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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11화 (1,111/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11화

우효열 (18)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아카데미에서 동고동락했던 이들이 눈에 띄었다.

웃음 지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들, 얼굴을 구기며 돌아다니는 이들, 왠지 모를 기대감에 찬 듯한 이들도 있다.

주변을 대충 둘러봐도 패밀리아에 가입이 내정되어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의 표정 차이가 극명하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혹시나 오퍼가 오지 않을까 하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이들도 보이기는 했지만 아쉽게도 두 번은 없다.

싹이 보이는 이들은 옛날 옛적에 전부 자리가 내정되어 있었으니 사실상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들은 떨거지들이라는 거겠지.

‘몇 달 안에 다 뒈질 놈들이네.’

굶어 죽든, 몬스터들에게 당해서 죽든, 일부 떨거지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다. 시한부 기영이보다 명줄이 더 짧은 녀석들.

게니우스들과 패밀리아의 스카우터들이 집어내지 못한 인재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경우는 높아 봐야 1% 미만.

어째서 조금 더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이들도 있지만 언제나 후회는 늦다.

물론 이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꼭… 꼭 연락해야 돼?”

“몇 번이나 물어보시는 거예요. 청하 누나. 꼭 연락할게요.”

“약속하는 거지?”

“물론이죠.”

“얘 심란해지게 괜히 그러지 말고… 이제 그만하자. 청하야. 기영이 좀 놔줘야지. 인사하겠다고 기다리는 사람들 안 보여?”

“그래도….”

“아마 금방 볼 수 있을 거예요. 누나.”

‘여기는 감동적인 이별이 한창이자너.’

이미 어제 한차례 인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아주느라 팔이 다 떨어질 지경.

계속해서 정리한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 다가오는 어린놈의 자식들을 받아주는 것도 고역이었다.

물론 눈에 눈물이 고여 있기는 하다.

‘이 새끼 또 어디서 쳐다보고 있을지 몰라.’

[꽃과 풍요의 여신♥이 우리 기영이의 행보에 행복이 가득하기를 빕니다.]

[꽃과 풍요의 여신♥이 1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노을빛의 검신♥이 새로운 졸업을 축하한다 박수를 보냅니다.]

[노을빛의 검신♥이 2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노을빛의 검신♥이 드디어 새로운 직업을 창조했다고 말합니다. 노을빛의 성자라는 직업으로, 노을빛의 신성력을 사용하는 사제직군으로서…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가능성과 잠재력이….]

[하늘의 문지기♥가 1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하늘의 문지기♥는 당신이 아카데미 동기들과 보여준 우정,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드는 창의력과 정신을 높이 평가합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언젠가 당신이 로헨의 빛이 되어줄 거라고 중얼거립니다.]

[삐뚤어진 수호자는 당신의 선택이 한심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을 언젠가 후회할 거라 경고합니다.]

[가녀린 촉수여왕♥은 당신이 초심을 되찾을 거라 기대합니다.]

‘얘네들도 그렇고.’

또 하나의 게니우스 우효열도 분명히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까지 워프게이트 근처에서 보이지 않았으니까.

조금 사색에 잠기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시간 따위는 없다. 한승윤의 말대로 이쪽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서 모인 이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기영 님.”

“아! 윌리엄 님 오셨군요….”

“…….”

“굳이 여기까지 찾아오지 않으셔도 괜찮은데….”

“한 신을 모시는 가족이 아닙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해 주시니… 좋은 제안을 거절한 게 계속해서 신경 쓰이네요.”

“아닙니다. 여신님께서도 이기영 님께서는 다른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뜻을 존중해 달라 직접 말씀해 주셨으니까요. 이기영 님이 꽃과 풍요로 오셔서 함께 해줬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그건 제 욕심이겠죠. 하리젤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쪽 대표 패밀리아에게 이야기를 해놓았으니….”

“아!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는데….”

“부디 성의라 생각하시고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에? 아니… 그건….”

“언젠가 꽃과 풍요 패밀리아 하우스에 꼭 들러주신다는 것을 조건으로 말입니다.”

“그,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오퍼를 거절했을 당시 녀석의 섭섭하다는 얼굴이 기억에 남기는 했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띠며 이쪽의 미래를 축복해주는 녀석을 보고 있노라면….

