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19화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동료 (4)
“…….”
“…….”
“그래서….”
“예. 그러다 보니 우연히 이곳까지 오게 됐어요. 남쪽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펠큰 마을을 지나쳐야 하니까요. 물론 남쪽이 사냥터로 각광받는 곳은 아니지만… 한번 살펴보고 싶었거든요.”
“그렇구만. 그렇지….”
“놀라게 할 의도는 없었어요. 레이먼 볼트 씨.”
“아닐세. 놀란 게 아니라 그냥 처음 보는 사람이 와 있어서 당황한 것뿐이야. 처음 내 반응에 너무 마음 쓰지 말게. 오히려… 오히려 고맙다고 표현하는 게 맞겠지.”
“고마워하실 필요는….”
“허허….”
이제야 조금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는 레이먼 볼트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이 여기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자너.’
마을 외곽에 위치해서인지는 몰라도,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잘 찾아오지는 않는다.
갈 길이 먼 모험가는 물론이거니와 먹고살기 바쁜 이곳 사람들의 특성상 고아들을 돌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으니까.
대도시가 아닌 이런 후미진 곳에 있는 고아원은 더욱더 그렇다.
때문에 그럴듯한 개연성이 필요하기는 했다. 아무래도 하리젤에서 활동하던 이기영이 갑작스레 이곳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부자연스러웠으니 말이다.
간단한 의뢰를 받고 이동하는 도중 들를 수밖에 없었던 작은 마을, 지친 몸을 쉬기 위해 근처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가 아이들끼리 다니는 모습이 눈에 띄어 우연히 펠큰 고아원을 발견했다는 스토리텔링.
거짓말은 없었다. 실제로 이쪽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의 만남을 만들어내기 위해 며칠 전 이곳에 당도했고, 운명적인 만남을 연출했으니까.
의뢰서 자체가 만들어진 거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허점은 없었다.
물론….
‘나를 의심한다는 것 자체가 황당하기는 해.’
아마 내가 저 영감이었다고 하더라도 난데없이 나를 의심할 수는 없으리라.
‘애초에 의심할 필요도 없자너.’
말 그대로 구태여 의심할 필요도 없다. 앞날이 창창한 모험가가 그깟 고아원이 뭐라고 이곳에 잠입해 아이들을 해칠 음모를 꾸미겠는가.
당연히 자기 자신이 목적이라는 생각 또한 못 하고 있을 것이다.
꽃과 풍요에게 지속적으로 러브콜을 받고 있는 꽃기영이 71살의 퇴물 노전사를 영입하기 위해 이런 상황을 설계했다는 건 고아원에 검은 손길을 뻗기 위해서라는 말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생각이었으니까.
게다가.
‘이기영은 프로자너.’
봉사활동의 프로.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고아원에 남아 있는 일거리들을 처리하는 것 또한 익숙하다.
아이들의 빨래나, 식사를 만드는 것을 돕는 것, 누가 봐도 잡일의 대가처럼 느껴질 것이다.
구슬땀을 흘리고 불평불만 따위도 내뱉지 않고, 순전히 본인이 원해서 한 행동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 정도야 쉽다.
간단한 신성력을 사용하며 고아원 키드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 역시 말이다.
고름으로 꽉 차 있는 꼬맹이의 손을 조심스레 감싸 안으며 신성 주문을 외우는 모습은….
‘내가 봐도 성자 그 자체야.’
나를 처음 봤을 때 조금 당황하던 할배 역시 어느덧 경계심을 많이 누그러뜨린 모습, 타인과 인연을 만들지 않기로 유명하다던 할배의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누워서 떡 먹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레이먼 볼트 씨는… 어쩌다가 이곳에….”
“아. 나 역시 자네와 비슷하네. 펠큰 마을에 볼일이 있어서 한번 들렀다가 저놈들에게 마음을 빼앗겼지.”
“그렇군요.”
“알쉬폰, 저 녀석이 나를 이곳으로 이끈 녀석이라네. 믿겨지나? 저 어린놈이 내 주머니를 훔치려들지 뭔가. 심지어 그때는 지금보다 더 작았다네. 한 요만했었나…. 다 죽어가는 노인네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녀석의 부모 얼굴 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어. 그렇지 않으냐. 알쉬폰.”
