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06화
우효열 (13)
‘무능한 놈들.’
이 쓸모없고 무식한 놈들.
“버티는 것도… 버티는 것도 못 하고 무너져?”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제한된 시간을 버티면서 깃발을 지키는 것 정도야 정말로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 자식이 이런 종류의 전장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는지는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버틸 수 있다고 판단했다.
넓은 전장이 아니라 좁은 전장으로 무대를 제한하여 항전한다면 결국 패배할지언정 최대한 시간을 끌 수 있을 테니까.
그저 시간을 끌어주면 그만인 게임이었다. 저 무능한 놈들은 그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시간만 끌어줬다면 나머지는 전부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병력 간의 수준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아군은 수성한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 어떤 이점보다 전략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이점이었다.
‘그걸 모두 날려 버려?’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애초에 기대조차 하지 않았지만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나 자신의 잘못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함정.”
쫓으면 달아나고, 가까워지면 멀어진다.
자신의 시야 내에 들어온 적 병력은 사실상 이쪽을 불러내기 위한 미끼였다.
속도는 이쪽이 압도적으로 빠르다.
분명히 잡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슬아슬하게 손이 닿지 않는다.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녀석은 이쪽에게 물 수밖에 없는 미끼를 던지고 있었다.
물론 그중 백미는 온몸이 넝마가 된 채로 쓰러진 저 걸레짝이라 볼 수 있으리라.
한승윤.
아헨델의 방패.
시답지 않은 이명이었다. 대륙 변방에 위치에 있는 중소도시를 관리하는 패밀리아의 수장.
메인스트림의 작은 축을 담당하고 있었고, 지역에서는 나름대로 명망 높은 플레이어.
대륙 전체를 기준으로 보자면 보잘것없지만 어느 정도 이름을 날렸다는 점에서는 봐줄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남자.
엄밀히 말하면 이쪽과 연결점이 없다고 봐도 되는 플레이어였지만 자신은 이 남자를 기억하고 있었다.
1회 차에서 아주 짧은 시간 동안 함께 활동한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의 녀석은 아헨델의 방패라고 불리기 전이었고, 이제 막 아카데미를 졸업해 커다란 양손검을 들고 다니고 있었던 때였다.
무뚝뚝한 녀석이었고, 도무지 속을 알 수 없었던 녀석이었다.
동료라고 부르기 애매하기는 했지만 아무튼 간에 파티를 이룬 적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끝이 좋지 않았다는 것도 말이다.
‘그만하자.’
‘…….’
‘더 이상 함께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우효열.’
‘…….’
‘넌 지나치게 독선적이야. 모두가 너를 따라가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다. 마침 너도 팀에 한계를 느끼고 있을 테니… 모두를 위해서 이쯤에서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네게는 더 큰 물이 어울려. 너도 깨닫고 있을 테지.’
“…….”
‘지금까지 말하지 않고 있었지만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거다.’
‘그렇게 하지.’
‘주머니에 조금 더 넣어놨다. 대도시에서 새롭게 시작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거다.’
‘필요 없어. 버러지 자식.’
딱 그걸로 끝이었다. 아쉽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
아쉬운 쪽은 자신이 아니었고, 그들이 중요한 인연이라 생각한 적도 없었으니까. 어디까지나 잠깐 스쳐 지나갔던 인연이었다.
많은 시간이 지난 직후에 만난 녀석이….
‘오랜만이다. 우효열.’
‘…….’
‘그때는….’
‘꺼져.’
‘그래. 미안했다.’
라고 말한 직후에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미안하다는 말도 별 느낌이 없었다. 뭐가 미안한지 알 수도 없었고,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말을 꺼냈는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당시에는 녀석이 말을 걸어온다는 것 자체가 귀찮았었다. 쓸데없는 커뮤니케이션이라 생각했고 얻을 것 또한 없었다.
자신과 녀석의 차이는 극명했으니까. 자신은 위에 있었고 녀석은 바닥에 처박혀 있었다.
몇 시간 후 녀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큰 전투가 있었기 때문이다. 죽은 게 녀석 하나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그중에 녀석도 끼어 있는 것뿐이었다. 그냥 죽었구나, 그 정도로 생각했다.
아무튼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이 한승윤이라는 남자는 이렇게 맹목적으로 누군가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데 충실한 인간이었고 타인을 신뢰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를 욕하는 것은 아니었다. 모든 평범한 인간이 그러하듯, 그 역시 그랬을 뿐이었으니까. 조심하고 의심하고 타인을 경계하고 선을 그었을 뿐이었으니까.
“뭐가 좋다고 실실 쪼개고 있는 거야. 저 새끼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놈 하나 때문에 말이다.
“여기서부터는 못 지나가. 우효열.”
“…….”
“…….”
“그래 너도 변했구나.”
“뭐?”
이름이 뭐였더라?
열한 자루의 검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솔로 플레이를 즐기는 플레이어로 유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른 접전은 없었지만 그녀가 온몸을 피로 적시고 다닌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열한 자루의 검이 피를 너무 많이 머금어 붉은색의 검신을 지니고 있다는 웃기지도 않는 일화도, 전투 중 봤었던 인형 같은 눈빛도… 담담히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얼굴도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다.
‘마음에 안 들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이 병아리들 때문이 아니다. 마치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활을 쏘고 마법을 난사하고 자신의 앞길을 막는 놈들 때문이 아니다.