‘이 새끼 물건은 물건인데.’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잘 다듬기만 하면 김현성 정도는 아니더라도 하위 호환 정도로는 키울 수는 있을 것 같았으니까.

‘아냐. 우효한테 집중하기로 했자너.’

잠깐 대화가 끊긴 사이에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온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자 시야에 비친 것은 패밀리아 가녀린 촉수여왕의 마스터와 그녀의 부관.

조금은 부담스러운 복장으로 아카데미를 활보하는 그녀의 모습은 외설스럽기보다는 위험해 보인다.

“저희 패밀리아에도 꼭 한 번 들러주세요. 귀여운 천재 군사님.”

“아! 네. 가녀린 촉수에도 반드시 한 번….”

“후훗. 저희 패밀리아에서 드리는 소정의 뇌물이에요. 아마 기반을 다지는 데에는 충분한 금액일걸요.”

“마스터! 그만하세요. 이기영 님 당황하신 거 안 보여요? 너무 가까이 붙지 마세요. 실례라구요!”

“어머. 귀여워라. 우리 순진한 군사님. 부끄러우셨구나.”

‘자꾸 군사 군사 하니까 그 새끼 생각나자너.’

“거기까지입니다. 이기영 님에게 더 이상의 접근은 불허하겠습니다.”

“윌리엄. 여기서 까지 꼭 이래야겠어요? 우리 천재 군사님이 그쪽에 영입된 대상도 아니고… 졸업 선물까지 막을 정도로 감싸고 돌 권리는 없을 텐데.”

“당신의 존재 자체가….”

“당신은 너무 딱딱하더라. 그러니까 인기가 없는 거예요. 윌리엄 당신은.”

‘가녀린 촉수는 진짜 급할 때 한번 들러야 되겠다.’

“그런데….”

“…….”

“그 맹랑한 꼬맹이와는 어떻게 됐나요? 윌리엄.”

“…….”

“제가 알기로는 꽃과 풍요에서 우효열에게 오퍼를 신청한 걸로 알고 있는데.”

“…….”

“…….”

“거절당했습니다.”

“흔치 않은 일이네요. 꽃과 풍요의 오퍼가 2번이나 거절당하다니.”

‘윌근본 너 우효열한테 오퍼 넣었었구나. 걔… 고쳐 쓰려고 했었어?’

“재능은 확실한 친구라고 생각했습니다. 여신님께서는 탐탁지 않아 하시는 것 같았지만… 충분히 바뀔 가능성이 있을 거라고 판단하기도 했고요. 듣기로는 그 친구 역시 다른 대형 패밀리아들의 오퍼를 모두 거절했다고 하더군요.”

“패기는 좋네요. 아! 우리 천재 군사님 들으라고 하는 소리는 아니에요. 혼자 시작한다는 건 같지만 그쪽은 다른 지원들을 받지 못한 채로 시작할 테니까요.”

“아….”

“어디로 향하는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 아마 어디를 가더라도 제 몫은 해낼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평가가 후하네요. 당신 같은 사람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뭔가 변한 것 같았습니다.”

“네?”

“우효열 말입니다.”

“흐음… 그렇게 쉽게 변할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그런 타입은 변했다고 생각했을 때 결국 뒤통수를 치거든.”

‘쟤 말이 맞아.’

“글쎄요. 두고 봐야 알 일이겠죠. 아무튼… 저는 여기서 실례하겠습니다. 이기영 님.”

“아. 네… 윌리엄 님.”

“부디….”

“네. 마음만으로도 감사해요.”

“오퍼도 모두 거절한 것 같은데… 걔는 여기 뭐 먹을 게 있다고 남아 있는지 몰라.”

“네?”

“우효열 말이에요. 우리 천재 군사님. 아까부터 워프게이트를 서성이더군요. 작별인사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약속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아….”

‘아직 행선지를 못 정했나?’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얘가 그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을 텐데.’

물론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세우는 스타일은 아닐 것이다.

녀석이 1회차에 일어난 일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지 정도는 기억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자신의 적이 어디 있는지, 기연이라 불리는 히든 피스들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곳에서 나비효과가 시작되는지는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갑작스레 등장한 이기영 덕분에 대륙의 판도가 뒤바뀌기는 했지만 히든 피스들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 새끼 혹시… 나 때문인가?’

