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 사용설명서-1162화 (1,16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62화

내실 (1)

왠지 모르게 사랑의 도피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느낌.

내가 만약 찐기영이 아니라 짭기영이라면, 이대로 짭혜진과 사랑의 도피를 할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괜한 상상을 할 수밖에 없게 된다.

‘나 은근히… 상냥하게 대해주는 사람한테 약한가 봐.’

나 자신조차도 인지하고 있는 전형적인 현실도피였다. 꽃기영이 만약 꼭두각시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현 상황을 바꾸거나 변화시킬 수 없다면….

‘얘 데리고 도망 다니는 것도 괜찮지 않나.’

끈질기게 도망 다니거나 적당한 거래가 있다면 이쪽을 그냥 내버려 둘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오순도순 작은 행복을 누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아들 하나 딸 둘, 오두막 하나 지어놓고 혜지니가 사냥도 하고 요리도 하고, 집도 보수하고, 나는 혜지니 힘내라구 응원해 주고.

저 버전이 말을 못 하는 것처럼 만들어진 것 같아서 조금 걸리기는 하는데… 아무렴 어때. 의사소통 방법이야 많은데.

물론 어처구니없는 생각이라는 건 그 누구보다도 이쪽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이기영과 이지혜가 자기 통제에서 벗어난 요소를 내버려 둘 리가 없었으니까.

애초 이쪽 역시 그런 상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기영의 사고방식이 그대로 묻어 있는 머리통으로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의 생각은 아니었다.

‘전부 다 버리고 오순도순 행복하라고?’

내가 진짜든 가짜든 이기영은 양보하지 않는다. 자꾸만 섀도우 복싱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기는 하지만 적어도 내가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인지할 수 있을 때까지는 발버둥 치는 게 더 성미에 맞는다.

조혜진의 진심 어린 눈빛을 거절할 수밖에 없는 타이밍.

“누구….”

별안간 이쪽의 볼을 쭈욱 잡아당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왠지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처럼 느껴진 것은 당연지사.

“당신은….”

다시 반대쪽 볼을 쭈욱 잡아당긴다.

개소리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뭐야 너. 시바 어쩌라고.’

심지어 볼을 잡고 양손으로 흔드는 통에 얼굴이 떨어져 나갈 것처럼 아프다.

‘그러고 보니까 얘는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내가 단순히 이기영과 닮았기 때문에 내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건지, 아니면 내가 더미 이기영이기 때문에 나를 지켜주려고 한 것인지, 어느 쪽이든 생각하는 것만 머리 아프다.

그놈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미 시도 때도 없이 24시간 머리를 굴리고 있었으니까.

아무래도 후자의 가능성이 조금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누군가 내가 더미라고 생각하길 바랐기 때문에 그녀를 이쪽으로 불렀다고 생각한다면 문제는 다시 도돌이표로 돌아가게 된다.

확실한 것 하나는 눈앞에 있는 이 조혜진이 노을빛의 군주를 비롯한 21군단과는 독자적인 노선을 밟을 수 있다는 것 하나.

적어도 명령대로 움직이는 로봇 같은 게 아니었다는 게 둘, 이쪽에게 우호적이라는 것이 셋.

나쁘게 말하면 꽃기영 입장에서 이용할 수 있는 패가 늘어난 셈이었다.

성격상, 그리고 변수가 많을 수밖에 없는 현 상황에서… 그녀를 완벽하게 믿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기는 있어.’

꽤 안심이 되는 문장이었다. 물론 얘를 사람으로 봐야 할지는 애매하기는 한데… 그래도….

그래도 이게 어디야.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일단은 잘 보이는 게 옳다. 표정을 찡그리자 이쪽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알았는지 조용히 뺨을 놓는 모습.

뭐 하는 짓이냐고 소리치고는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당황하는 듯한 표정으로 붉게 변한 뺨을 가린 이후에 두 발자국 정도 물러서서 입을 연다.

