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45화
조금 이른 타이밍 (3)
‘누굴… 누굴 죽이지?’
천천히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미래가 예정되어 있는 창창한 인재인 노담혜는 일단 제외, 자연스레 후보는 임채령, 레이먼 볼트, 남궁선으로 제한된다.
가는 데 순서는 없다지만, 일단 파티의 든든한 연장자 역할을 해줬던 레이먼 볼트 영감이 먼저 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와 꽂힌다.
애초에 언젠가는 쳐내야 하는 인선이기도 했고 팀의 연장자가 사라진다는 건 의미가 꽤 크게 다가올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한 것은 당연지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우효 녀석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관계를 구축해 가던 임채령이 가는 것은 어떨까.
남궁선을 보내버려 임채령의 각성을 촉진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인데.
고민하는 시간은 길었지만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선택을 보류하는 것.
‘이도 저도 아닌 것보다는 나아.’
그렇지 않아도 너무 이른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시점이 아니었던가. 아직 파티가 똘똘 뭉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고, 파티원들끼리 많은 유대감을 쌓지도 못했다.
만들어진 어설픈 스토리로 한 명을 보냈다가는 오히려 팀원들에게 위화감을 상승시키며 불신을 초래할 뿐이었다.
‘맡기자.’
그래. 믿자. 내가 뽑은 이 파티원들을 믿자.
어차피 한 명이든 두 명이든 피해는 생기게 되어 있으니 흐름에 맡겨보도록 하자.
위대한 극작가는 캐릭터들을 의도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도움을 줄 뿐이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등장인물들이 스스로 움직였다고. 그런 이야기가 우효 파티에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보장도 없다.
“크윽!”
파티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쓰로누스를 불러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투는 쉽지 않은 상황, 레이먼 볼트 영감은 다시 한번 검을 막은 이후 중심을 잃는다.
쓰로누스가 제대로 검을 휘두를 수 있는 환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검을 막는 것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평타 한 번 한 번에 힐을 몰아줘야 하는 남궁선 역시 정신적, 체력적으로 지칠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나마 정하얀이 활약해 주고는 있었지만 도미니온스의 견제를 막으며 쓰로누스가 파티의 품 안으로 들어와 활개 치지 못하게 만들어주는 것에 힘을 쏟고 있었다.
애초에 얘는 그다지 집중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중간중간에 “왜 세나는….” 이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었으니까.
“이야아아아아압!”
레이먼 볼트 영감이 체력을 회복하는 사이에 팀의 앞을 지켜주는 것은 임채령이었지만 당연히 말도 안 되는 행동이었다.
1초. 볼트 영감이 다시 중심을 되찾는 시간이 1초만 늦었더라도 그녀는 쓰로누스의 검에 꿰뚫렸을지도 모른다.
던전에서의 수련이 효과가 있었는지 합격진은 꽤나 수준급, 온갖 강화 마법과 버프로 떡칠하고 저 정도도 못 하면 나가 죽어야 하는 상황이기는 했지만 파티원들이 보여주는 모습 자체는 고무적이다.
“할아버지. 왼쪽 조심해요.”
“…….”
어떻게든 쓰로누스의 추격을 뿌리치려고 건물 안을 헤집으며 달리고 있는 상황, 내 말에 레이먼 볼트 영감이 왼쪽으로 방패를 세웠다.
쓰로누스의 검이 레이먼 볼트 영감의 방패에 부딪히고 잠깐 길을 잃는 사이 임채령이 허리춤에 꽂혀 있는 단검을 던졌다.
쓰로누스의 내구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공격이기는 하지만 녀석은 다시 검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기다린 것은 임채령의 단검이 아닌 정하얀의 마법 결정체.
휘이이이이이잉!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순식간에 뻗어져 나간 마력의 구체가 녀석에게 쏟아지자 커다란 폭발 소리가 들려온다. 연기를 뚫고 나온 파티원들은 다시 한번 좁은 복도를 뛰쳐나가며 다음 장소에 몸을 옮기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허억… 허억… 도망 다녀야 해요.”