뭔가 더 볼일이 남아 있나? 갑작스레 나타난 불순물을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뭐가 뭔지는 몰라도 일단은 혼란스럽나?

사실 이기영의 가슴 아픈 사연도 결정타를 먹이기에는 부족하다.

물론 먹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거라 장담할 수 있었다.

당연히 우효열은 이쪽을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생판 모르는 사람이 2년 안에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어 봤자 감흥이 생길 리가 없다.

‘나도 그렇자너.’

저기 멀리 보이는 플레이어 몇 명이 시한부 인생이든 말든 이쪽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설정은 어디까지나 녀석을 밀어붙이기 위한 방법이었고, 이기영에 대한 궁금증과 관심을 계속해서 증폭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자신과는 다른 종류였지만 천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과 관점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길 원했다.

심지어 이 천재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다. 이보다 더 자극적이고 군침 도는 소재가 또 어디 있을까.

처음부터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쉽지만 이미 가진 관심을 끊는 것은 쉽지 않았을 거고….

‘어떡해. 나 때문인가 봐.’

마치 녀석은 아침드라마를 보는 심정으로 이쪽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게니우스 삐뚤어진 수호자나 초승달 아래에서 우는 늑대 같은 놈들과 별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 정도….

‘내 행선지가 궁금한 거야. 이 새끼.’

시한부 천재의 다음 행보가 궁금한 거지? 자기와는 어떤 점이 다른지, 어떤 게 다른지 보고 싶은 거지?

1회차 때 실패한 이유, 어째서 게니우스들이 이기영이라는 인간을 자신의 도우미로 설정했는지 궁금한 거잖아. 그렇지?

첫 번째 단추는 물론이거니와 두 번째 단추도 대충 끼워 맞춘 것 같은 느낌.

어디에선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가녀린 촉수의 마스터와 인사를 나누고 약간의 시간이 흐른 이후였다.

“제기랄.”

“…….”

“괜히 우효열 그 새끼랑 엮여서… 나도 이기영이랑 같은 조였으면 이런 꼴은 안 당했을 텐데 말이야.”

“운이 없었던 거지. 이 동네에서도 될 놈만 되나 봐. 이기영 손 잡은 얘들은 죄다 대형 아니면 최소 중견 패밀리아에 오퍼를 받았다는데. 시발… 우리는 이제 뭐 먹고 사냐. 이대로 길바닥으로 떨어지면 진짜….”

“그러게….”

“정말로 모의전 한 방에 일이 이렇게 될지 누가 알았겠어. 따지고 보면 우효열 그 새끼가 우리한테 브리핑 한 번이라도 해준 적 있나? 지 혼자 주목받기 바빴지.”

“팀을 망친 거야.”

“그 새끼가 우리 전부한테 엿을 먹인 거라고.”

또 패배자 놈들의 자기 한탄 시간이 시작된 모양.

이쪽이 주변에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인지 지들끼리 모여 중얼거리기 여념이 없는 녀석들을 보니 한심해서 한숨이 다 나올 정도였다.

‘뭐 알고나 좀 지껄이지.’

모르는 척 녀석들을 지나치려다 발걸음을 우뚝 멈춘다.

‘이거….’

괜스레 우효열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내면의 시한부 자아가 왈칵하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물론 꽃기영은 녀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녀석에게 고백했던 그대로 이기영은 우효열을 부정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내면 어딘가에서는 그를 부러워하고 존경하고 있지 않을까.

타인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은 채로 자유로운 새처럼 대륙을 살아가는 녀석의 삶의 방식을 인정하고 존중하고 있지 않을까.

내면의 자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당신 같은 사람들에게 무시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녀석은 쓰레기 같고 안하무인이지만 최소한 이런 녀석들이 씹을 거리가 돼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말… 취소하세요.”

“뭐?”

“당신들.”

“…….”

“그 말! 취소하세요!”

“뭐… 우리가 뭐 어쨌다고… 도대체….”

“그 말 취소하시라고요!”

‘일단 이 새끼들을 제물로 바치고 우효열을 소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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