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48화
마음이 꺾였지만 이내 일어서게 되는 클리셰 (1)
[꽃과 풍요의 여신♥이 당신을 위로합니다. 절대로 당신의 잘못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우리 기영이의 탓이 아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위해 코인을 후원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1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거룩한 밤의 여주인♥이 당신을 위해 5천 코인을 후원합니다.]
[거룩한 밤의 여주인♥이 레이먼 볼트의 최후는 장렬하며 거룩했다고 담담하게 말을 꺼냅니다. 이 또한 당신이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초승달 아래에서 우는 늑대는 당신이 멍청했다고 조롱합니다.]
[심연 속의 가장 낮은 심연♥은 일부 게니우스들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심연 속의 가장 낮은 심연♥이 1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삐뚤어진 수호자가 당신의 무능함과 안일함이 화를 초래했다며 비웃습니다.]
[하늘의 문지기♥가 말조심하라 외칩니다. 우리 기영이의 심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진다고 울부짖습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일부 선을 넘는 게니우스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진실의 귀걸이를 걸고 있는 소년이 어째서 스트리밍을 계속해서 유지하는지에 대해 묻습니다. 동료의 죽음으로 코인을 벌 수작일지도 모른다며 의심합니다.]
‘이 새끼 눈치 더럽게 빠르네.’
물론 꽃기영을 음해하는 일부 게니우스들의 개소리들은 못 들은 척하는 것이 맞다.
23살의 꽃기영은 할아버지를 잃은 상태였으니까.
초점이 없어진 눈, 눈물이 마르고 말라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식음을 전폐한 지 정확히 이틀째, 배가 고프기는 했지만 목구멍으로 뭐가 들어갈 리 만무했다.
여리디여린 꽃기영은 할아버지를 잃은 상태였으니까.
아직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 날의 기억이 생각나는 것은 당연지사.
커다란 폭발 소리와 함께 울부짖는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괴로웠던 기억, 슬프고 잊고 싶은 기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었다.
물론 그 기억들보다 더욱더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할아버지와 쌓아왔던 소중한 추억이다.
머리를 쓰다듬는 할아버지의 손이, 포근한 미소가, 자상했던 목소리가, 따뜻했던 가슴이 머릿속에 잊혀지지 않았다.
만난 시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이기영과 레이먼 볼트의 사이에는 어떤 유대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그는 이기영의 가슴에 뚫려 있는 무언가를 채워주고 있었다.
로헨에 소환된 이후 처음으로 가족이라 부를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너무나 짧았던 시간이었기에 에피소드가 많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은 이미 없었던 이벤트들을 떠올린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일도 있기는 했지만 감정을 잡으려면 없던 추억이라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함께 의자에 앉아 모닥불을 바라보며 캠핑을 했던 기억, 뒤편 정원에 앉아 함께 과일을 먹었던 기억, 체스게임에서 진 뒤에 머쓱하게 웃었던 할아버지의 미소.
또 식당에 가거나 지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것, 고민 상담을 하러 찾아간 기억도, 힘든 일을 겪고 눈물을 보였던 기억도….
이제는 모조리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짧은 시간 동안 쌓았던 유대였던 만큼 상실감은 더욱더 커다랗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일이 된 것만 같다.
“흐윽… 흐으윽….”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물건은 고작 목걸이가 전부, 사실 내 목걸이였지만 할아버지의 유품을 꽉 움켜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꽃기영은 무력했고, 멍청했다.
작전의 모든 책임은 지휘관에게 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재해라는 표현이 옳았으나 이기영은 모든 상황에 대처했어야만 했다.
처음 보는 적에게 발은 굳어버렸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 못했다.
파티원들의 상태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했고, 합리적인 명령을 내리지 못했다. 어쩌면 전부 죽었을 수도 있었다.
임채령도, 남궁선도 전부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
아직도 몸이 전부 회복되지 않은 상황,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꽃기영은 무너지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내… 내 탓이야.”
전부 꽃기영의 탓이다.
“내 잘못이야.”
전부 꽃기영의 잘못이다.
레이먼 볼트를 죽인 것은 꽃기영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기영 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방문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당연히 대답하지 않는다. 이기영은 현재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문을 똑똑 두드리고 곧바로 입을 여는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 오랜만에 보는 윌근본이었지만 시선을 주지 않는다.
‘당연히 여기밖에 갈 곳이 없자너.’
갈 곳 없는 이기영과 우효 파티가 어디로 가겠는가. 하리젤은 지도에서 완전히 지워졌고 파티하우스 역시 무너져 버렸다.
죽어가는 임채령과 한계를 맞이한 남궁선을 살리기 위해서는 이곳으로 오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재미있었던 것은 이곳으로 직접 우리를 데리고 온 것이 우효 녀석이라는 것.
윌리엄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녀석이 직접 고개를 숙일 정도로 파티의 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괜찮긴 뭘 괜찮아. 너라면 시바 괜찮겠어? 할아버지를 잃었는데?’
“이기영 님….”
“아… 윌… 윌리엄 님… 죄송해요. 오… 오셨군요.”
뒤늦게 윌리엄이 온 것을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숙인다.
너무 울어 쉰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꽃기영은 망가져 있었다.
