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65화
내실 (4)
“이기영 님! 이쪽으로!”
“네.”
루프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도망치는 것을 선택한 오십삼 번째 트라이.
“으아아아아아아아악!”
결과는 유 다이 엔딩.
그래도 꽤 버티기야 했다. 목적지도 마음에 들고… 곧바로 꽃과 풍요의 신전으로 달려간 것을 보면 나름대로 이 지옥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아예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시작하자마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은 건 아니었으니까.
“윌리엄 님!”
“이기영 님… 으으윽….”
오십오 번째 트라이, 사인은 과다출혈. 죽어가며 끌려가는 이기영을 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육십칠 번째 트라이는 답답했는지 곧바로 검을 들고 악마에게 달려 들어갔다.
그렇지만 유효타를 먹일 수 있을 리 만무, 첫 번째 죽음처럼 반으로 갈라지며 처절한 엔딩을 맞았다.
팔십구 회차는 조금 이성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녀석이 더 잘 느끼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백 번 채우기 전까지는 그냥 워밍업 같은 느낌으로 지켜보자고 결심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진도가 늦다.
‘그래도 오백 번 안에는 끊어줬으면 좋겠는데.’
약 백삼십 번 정도의 죽음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성장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오히려…
‘이거 잘못한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윌 근본은 점점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으… 으….”
현실 시간으로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이었다. 물론 꿈속에서는 많은 일이 있기야 했었지만 겨우 이틀 만에 완전히 무너져 버린 것 같았으니 내 심정이 오죽할까.
이번 무한 회귀 이벤트가 윌근본의 정신과 육체의 한계를 뚫어줄 거라고 기대했건만 한계돌파는 개뿔 이미 정신병을 앓게 된 것처럼 보였다.
일단.
‘검을 손에서 안 놓자너.’
평소에도 기본무장을 하고 다니는 녀석이기는 했지만 그 정도가 더욱더 심해졌다.
마치 자신의 무장에 의지라도 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심지어 언제라도 검을 뽑을 수 있게 계속해서 손을 손잡이에서 놓지 않은 모습, 식사를 할 때도 언제나 왼쪽 손은 자신의 검을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회의할 때도, 심지어 휴식을 취할 때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두 번째는 갑작스레 어지럼증을 느끼거나 약간의 호흡곤란, 구토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밥은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두운 공간에 들어가는 것을 병적으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 번째는 증상은 여가 시간의 대부분을 꽃과 풍요의 신전 안에서 보낸다는 것.
원래부터 신앙심이 깊은 녀석이었지만 집요하리만큼 많은 시간 동안 꽃과 풍요의 여신에게 기도를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외에도 많은 정황과 증상들이 눈에 띄기는 했었지만 이쪽이 정신과 의사가 아니니 제대로 진단할 수 있을 리 만무, 가장 큰 문제는 본인 스스로가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 이 새끼. 이거 각성이고 나발이고 백치 휠체어 엔딩은 아니겠지?’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삼십 번도 안 돼서 무너져 내렸을 것이다.
강철 같은 윌근본의 정신력, 절대로 무릎 꿇지 않는다는 신념을 믿었기 때문에 강행했던 작전이 아니었던가.
‘이게 다 형이 너를 아껴서 그런 건데….’
불안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겨우 이 정도에서 무너진다면 애초에 로헨에 희망은 없었던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판단이 선다.
“윌리엄 님.”
하며 녀석을 뒤에서 부르며 옷깃을 잡자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순간적으로 검에 손을 올린 모습을 보면 조만간 사고를 쳐도 단단히 칠 것 같은 느낌. 뒤를 돌아본 이후에야 자신을 잡은 것이 나라는 것을 인지하고 숨을 고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네.”
“괜찮으신가요?”
“네. 저는… 괜찮습니다.”
‘안 괜찮아 보이는데? 이래 가지고 회의나 제대로 하겠어?’