“그, 그때는 정말 평범한 할아버지인 줄 알았어요. 지금처럼 갑옷도 안 입고 있었고….”
“허허허. 그래서 네가 잘했다는 게냐?”
“물… 물론 잘못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때는 어쩔 수 없었어요. 그때는… 동생들을 먹여야 했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잘한 행동이었죠. 할아버지 덕분에 이렇게 다 같이 모여 지낼 수 있었으니까요. 누나가 없어진 뒤로….”
“이 녀석.”
“아. 그럼… 혹시 처음에는….”
“네. 처음에는 아주머니들도 안 계셨어요. 형. 이렇게 좋은 집에서 살지도 못했고요. 할아버지 온 이후에 이곳도 많이 바뀌었죠. 전부… 할아버지 덕분이에요.”
“부끄럽다 이 녀석아. 이제 그만하고 가서 밥 먹을 준비나 하거라.”
레이먼 볼트 할배를 향해 애교를 부리는 녀석.
‘아… 저거 내 포지션이어야 되는데.’
레이먼 볼트 역시 익숙하다는 듯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이들에게는 잘된 일이로군요.”
“그렇지. 잘된 일이지.”
‘딱 좋네.’
생각한 거랑 크게 다르지 않아서 다행이기도 하구.
알고 보니 욕쟁이 할아버지였다는 전개였으면 아무리 나였어도 조금 당황할 뻔했다.
물론 성향과 기벽, 윌리엄 프라우드에게 보고받은 내용으로 할배의 성격을 유추해 볼 수 있었지만 실제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은 또 다르지 않은가.
‘꼰대 마인드도 없는 것 같자너.’
최소한 파란 길드의 적폐였던 늙은이들 같은 타입은 확실히 아니다.
기본적으로 젠틀하고 예의가 뭔지 아는 노신사.
적당히 과거를 후회하고 많은 사연을 가지고 있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타입.
당연히 삶의 미련 따위도 없을 것이다. 이 고아원을 제외하고 말이다.
“잘된 일이야. 그래, 모두가 잘된 일이지.”
“…….”
“자네 같은 사람을 만난 것도 말일세.”
“네?”
“생각해 보게나. 이 늙은이가 살면 또 얼마나 살겠는가. 자네에게 짐을 떠넘기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녀석들을 봐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돼.”
‘이 할배 봐, 은근슬쩍 나한테 넘기려고 하자너. 언제 봤다고 말이야.’
“부담을 주려고 하는 말은 아닐세. 아무래도 이런 곳에서 살다 보면 주위를 둘러보는 게 쉽지 않을 테니 말이야. 과거의 나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
“그저 시간이 날 때, 가끔 생각이 날 때 들를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 아이들에게는 많은 힘이 될 게야.”
“네.”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다고 생각해 주게나.”
심지어 적당히 약은 면도 있다.
물론 이기영의 이미지 메이킹이 그만큼 잘되어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아무리 적당히 흘리는 말이더라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저런 말을 쉽게 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특히나 요렇게 인간성을 상실해 나가고 있는 대륙에서 믿을 만한 놈이 얼마나 있겠는가.
‘진짜. 이래서 인상이 좋아야 돼요.’
밝은 웃음.
선한 인상.
세상의 순수함과 깨끗함을 모두 가지고 있는 듯한 페이스. ‘아무것도 몰라요’를 외치고 있는 분위기는 덤이다.
아직 이기영은 로헨 대륙에 오염되어 있지 않다.
소환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젊은이는 초보자의 시련을 겪고 왔음에도, 게니우스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보이면서도 순수했던 모습과 인간성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
마치….
마치 전 그늘진 태양왕관 패밀리아의 마스터.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처럼 말이다.
‘눈치챌 때가 됐는데.’
“…….”
‘아직 눈치 못 채고 있나 봐.’
웃을 때 살짝 고개를 숙이기.
‘요거 어때.’
