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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58화 (1,15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58화

의혹 (2)

시답지 않은 질문이 던진 이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커다란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

-…….

-…….

둘 모두에게 예민한 질문을 너무 쉽게 던졌다는 것이었다.

‘시바.’

이기영이라면 아무 생각 없이 던졌어도 상관없는 질문이다. 농담처럼, 섭섭하다는 듯이 표현을 하거나 그녀의 행동에 의문을 느꼈다는 식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미기영의 입장에서는 다르다. 더미기영은 결코 이런 질문을 던져서는 안 됐다. 최악의 타이밍에 던진 악수 중의 악수였다.

‘호흡이 어땠었지? 당황하고 있는 게 티가 났었나? 아니, 처음부터 잘 못 들어갔어.’

김현성이 나를 못 알아본다는 걸 말했을 때부터, 눈치챘을지도 몰라.

조금 더 생각하고, 가면을 쓰고 떠보는 식으로 그녀를 떠봤어야 했다.

누가 듣기에도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투로, 의심이 된다는 듯한 태도로 던진 말에 그녀가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지 않은가.

조심스럽게 다가갔어도 눈치챌 확률이 높을 진데….

‘제길. 제기랄. 제길….’

말하자면 내가 더미라는 사실을 의심하고 있다고 광고하는 꼴, 지금 지속되고 있는 이 침묵이 답을 알려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 역시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리셋 버튼을 누를지 말지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정말로 더미가 맞다면 말이다.

‘어쩔 수 없었어.’

물론 실수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었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이지혜를 지혜 누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기억들을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녀는 더미기영의 창조주가 아니라 지혜 누나였고, 노을빛의 마왕 역시 적이 아니라 내가 만든 나의 회귀자였다.

어처구니없지만, 의심이 드는 이 와중에도 기분이 좋지 않다. 이지혜도, 김현성도 이쪽을 이기영으로 보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린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지만 스스로 유대감을 갈구하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초조함이 가시지 않는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머릿속에 차오른다.

내가 진짜 이기영이 아니라면 어떻게 하지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시바….’

“…….”

‘진짜… 뭐 이런 개 같은 상황이 다 있어.’

이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그게 궁금했어요?

-…….

-아. 그냥요. ‘오빠’가 별로 안 좋아하는 줄 알았죠. 이제부터 오빠라고 하면 돼요? 나 참… 언제는 자기가 더 어리다고 오빠라고 하지 말라더니… 사람 이상하다니까. 오빠 게다가 거기서는 23살이라면서요. 23살 꽃기영한테 오빠는 좀 아니죠.

‘눈치챈 건가.’

정확히 무엇을 눈치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투에서는 여전히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니… 그냥 이상해서 별로 중요한 내용은 아니야. 누나.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질문이었네. 신경 쓰지 마.

-은근히 소심해. 뭘 그렇게 쓸데없는 거에 궁금증을 가지고 그래요? 그냥 이쪽에서 이렇다고 하면 그렇다 하고 받아들이면 되지. 굳이 그런 질문 해서 사람 민망하게 만들기예요? 아니면… 뭐… 애정이 식은 줄 알았어요? 그게 불안한 부분이었나?

-아니….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었나 봐? 겨우 호칭 하나로? 이거 꽤 좋다. 우리 가끔 밀당 같은 거 해야겠다. 그쵸?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누나가 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나 했지. 아무래도 조금….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겠어요. 또‘오빠’ 뒤처리할 생각에 잠깐 화나 있었던 것뿐이었어요. 나 스트레스받으면 까칠해지는 거 알면서 새삼스럽게… 상처받았으면 미안해요.

-아니, 내가 미안하지 항상. 그리고 누나. 뒤처리는 내가, 내가 알아서 할게. 크게 신경 안 써줘도 돼.

-에이, 그거랑 이거는 다른 문제죠.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줘야 돼요. 오빠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이쪽도 이쪽 나름대로 준비할 게 있으니까요.