꿈속에서의 문제도 문제지만, 현재 세인트 벨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 역시 심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노을빛의 군주가 일주일의 유예기간을 주기는 했지만 이미 로헨의 인류는 두려움과 맞서기로 결심을 한 상황, 선희영 역시 인류가 대항할 것이라는 걸 눈치챈 것인지 조심스럽게 언데드 군단들로 세인트 벨을 포위하고 있었다.
보급과 지원군 문제, 전력 차이가 나는 수성전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 또한 정신적인 부담감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이곳에서의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근데 오늘은 좀 소홀하네.’
“수성전 준비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요?”
“성벽은 시간 내에 맞춰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휘관님.”
“다행이네요.”
“다만 마법사들이 정신적인 피로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본 전투에 들어가기에 앞서 충분한 휴식을….”
“네. 그렇게 해주세요. 에밀리아 님.”
“예.”
“혹시 아헨델에서는 연락이 없나요?”
“아쉽지만….”
“그렇군요. 그렇다면 오늘도… 일단 세인트 벨을 한 바퀴 둘러봐야겠어요.”
물론 대부분의 준비는 완료가 된 상황이기도 했다.
작전명 여명에는 이 수성전 또한 포함되어 있는지라 상대적으로 브리핑할 시간이 덜 필요했고, 몇몇 특수 병과들을 제외한 병력들은 구태여 이쪽이 손을 쓰지 않아도 본인들의 임무를 숙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요 며칠간 병사들에게 주어진 주요 임무는 성벽을 쌓고 유지, 보수하는 것이 대부분.
물론 나를 비롯한 지휘본부는 해야 할 일이 따로 있었다.
‘뭐긴 뭐겠어. 병사들 독려하는 일이지.’
선거에 나가는 후보자처럼 작전 지역들 한번 순찰해 주면서 병사들 사기 관리해 주고, 희망을 잃지 말라고 손 한번 꽉 잡아주고.
같은 과정을 겪으며 쓸데없는 소문이나 논란을 잠식시키는 일이었다.
노을빛의 군주의 이간계가 어느 정도 통했다는 것은 이미 8시간 범죄자들이 증명하지 않았던가.
혼자만의 힘으로는 이 논란은 종식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다.
지휘본부에서는 악마들은 협상하지 않는다는 것과 꽃과 풍요의 성자가 인류의 희망이라는 선전을 계속해서 진행했고 당연히 소정의 성과도 거둘 수 있었다.
‘이 새끼들 눈 봐. 구세주라도 보는 것 같자너.’
물론 이쪽만의 힘이 아니기는 했다.
‘안 죽이길 잘했지.’
쓸데없는 납치극을 벌이다 조혜진에게 골로 갈 뻔한 멍청한 놈들이 악마들이 자신들과 협상하지 않을 거라는 여론을 은연중에 퍼뜨리고 있었던 것은 당연지사.
녀석들의 목적이 로헨을 지키는 것이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이런 종류의 선동에 필사적인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물론 죄책감이나 면죄부를 받고 싶다는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로헨을 위하는 마음이 더 크겠지.
‘그래봤자 님들은 뒈질 거예요.’
한 번 내 눈 밖에 났거든요.
아무튼 간에 이렇게 내부적으로 어수선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고 지휘본부도 이런 분위기를 잡기 위한 회의를 계속해서 진행해 나가고 있는 시점이었다.
그 어떤 때보다도 유명 패밀리아의 마스터나 네임드 플레이어 한 명, 한 명의 행동이 중요한 상황에서….
‘이 새끼 눈깔 썩은 거 봐. 무슨 동태눈깔을 하고 돌아다녀?’
윌리엄 이새끼는 병사들에게 불신을 심어주고도 남을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오늘따라 더 심한 것 같아.’
“성벽이 좀 어떻습니까? 이기영 님.”
“이 정도면 완벽한 것 같아요. 에밀리아 님. 병사들이 얼마나 고생했을지… 눈에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 같아서는 한 분 한 분, 전부 손을 잡아드리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어 아쉬울 뿐이랍니다.”
“…….”
“여러분들이 쌓아 올리신 이 성벽은 미래에 로헨을 지킨 성벽으로 이름을 남길 거예요.”
“…….”
