영 님은 어떻게… 어떻게… 오늘도 수백 번이 넘게 죽는다는 걸 알면서도 웃을 수 있으신 겁니까.”

자신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아무리 술에 취하기는 했지만 마치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것 같지 않은가.

스스로 잘못됐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말을 멈출 수가 없다.

눈앞에 있는 인형 역시, 당황스러운지 한참이나 침묵하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쳐왔다.

그가 입을 연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직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한 참이나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마치 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글… 글쎄요.”

“…….”

스스로도 고민을 해보지 않은 것이 분명, 물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멍청한 질문을 한 셈이었다.

그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 고민해 볼 필요가 없었겠지. 쥐어짜 낸 대답이 새어 나온 것은 바로 그때, 술 취한 자신이 듣기에도 조금은 당황스러운 대답이었다.

“…….”

“굳이 말씀드리자면 믿음 때문인 것 같아요.”

“네?”

“진실한 믿음이요.”

“…….”

“제가, 그리고 인류가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때문이에요. 물론 쉽지는 않아요. 분명히 괴로울 때도 많고 스스로 의구심을 가질 때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믿어요. 현실에서는 힘든 일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언젠가는 빛이 승리 할 거라는 철없는 동화 속의 이야기를… 믿어요.”

그래.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어서 던진 질문일지도 모르지.

“…….”

“모두가 행복했답니다, 하는 이야기의 끝이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분명히 믿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 않습니까… 그건….”

“저는 윌리엄 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고통에도 시련에도 항상 담담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에요. 남들과 같이 괴로움을 느끼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아픔에 슬퍼하는 똑같은 인간이에요.”

“…….”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믿고 싶은지도 몰라요.”

“…….”

“그렇게 믿다 보면 사라지거든요. 내일에 대한 불안감이, 악몽에 대한 공포가, 내가 옳은 길을 가고 있는 건지에 대한 의구심도. 모두 다 사라져 버리거든요.”

그 말 그대로, 그의 눈에는 확신이 들어서 있는 것만 같았다.

정말로 동화 속의 이야기 같은 것이 실제로 벌어질 거라고 믿는 철없는 모습보다는…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느껴졌다.

빛이 꺼지지 않을 거라는 믿음, 꺼지게 하지 않게 할 것이라는 믿음.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믿음이 느껴진다.

뭐라고 정확하게 설명하기 힘들지만, 그는 자신의 믿음이 꺼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어떤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본인은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미리 예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할 수 있는 거야….’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하는지는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가 어째서 이 악몽 속에서도 웃을 수 있는지 그 단편을 엿본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이기영 님처럼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

“저도 믿고 싶습니다.”

“네. 분명… 가능할 거예요.”

“언젠가는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모두가 행복했답니다. 같은 이야기가 찾아올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네.”

“제가 이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 아니, 믿을 겁니다.”

스스로를 믿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내가 가진 것들을 믿는 것은 항상 중요하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었지만… 자기 자신을 믿지 못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저도 조금 안심이 되네요.”

“죄송합니다. 이기영 님.”

“아니요. 사과하실 일이 아니에요. 오히려 이렇게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다행이라 생각하는지 몰라요. 사실은 조금 무서웠거든요.”

“…….”

“오늘도 그 장소에서 혼자 시간을 보낼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

“말씀드리기 조금 죄송스럽기는 하지만 같이 고통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니… 든든하네요.”

“하하….”

“물론 그전에 술부터 깨셔야 할 것 같지만….”

“네.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자.’

눈앞으로 한 걸음 다가온 악몽의 세계가 시야에 비쳤다.

“이기영 님. 이쪽으로.”

“네.”

믿자. 나를 믿자. 만약 나를 믿을 수 없다면 그를 믿자.

‘이 이야기의 끝이 모두가 행복했답니다’로 마무리될 것이라 믿자.

* * *

-오빠… 근데 윌근본한테 시한부 설정은 언제 풀 거예요?

“나중에. 그리고 그런 건 막 억지스럽게 풀고 그러는 거 아니야. 자연스럽게 푸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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