-응.

-그럼 이상한 질문은 끝났어요? 더 볼일 없는 거… 확실해요?

-…….

-그럼 이제. 아무 문제 없는 거 맞죠? 오빠. 김현성 쪽은 내가 알아봐 줄 거고… 오빠 쪽에는 확실히 문제없는 거 맞죠?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그냥 아무 문제 없는 거로 하고 싶다는 거야? 그렇게 받아들이라는 건가? 이 질문과 의혹은 암묵적으로 스킵하자는 거 맞지?

-응. 누나 푹 쉬어.

-오빠도요. 혹시 다른 궁금한 거 생기면 바로 연락해 줘요. 혼자 꽁꽁 싸매고 있지 말고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죠?

-…….

어쩌면 내가 너무 더미기영일 거라고 생각에 매몰되어 있는 건 아닌가.

무엇을 깨달았던 것 간에 모르는 척하고 할 일을 하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게 꼭 더미 관련한 것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이지혜 역시 정확히 내가 어떤 판단을 하고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서로 동상이몽을 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물론 여러 가지 가능성을 가정해 보는 것은 앞서 등장한 가설을 먼저 확인한 이후, 꽃기영이 더미기영일 가능성과 그 이유였다.

‘누가 뭐래도 김현성이… 나를 못 알아볼 리가 없자너.’

이곳으로 떨어지기 전의 이기영이 김현성에게 장난쳐놓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구태여 김현성에게 장난을 쳐야 했느냐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보다는 어째서 더미기영을 로헨으로 보냈느냐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쉽다.

‘불확실하니까.’

말 그대로 로헨 원정에 진심으로 덤벼들기에는 걸리는 요소가 많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가능성이 아니다. 당장 내가 느끼기에도 로헨 원정은 불안요소투성이였으니까.

윗놈들은 뜻을 하나로 모으지 못해 개싸움이 열리는 중이었고 몇몇 떨거지 놈들은 대륙 운영에 관심도 없다. 그나마 생각이 똑바로 박혀 있는 쪽은 가난에 허덕이기 바쁘다.

우효열을 회귀자로 모시는 계획은 또 어떠한가. 일방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현실성, 비전도 없다.

내가 투자자라면 절대로 로헨이라는 기업에 투자하지 않는다. 아예 인수해 개혁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손댈 가치가 없다.

그래, 이게 맞다. 차라리 이런 방향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라면 분명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진지하게 받아먹는 것보다는 한번 던져보자고, 던져보고 안 된다면 아예 손을 놓고 먹어버리자고.

‘유피테르와 계약한 건 이기영이 아니야.’

엄밀히 말하면 유피테르와 계약을 한 것은 더미기영이다.

찐기영은 나와 유피테르가 맺은 계약에 책임질 필요도 지켜야 할 약속도 없다.

샤넬리아 에르메스와의 계약을 유피테르와의 상위 계약으로 갱신하며 본인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녀석이 유피 쪽과 커넥션이 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나라면 위와 같이 빠져나갈 것이 분명했다.

찐기영이 유피테르를 신뢰할 리 없었으니까.

김현성을 내세워 로헨을 먹어버리든가, 나머지 대군주 둘을 이용하든가, 아니면 저쪽 발등에 불이 다시 한번 떨어졌을 즈음에 일방적인 수준의 재계약을 요구하거나, 로헨에 압박을 넣을 수단과 도구는 셀 수 없을 만큼….

‘많겠지.’

이 일련의 과정들이 시스템도, 윗놈들도 딴지를 걸 수 없게끔, 어디까지나 옆문으로 로헨을 먹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는 과정이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같은 짓거리를 반복할 확률이 높다.

유피테르 쪽 인사들이 호문클루스에게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이 새끼들의 무능함을 생각한다면 딱히 이상하지도 않다.