“불안하신 마음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더욱더 희망을 가져야 하는 법이랍니다. 모두들…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이 싸움에 함께 해주셔서, 로헨을 지키는 싸움에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너무나도 감사드려요.”
군기 딱 들어가 있는 병사들 손 한 번씩 잡아주고 말이야.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열성 지지자들에게 안기는 모습을 연출할 수는 없었지만 부관들을 우르르 몰고 다니며 각 지역을 순방하는 것 자체가 사기에 도움이 된다.
“로헨은 반드시 승리할 겁니다. 여러분과 저, 인류는 반드시 이번 위기를 헤쳐나갈 거라고 저는 굳게 믿고 있어요. 윌리엄 님도 한 말씀 해주세요.”
“…….”
‘너 그냥 동태눈깔 할 거면 걍 오지 말지 그랬어. 그런 눈깔 하고 있으면 쟤들이 퍽이나 희망찬 로헨을 꿈꾸겠다, 야.’
백치처럼 멍하니 이상한 곳을 바라보고 있던 녀석은 내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어눌하게 말을 이었다.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네… 네….”
‘그게 끝이야?’
모두가 윌리엄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에밀리아를 비롯한 꽃과 풍요의 일원들은 이쪽에게 윌리엄의 상태에 대해 묻기도 했었고….
사실 지휘본부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일반 병사들인 만큼 차라리….
“윌리엄 님. 조금… 쉬시는 게 좋겠어요.”
“…….”
“윌리엄 님?”
“네? 뭐…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기영 님.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휴식을 취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씀드렸었어요. 아무래도… 아무래도 윌리엄 님이 조금 지치신 것 같아서.”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오늘 밤에는….”
“네. 말씀해 주신 루트로 움직이는 게 좋겠죠. 어제 그나마 성과를 냈던 게 분명….”
“예. 꽃과 풍요의 신전으로 도망쳤을 때였으니 말입니다. 이, 이럴 게 아니라… 네. 이기영 님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따로… 밤의 준비를 하는 게… 여신님께 기도를 드린 이후에… 예…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멍하니 몸을 옮기는 모습, 밤의 준비를 한다기보다는 잠깐이라도 현실도피를 하러 간다고 생각하는 게 이상한 상황일까?
혹시나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는 했지만… 그렇지는 않은 모양.
이건 조금 예상외였지만….
“이 새끼 봐….”
-오빠. 얘 잠 안 자려고 하는 것 같은데요?
“이걸 꽃기영을 그냥 내버려 두네.”
-저는 그럴 거라고 예상했어요. 하루 정도는 쉬고 싶기도 하겠죠. 본인이 망가진다는 걸 느끼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일이 겹쳐있으니까요. 무리해서 재우려고 하면 재울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이거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그냥 놔둬. 얘 성격이면 아마 이게 더 효과적일 수도 있어.”
-뭐… 그럴 수도 있겠네요.
윌근본 이 새끼가 안 자고 버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다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지만 극도의 공포에 질려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이리라.
‘수성전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컨디션 조절도 하고 싶었겠지. 무엇보다 자는 게 무서웠을 거야.’
한번 잠들면 꼴도 보기 싫은 악마에게 수백 번이 넘는 고통을 느끼며 죽어야 했으니 담담한 것이 더욱더 비정상이다. 녀석에게는 이 꿈이 지옥보다 더 지옥처럼 느껴질 테니 말이다.
‘근데 그거 알아? 너 같은 성격이면 현실이 더 지옥일 수도 있어.’
* * *
아니나 다를까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나를 반기는 윌리엄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기영 님… 어제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윌리엄 님.”
“네?”
“다행히… 다행히 윌리엄 님에게까지는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된 것 같아요. 괜히 저 때문에 끔찍한 일을 겪으시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
“정말로… 다행이에요. 어쩌면 윌리엄 님 덕분에… 악마의 영향력이… 줄어든 것일 수도 있겠군요.”
진심으로 윌리엄을 걱정하는 것 같은 표정. 꿋꿋하고 순수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녀석의 팔이 덜덜덜 떨리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
윌근본의 얼굴은 자기혐오로 일그러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