“날파리 같은….”
“막아! 버텨! 넘어오지 못하게 해! 겨우 하나야! 겨우 하나 남았어!”
“히로세!”
“그래. 지금 보고 있다.”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다. 기억하기 싫을 뿐이지.
몇몇 눈에 띄는 이들은 있다. 몇 번 마주쳤을 뿐이고,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지만 저들 모두가 변했을 것이다.
모두가 한승윤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런 어린애 장난 같지도 않은 모의전에 목숨이라도 버릴 것처럼, 후유증이나 이후의 몸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는 표정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다.
비교적 주목받지 못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녀석들조차 욕심을 내지 않고 있다.
패밀리아의 스카우터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쳐다보고 있을진대, 그들은 자신의 임무를 완료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만 같다.
생각해 보면 꽃과 풍요의 머저리 윌리엄 역시 그랬을 것이다. 녀석도 분명히 변했다.
‘귀찮아.’
귀찮다.
이동하는 곳에는 힘도 실려 있지 않은 화살비가 떨어지고, 몸을 숨긴 곳에는 항마력을 겨우 뚫을까 말까 한 마법들이 쏟아진다.
전위들의 공격은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다. 단순히 길을 막고 있을 뿐이다. 시간을 끌고 있을 뿐이다.
“움직여! 움직여!”
“못 지나간다! 이 새끼야!”
“귀찮다. 이 개자식아.”
가슴에 검이 반쯤 박힌 녀석이 검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1회차에서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병신처럼 죽어 나간 머저리겠지.
발로 녀석을 밀어내자 곧바로 나뒹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지만 신성마법이 녀석을 감싸기가 무섭게 일어나 바짓자락을 붙잡는다.
“기영아!”
“이기영!”
“기영아!!”
모두가 통신 아티팩트를 사용해 외치고 있는 이름이 귓가에 계속해서 앵앵거린다.
“씨발. X 같네. 진짜.”
“막아! 막아!!”
“별 같잖은 것들이….”
“히로세!”
“그래. 내가 막는다.”
“누가 누굴 막아?”
“크윽….”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핏덩이들이… 유치한 장난질에 어울려주니까. 뭐? 너희 버러지들이 나를 막을 수 있을 것 같아?”
전투력의 차이는 크다. 적 병력의 합격진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본능은 익숙해지게 마련이다.
어디에서 화살이 날아올지, 함정마법이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방패를 든 전위와 이쪽을 귀찮게 하는 창병들은 어디에서 진입해 올지, 수 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한다면 바보나 다름이 없다.
“목만 보호해! 애들아! 목! 어차피 안 죽어!”
“언제까지 웃기지도 않는 개수작에! 내가 놀아날 거라고! 이 같잖은 놈들이!”
“당황하지 마요. 누나.”
“…….”
만개하는 신성력으로 몸을 감싼 녀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때였다.
“너….”
“…….”
“너… 이기영….”
지금은 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싶을 뿐이었다.
“…….”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는다. 녀석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이미 아군 측의 깃발이 적의 손에 넘어갔다는 뜻일 테니까.
“모의전이 종료되었습니다. 승리조는….”
예상했듯이 목소리가 들려오고,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기영아!”
“내가 해낼 줄 알았다고! 이길 수 있을 거라고 했잖아!”
“형… 누나!”
“하핫! 이 복덩이야!”
“그건 또 뭐야? 숨기고 있었어? 원래는 검사로 오지 않았었어?”
“이건 어쩌다 보니까 운이 좋아서… 아….”
모두가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껴안거나 머리를 헝클어뜨리는 모습이 시야에 비쳐왔다.
순식간에 장내가 축제가 벌어진 것 같은 분위기가 되었지만 곧바로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 정도나 되는 광역신성마법을 사용한 부작용이겠지. 뻔한 이야기다. 녀석의 그릇은 저 정도의 신성력을 담을 수 없다.
이미 한계를 넘어선 출력.
비틀거리다 쓰러진 것은 녀석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패배감이 몸을 감싸 안았다.
단순히 어린애 장난일 뿐이라고 자신을 위로하지만 지는 것은 익숙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는 위협적이다. 한 차례 회귀를 한 자신에게도 말이다.
‘죽일까.’
따위의 생각을 고민해 볼 정도.
위엣놈들은 그가 자신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말하지만 그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녀석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변수다. 녀석과 만난 놈들은 모두가 변했다. 한승윤, 윌리엄을 비롯해 이름도 모르는 머저리들도 모조리 변했다.
“너 뭐야… 우효열.”
“…….”
녀석을 둘러싼 인형들 모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바로 그때.
무기를 꺼낸 채로 자신을 경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살기가 새어 나간 것 같았다.
팔과 다리를 덜덜 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태세를 마친 모습들. 목숨을 걸어서라도 그를 지키려 하고 있지 않은가.
‘마음에 안 들어.’
그는 자신과 너무 다른 인간이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자신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가….
저 이기영이 빛나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버러지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그가 빛나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조연이고 그가 주연에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
“…….”
“마음에… 안 들어.”
* * *
“…….”
“…….”
“우효열 이 피유우웅신 새끼 이거. 별것도 아니네.”
“…….”
“꽃기영 진짜 임팩트 있기는 했어. 그렇지? 소라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