퉁퉁 부어 있는 눈과 엉망이 된 몰골, 물도 먹지 않아 말라버린 입술과 피부.
녀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당연했다. 애써 괜찮은 척, 자신이 왔다고 금세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게 더욱더 안쓰러워 보였겠지.
애써 꿋꿋한 모습을 보이는 게 놈의 감성을 자극했을 것이다.
“죄… 죄송해요. 저… 잠깐….”
서둘러 몸을 일으켜 녀석을 맞이하려고 했지만….
“아니. 괜찮습니다. 이기영 님. 그대로 계셔도 됩니다.”
“하지만….”
“내 집처럼 여겨달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왔다고 해서 굳이 일어나실 필요 없습니다.”
“…….”
“형식적인 예의보다는… 이기영 님이 편하게 지내주셨으면 합니다.”
“뭐…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 이… 이렇게.”
“아무 말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은… 말입니다.”
어설픈 위로가 상처를 쑤시는 것임을 우리 윌근본은 잘 알고 있다.
상처받은 이기영을 끊임없이 위로해 주겠다는 스탠스를 취하기 시작한 정하얀과는 조금 다른 행보.
어느 것이 옳은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녀석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병에 있는 꽃을 갈아주거나 조용히 방을 정리하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 주는 행동은 그야말로 근본 그 자체.
결코 어색하지 않은 편안한 침묵이 장내에 감돌고 있었을 때, 녀석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입을 열어왔다.
시선도 주지 않고 툭 하고 던지는 것처럼 말이다.
“임채령 님의 회복 속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신 것 같더군요.”
“아… 다… 다행이군요.”
“벌써 훈련을 시작하셨습니다.”
“남궁선 님께서도 역시 재활 훈련에 힘쓰고 계시는 중입니다. 마찬가지로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오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네요.”
“…….”
“…….”
“만나보시지 않겠습니까?”
“네?”
“원하신다면….”
“아… 아니요. 지금은 괜찮아요….”
무슨 염치로 내가 걔네들을 보겠어?
겁쟁이가 되어버린 꽃기영은 입을 꾹 다물 뿐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네 탓이라고, 너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지도 몰라.’
전형적인 표현으로 마음이 꺾여 버린 상태, 27군단 소환사태 때의 김현성보다는 덜 하기는 했지만 한껏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동료를 잃거나 사고를 겪어 모험가를 은퇴하는 사례는 많았으니까.
윌리엄 역시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보내고 있는 것이리라.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겠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없을지도 몰라.’
라고 생각하고 있을 게 뻔했다.
“저… 저….”
“…….”
“그러니까….”
“…….”
“이기영 님.”
“네? 네… 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무리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만약….”
“…….”
“만약 이기영 님만 괜찮으시다면… 꽃과 풍요에서 이기영 님을 돌보아 드릴 수 있습니다. 굳이 전선에 나가거나 파티를 이끌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
“후방에서도… 로헨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많으니 말입니다.”
“…….”
“굳이… 이런 상처를 받으실 필요 없습니다.”
“…….”
여린 꽃기영에게는 달콤하게 들려오는 제안.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돼.’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아도 돼.
두려워하지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물론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는 건 아니었다.
“우… 우효열 씨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 그렇군요.”
“…….”
“떠난… 거군요.”
“…….”
“당… 당연하겠죠. 네… 계… 계속 파티를 맡긴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겠죠.”
오히려 안심된다는 스탠스를 취해주는 것이 옳다.
만약 우효열이 돌아온다면 다시금 전장으로 향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시 눈앞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
‘근데 이 새끼 백타 돌아오자너.’
애초에 우효 파티 성장 드라마 찍으려고 이 난리를 치고 있는 건데 돌아와 줘야 되자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에 묻고 싶은 게 없을 리 만무.
천사들이 중얼거렸던 아버지는 무엇인지, 어째서 쓰로누스의 검술을 알고 있는 건지, 이 사건에 어떻게 연관이 되어 있는지 홀로 추리물을 찍고 있을 게 분명했다.
분위기를 잡고 있는 것 역시 이 새끼의 질문을 원천차단하기 위한 장치.
‘이대로 떠날 리 없자너 진짜.’
아마 조만간 생각을 정리하고 돌아올 것이다. 내 생각보다 파티에 애착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여기 패밀리아 입단신청서입니다.”
“…….”
“사실 입단신청서 같은 건 필요가 없지만… 이기영 님의 직위나 맡으실 업무를 간단하게 정리해 놨으니…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가 되시면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으실 겁니다.”
“네. 배… 배려에 감사드려요.”
“배려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힘들 때 돕는 게 바로 가족이니까요.”
너 따뜻한 아이구나.
“그리고….”
“네….”
“이기영 님의 탓이 아닙니다.”
“…….”
“그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
한참의 침묵이 지난 직후, 녀석은 곧바로 방을 나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입단신청서와 식사.
‘어쩌면….’
어쩌면 이게 맞는 선택일지도 몰라.
이렇게 상처받지 않아도 될지도 몰라.
“…….”
“…….”
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린다.
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어와 꽂혔다.
“네놈은….”
“…….”
“네놈은 도대체 언제까지 여기 처박혀 있을 생각이냐?”
“…….”
“이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