“…….”
“우리… 우리 살 수 있는 거 맞죠?”
“아마도요.”
“네?”
“가정하는 건 의미가 없어요. 빠져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죠.”
“으으….”
“저희 2파티의 목적이 뭐라고 말씀드렸었죠?”
“1, 1파티를 돕는 거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
“…….”
“할아버지 준비해 주세요.”
“무얼….”
당연히 우효열 지원이지.
같은 방식으로 쓰로누스를 두어 번 떨쳐낸 이후에 도달한 건물의 고층.
레이먼 볼트 영감이 장전한 석궁을 케루빔에게 쏘아 보낸다.
한참 우효열과의 싸움에 신경 쓰고 있었던 케루빔이 뒷걸음질을 친 사이에 우효열이 곧바로 기세를 가져가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타고 내려가요.”
“네? 저, 저 고소 공포증 있는데.”
바닥에 꽂힌 커다란 화살에 연결되어 있었던 밧줄을 타고 다음 건물로 이동, 물론 애로사항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날아와요! 저 은색 머리가 날아와요!”
이동하는 순간 공중으로 치솟아 오른 쓰로누스가 검을 들고 쇄도하고 있었으니까.
신성한 가호와 보호막을 겹겹이 씌우지만 노출되어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빠르게 다음 건물로 이동한 다음에는 쥐새끼마냥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닌다.
그리고.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벽면이 무너지며 케루빔과 뒤엉킨 우효열의 모습을 시야에 비쳤다.
“크윽!”
“…….”
서로 다른 싸움을 하고 있는 도중이었지만 한정된 맵을 사용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는 타이밍.
우효열의 입장에서는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지만 파티원들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메이스를 꺼내 든 레이먼 볼트 영감이 방패로 케루빔을 밀어친 이후 메이스를 휘두른다.
“…….”
임채령 또한 영감의 방패에 숨어 근접격투를 노려보지만… 커다랗게 날개를 휘두른 풍압에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듯 멈칫거렸다.
“으… 으윽.”
“다시 이동해요.”
“네?”
“저 둘을 붙여놓는 건 위험해요.”
태어날 때부터 호흡을 맞춰왔던 쓰로누스와 케루빔의 합격술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쓰로누스가 앞을 가로막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오랜만의 형제의 모습을 본 케루빔이 중얼거렸다.
“쓰로 괜찮아? 모습이.”
‘좀 너덜너덜해지기는 했지.’
격렬하지는 않았지만 귀찮고 이해할 수 없었던 전투였을 것이다.
동선은 모조리 파악당하고 있었고, 공격은 하는 족족 반격당한다.
속도도 민첩성도 자신이 빠른 것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종이 한 장 차이로 빠져나간다.
상대는 절대로 싸워주지 않는다. 계속해서 미로 같은 건물을 돌아다니며 마법을 난사하는 것이 전부.
건물을 무너뜨리거나 파편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시원하게 밀어버리고 싶었겠지만 혹시나 아버지가 다칠까….
‘그렇게 하지도 못했을 거야.’
“응, 괜찮아. 케루. 작은어머니가 봐주신 것 같아. 너는 어때?”
“좀 힘들어. 생각보다 쉽지 않아.”
“아버지와 저 사람을 떼어놓으면 안 돼. 우리 둘이 싸우는 게 더 효과적이야.”
‘그게 맞아.’
우리한테는 불리하지.
어떻게 봐도 궁지에 몰린 상황이기는 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높은 임채령, 우효열, 레이먼 볼트와는 달리, 남궁선과 노담혜는 퍼지기 일보 직전, 계속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다리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이 보인다.
말로는 설명하기 쉬운 전투였지만 저 정도의 괴물들과 상대하고 있다는 부담감은 정신력 또한 갉아먹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아… 하아….”
“허억… 허억… 허억….”
“…….”
당연하지만 얼굴에는 절망감이 감돈다.
모두가 말을 꺼내지는 않고 있지만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보조해라.”