실제로 외신 꼬맹이들도 이쪽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고, 전체는 아니지만 그쪽에서도 협력자 몇몇은 있을 가능성이 높았으니 말이다.

이지혜와 김현성만 이 내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위화감은 영혼의 문제지 육체의 문제는 아니다. 그 정도로 완벽한 호문클루스를 만들어냈다.

물론 이 정도로 원본에 가까운 퀄리티를 유지하려면 다른 희생도 감수해야 했겠지.

이를테면 수명 같은 것. 육체의 기능 같은 것. 단기간에 써먹고 버릴 육체라면 무너지기 전까지 원본과 같은 퀄리티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판단이 선다.

당장 내 몸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이 몸은 호문클루스의 뚜껑을 열어볼 정도의 연금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연금술은 일부러 닫아놓은 건가?’

확률이 낮다고는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정하얀은?’

하얀이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이지혜와 김현성이 눈치챘다면 정하얀도 아마….

‘눈치챘을 거야.’

설사 눈치채지 못했다 하더라도 어떤 방향으로든 찐기영과 접촉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냥 좋아하는 인형을 보는 것과 같은 느낌으로 이쪽을 보고 있을 것이다.

인기척에 시선을 돌리자 언제 왔는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오, 오, 오빠.”

“…….”

“무, 무, 무슨… 문, 문제 있어요?”

“아니. 그냥 잠깐….”

“아, 아, 아픈 건 아니죠?”

뭔가 이상한 눈동자.

‘평소에 이랬었나?’

내 기억 속에 정하얀이 나를 바라보는 눈이 원래 저랬던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잠깐 혼자 있고 싶은데… 괜찮을까?”

“아! 네… 네. 밖,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끼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방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작은 문틈 사이로 이쪽을 지켜보는 정하얀의 눈이 시야에 들어온다.

“…….”

눈동자가 휜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히죽거리며 웃고 있을 것이다.

“…….”

“…….”

“하얀아.”

“히… 히힛….”

“…….”

“…….”

“들, 들, 들켰다.”

불안하다. 생각하기 싫은 상황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다.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마치 감시당하고 있는 것만 같다.

어쩌면… 어쩌면 이기영도….

‘나를 보고 있나?’

게니우스들 중에 하나? 누구지? 심연? 황금색? 수호자? 문지기? 소년?

나를 보고 있다면 혹시 어느 정도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지?

리셋하거나, 영향을 주는 것도 가능할까?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마련해야 했을 테니 더미를 통제할 만한 수단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해야 한다 여기고 있다면 이쪽 무의식에 간섭할 수 있는 수단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다.

‘생각도 읽고 있을까?’

내가 지금 더미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걸 그쪽에서도 인지하고 있을까?

‘인지하고 있다면 어째서 가만히 놔두는 거지?’

깨닫건 말건, 상관없다 이건가? 역할극만 충실히 해준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 이건가?

이지혜의 태도 역시 비슷한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을 의심하든, 무엇에 의문을 품든 간에 역할에 충실하라.”

“…….”

“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너희들은….”

“…….”

“너는 어차피 충실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맞지?”

어처구니없고 잔인한 발상이다.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 새끼들은 더미를 사람으로 안 봐. 그냥 프로그램 덩어리로만 여기지.’

김현성, 이지혜, 정하얀, 박덕구, 라파엘, 한소라, 황정연, 엘레나, 김창렬, 유아영, 김예리, 안기모, 박리안, 벨리에, 알프스, 카스가노 유노, 오스칼, 베니고어, 벨리알, 스미스, 젠, 쓰로누스, 도미니온스, 케루빔….

이 관계들이 전부 만들어진 거라면, 진짜 네 경험이 아니고 네 기억이 아니라고 느낀다면, 그런 의심이 든다면… 내 것인 게 아무것도 없다면….

“너는 네가 가지고 있는 진짜에 충실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야?”

창문에 비친 이기영이 내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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