“당신은… 누구죠?”

“…….”

“아니, 당신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어요. 하지만 어째서… 어째서 저를 구해주신 건가요? 당신은 노을빛의 군주의… 하수인이 아니었나요?”

덤혜진이 조용히 창을 꺼내 들었다. 순간적으로 이쪽을 찌를까 살짝 걱정되기는 했지만 이내 땅바닥에 글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싶었으니까요.

“그게 무슨 말….”

-할 수 있는 말이 많지 않습니다. 그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말밖에는.

“당신은 저를 알고 있나요?”

-제가 알고 있는 사람이 맞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저는 분명 당신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아는 저는 누구죠?”

-파란의 부길드마스터.

“…….”

-그리고. 내 친구.

그래. 대륙이든 더미월드에서든 그게 내 직책이기는 하지. 네 친구인 것도 맞고 근데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자너.

-다른 것들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저 제가 당신을 무척 아낀다는 것과 동시에 미워… 한다는 것 정도만.

‘얘한테도 장난쳐 놓은 상탠가?’

“파란은 뭔가요… 도대체….”

-알게… 되실 겁니다.

“어째서 노을빛의 군주는 저를 찾고 있는 거죠? 이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그 역시 알 수 없습니다.

“누가 당신을 이쪽으로 보낸 건가요.”

-아무도.

“당신의 목적은 뭔가요?”

-첫 번째로는 잿빛노을 지역을 침입하는 이들을 막아내는 것. 두 번째로는 내 의지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것. 지금은 당신을 지키는 것이겠군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기 의지가 강한 것 같은 느낌. 노을빛 군주 측에서도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면 한 가지 의문점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얘들은 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조혜진의 더미라고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크다.

그녀는 말도 하지 않는 것 같았고 21군단에게 자기 의사를 제대로 표현한 것 같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여기 있다는 건 진짜 조혜진은… 대륙에 남아 있다는 뜻이니 그녀의 모습을 딴 전투 인형 하나를 같이 데려왔다 여기고 있을 수도 있겠지.

심지어 모습을 본뜨지도 않았다. 온몸을 갑주로 가리고 있었고, 누가 보면 조혜진의 전투 프로그램을 입력한 리빙 아머라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높은 가능성으로 그녀가 사고한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을 것이다. 앞서 영상에서 봤었던 그녀의 모습도 인간성을 상실한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당신은 자기 자신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고 있나요?”

-조금은.

“그 사실을 노을빛의 군주 측에서도 알고 있나요?”

-모릅니다.

‘확실히… 얘는 뭐가 뭔지 제대로 모르고 있네.’

희라 누나, 지혜 누나를 제외하면 더미월드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이들이 없으니 아마 상상 못 하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이 더미가 그 더미가 맞는지 알 수 없겠지만… 이로써 지혜 누나나 이기영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왜 다시 온 걸까.’

만약 그 더미가 맞다면….

분명히 더미월드는 대륙 던전화 이후로 놔버린 것으로 기억하는데….

‘더미들이 계약을 맺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나?’

굳이 떠올려 보자면 한 가지 있기는 하다.

‘서버 관리 비용?’

아무리 완벽한 환경을 설계해 놨다지만 기본적으로 프로그램인 이상 관리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독립을 외치며 위풍당당하게 안정을 추구했겠지만 서버를 업데이트하고 관리할 비용을 자체적으로 생산해 낼 수 있을 리 만무.

어느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구멍을 틀어막을 뿐, 장기적인 대안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 쪽 역시 예산이 부족하면 외부에서 신성을 끌어오지 않았던가. 더미네라고 해서 다를 리 없다.

‘심하면 더 심했겠지.’

생각해 보면 크고 작은 부작용은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었고, 몇몇 데이터들은 수백만 번이 넘는 리셋과 실험으로 망가지기 일보 직전이었을 테니까.