“네?”
“나를 보조하라 이 말이다.”
“…….”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
“퉤.”
바닥에 한 번 침을 뱉은 이후에 다시 한번 검을 들어 올린 우효열.
힘들어 보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진다는 생각 자체를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마치 윌리엄과 싸울 때처럼 말이다.
자만심에 가까운 자신감. 수많은 사선을 홀로 넘길 수 있는 전사가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당연히 저런 종류의 감정은 전이된다.
‘할 수 있어.’
아직 이길 수 있구나.
던전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도 있었고, 무엇보다 저 괴물과 호각을 겨루는 모습이라면 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꽃기영 역시 희망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이 옳다.
‘이길 수 있어.’
아직… 아직 포기할 때가 아니야.
“할 수 있어요. 모두.”
그래.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어.
“가장 익숙한 진영으로 상대합니다.”
던전에서 배웠던 변형 트라이앵글 진영. 물론 던전 안에서 했던 것과는 천지 차이다.
자아의 대부분이 거세되어 있었던 언데드들을 상대로 몰이사냥을 하는 것은 쉬웠지만, 이번에 상대해야 할 적은 고차원적인 지능을 가지고 있는 생명체였으니까.
‘왜 불가능해 보여?’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나는 가능하자너.’
기승전결이 딱 정해져 있는 것 같은 스토리라인. 몰락한 왕의 묘지에서 배웠던 파티의 진영으로 이후에 등장하는 적을 무찌르는 희망찬 클리셰.
파티원들은 약속했다는 듯이 자리를 잡는다.
쓸 수 있는 맵이 넓지 않은 만큼 우효열은 조금 떨어진 장소에서, 정면에는 레이먼 볼트가, 오른쪽에는 임채령이, 의식적으로 왼쪽은 비워둔 이후에 남궁선과 정하얀은 천천히 주문을 외우기 시작한다.
‘할 수 있어.’
“가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두르는 우효열, 어떻게든 상대를 왼쪽으로 밀어내려고 하는 레이먼 볼트, 쉴 새 없이 주문은 떨어지고, 유기적인 포지션 체인지를 계속해서 강요한다.
“쓰로!”
“윽! 난 괜찮아 케루!”
쓰로누스와 케루빔의 손발이 계속해서 꼬이는 것이 시야에 들어온다. 적재적소에 떨어지는 정하얀의 마법이 계속해서 호흡을 방해하는 것이다.
“지금.”
“……!”
어떤 형태로든 케루빔과 쓰로누스가 왼쪽에 위치했을 때 터져 나오는 마법.
“지금.”
우효열 역시 2파티를 이용하고 있었다.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지만 케루빔을 덫에 몰아넣고 있는 것은 녀석의 내구를 신경 쓰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지금.”
“……!”
“케루.”
“응. 쓰로.”
물론 녀석들도 바보는 아니다.
저 둘 역시 이를 악문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한들,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물론 파티를 지휘하고 있는 것은 이기영이지만 쓰고 있는 부품이 부품이었으니까.
계속해서 딱딱 맞아떨어지는 톱니바퀴가 어긋나는 것은 한순간, 쓰로누스가 레이먼 볼트를 향해 검을 휘두른 찰나.
순식간에 날개를 펼친 이후 비상식적인 각도로 방향을 틀어 젖힌다.
대상은 케루빔과 잠시 진영을 이탈했던 우효열이었다.
‘안 돼.’
이런 상황에 항상 우효열에게 방어마법을 걸어줬었던 남궁선의 신성력 또한 바닥나 있었다.
참으로 공교로운 타이밍이지 않은가.
“효열 씨!”
그리고.
“…….”
“…….”
쓰로누스의 앞을 가로막은 임채령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콜록.”
길다란 검이 임채령의 가슴을 뚫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쳐온다.
“콜록… 아… 으윽….”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어….”
저도 모르게 커다란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목 놓아 부를 수밖에 없었다.
“채령….”
“아… 아… 콜록… 콜록….”
“채령 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