손끝으로 머리카락을 살짝살짝 매만지기.
‘이건?’
대화할 때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고개를 계속해서 끄덕이기.
눈을 커다랗게 떠 줘야지.
‘이건 어때요?’
가족의 사진이 들어 있는 목걸이를 손에 꽉 쥐기.
모두가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의 습관이었다.
살아남은 그늘진 태양왕관의 생존자에게 얻을 수 있었던 정보들, 사소한 습관이기는 했지만 그녀를 기억하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가까운 사이였다니까. 눈치챌 만하자너. 그치?’
사실 이 고아원 역시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의 유산이다.
‘볼트 할배가 우연히 여기 왔다는 건 거짓말이고.’
이자벨 그녀가 펠큰 마을의 아이들을 남몰래 돕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리 만무했다.
아니, 어쩌면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알게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꼬맹이들에게 들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힌트를 통해 유추했을 수도 있다.
당시 패밀리아의 인원들을 모조리 잃고 폐인처럼 지내던 레이먼 볼트가 일어설 수 있었던 것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아마 펠큰 마을의 고아원이지 않았을까.
모든 것을 포기하려고 했을 때, 우연히 발견하게 된 고아들, 그들이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와 연이 있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대로 과거의 유산에 묶여 버렸다.
펠큰 고아원의 그의 원동력이었고 그의 추억이었으며 많은 것을 잃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이미 사망한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와 유일하게 연결되어 있는 장치라고 말하는 것이 좋을까.
노인은 추억에 잠기는 듯했다.
‘웃는다. 할아버지 기뻐 보이자너.’
뭔가 보이기는 하나 봐.
당연히 얼굴도 본 적도 없는 타인과 순식간에 유대감을 만드는 방법은 쉽지 않다. 세상 풍파 다 겪은 노전사와는 더욱더 그럴 것이다.
‘유대감 인터셉트.’
아니다. 이건 인터셉트가 아니라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의 의지를, 그녀의 유지를 이어나가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어울린다.
아마 녀석 역시 이걸 원하고 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원하고 있을 것이다.
보고 있나요?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
‘감수성 풍부한 할아버지 눈가 촉촉해지자너.’
“레이먼 볼트 씨?”
“아닐세. 잠깐 눈에 뭐가 들어간 것 같으이.”
만약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했다.
“그래. 이름이 이기영이라고 했지.”
“예.”
“이곳에 소환된 지는… 얼마나 됐나?”
“초보자의 시련을 완료하고,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바로 하리젤로 왔으니… 두 달이 좀 안 됐겠네요.”
“…….”
“…….”
“나도 자네에 대해서 많지는 않지만 들은 것이 있다네.”
“네? 저에 대해서… 말인가요?”
“허허허.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는 청년이로구만. 로헨에는 기본적으로 정보길드가 발달해 있는 터라… 소문이 빠르다네. 게니우스들이나 이야깃거리를 좋아하는 호사가들 역시 주점이나 광장에서 자네 같은 이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업으로 먹고살지. 자네처럼 유능한 인재가 들어왔을 때는 더욱더 그래. 메인스트림에 진입할 수 있는 인재들 말이야.”
“정확히 어떤 소문이….”
“천재 군사라고 했던가. 또 많은 대형 패밀리아의 오퍼를 거절했다고 들었네만….”
“…….”
“…….”
“상상 이상이네요. 설마… 그런 것까지 소문이 날 줄은 몰랐는데.”
“혹시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한 건지 물어도 되겠는가?”
“…….”
“아! 다른 뜻은 없네. 그저… 미래가 촉망되는 젊은이가 좋은 기회를 걷어찬 이유가 궁금해서 말이야.”
“…….”
“…….”
물론 답은 정해져 있었다.
이자벨 선 스트라이더가 습관처럼 내뱉었던 대사를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내버려 두기 싫었을 뿐이에요. 저는….”
“…….”
한 박자 쉬고.
“저는 제 눈에 보이는 것들을 비출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추억을 간직하기 위해 살아가는 노인의 눈물샘을 자극할 수밖에 없는 대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