어떤 데이터 하나에게 문제가 생겼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계약했다고 해도 개연성이 들어맞는다.

가설을 확인하고 싶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눈앞에 덤혜진은 아는 게 없어 보이는 듯한 느낌, 심지어 몇 가지가 제한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니… 더 이상 파헤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

“이제부터 저를 어떻게 할 생각인가요?”

-인간들이 오고 있습니다.

‘아, 이쪽으로 오고 있구나. 도피는 안 하는 모양이네.’

-저도 돌아가야 합니다. 받은 임무가 있으니 말입니다.

“…….”

-부길드마스터.

“저는 몰라요. 부길드마스터가 뭔지… 당신이 뭘 원하고 있는지, 저한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다만 드리고 싶은 말씀은….

“…….”

-자신을 믿으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 나도 믿고 싶어.’

그 누구보다도 내게 제일 나를 믿고 싶은데… 너무 신뢰가 안 가.

“…….”

이 새끼 허구한 날 사기만 치는 새끼잖아. 어떻게 제정신으로 얘를 믿을 수 있겠어.

심지어 지 머리 가지고도 장난치는 놈이라 더 그래.

물론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지만 이번에는 불안한 게 조금 많다고 느껴져.

“…….”

-기영아. 너를 믿어야 돼.

뭘 알고 말하는 건지, 아니면 단순히 용기를 주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조금은 힘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저 말 하나에 달라지는 것도 너무 웃기기는 한데….’

심지어 틀린 말도 아니다. 뭐가 어찌 됐든 간에 이 게임에 응하고, 이기는 편이 이쪽에 이롭다는 사실 정도야 인지하고 있지 않았던가.

언제나 지는 게임보다는 이기는 게임을 하는 게 이기영이었다.

‘네가 원하는 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나는 양보 안 해.

진짜여도 그렇고, 가짜여도 그래.

“이기영 님.”

“성자님이 계신다!”

“이기영 님!”

“괜찮으십니까?”

“여기다! 찾았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살짝 고개를 돌린 이후 다시금 조혜진을 바라봤지만 눈앞에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양측에게는 서로가 적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작별인사도 하지 않은 것이 조금은 섭섭하다.

이윽고 꽃과 풍요를 중심으로 이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플레이어들은 내 상태를 확인하거나, 조혜진에 의해 요단강을 기웃거리는 놈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른 방향으로 갔었는지 급하게 다가오는 윌리엄 역시 시야에 비친다.

도착하자마자 나를 살핀 이후, 녀석들의 복면을 벗기려고 했었지만 나는 간단한 손짓으로 그 행동을 저지했다.

“벗기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윌리엄 님.”

“네?”

“저들이 누구인지 알 필요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단순히 오늘 일은 실수라고 생각하고 불문에 부쳐주셨으면 해요.”

“하지만… 하지만 이기영 님, 이들은….”

‘그러니까 시바 몸빵으로 확실하게 써야지. 지금 전력 하나가 아까운 순간인데.’

“불안하고,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이겠죠. 일신의 안전을 추구한 자들이 아니라 로헨을 생각해 저지른 일들이에요. 지금 같은 상황에 이를 문제 삼고 저들을 심판대에 올린다면… 아군을 억지로 결집시킬 수 있을지언정, 모두의 마음을 얻을 수는 없을 거예요.”

“…….”

“그리고….”

“…….”

“어쩌면 저들의 선택이… 틀린 선택이 아닐 수도… 있어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기영 님.”

“노을빛의 군주가 진실로 원하는 것은 로헨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씀을 드리고 있는 거예요. 윌리엄 님.”

“…….”

“자세히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제가… 제가 생각보다 더 깊숙이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일단 이 새끼부터 강화시켜야 되겠다.’

“제 안에… 그들이 갈구하는 어떠한 힘이 잠들어 있는 것 같아요.”

세기말 감성으루.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