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03화
우효열 (10)
“부길드마스터.”
“네? 왜요?”
“나갔대요.”
“응? 뭐라고요?”
“소식 못 들었어요? 어제 부길드마스터랑 모의전 한 애들 있잖아요. 길모아랑 걔 측근 몇 명… 결국에는 아카데미 나갔다고 하더라고요. 모의전 끝난 뒤에 몇 시간 동안이나 멍하니 먼 산만 바라보고 있더니만… 결국 퇴소 신청하고 제 발로 걸어 나간 거 있죠?”
“아, 상대 지휘관? 아니, 뭐 그런 것 가지고 나가고 그래? 이것도 다 인생의 한 경험이다, 생각하고 견디면 되는 건데. 그리고 아카데미 졸업도 안 하고 나가면 이 험난한 로헨 대륙에서 어떻게 살아가려고.”
“특히 1분대 쪽 애들은 퇴소율 백 퍼센트 달성했다더라고요.”
“…….”
이건 괜히 미안하자너.
“…….”
‘솔직히 내가 걔네들 입장에 있었어도….’
트라우마 생길 만한 일이기야 했다.
화살이랑 마법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알지도 못하겠는데 계속해서 소란스러운 소리는 들려오지, 지원 요청 하러 오겠다는 애들은 비명 지르면서 나가떨어지지.
큰 부상만 없었을 뿐이지 죽지 않을 정도로 괴롭힌 것이나 다름이 없다.
물론 블러핑인 만큼 외부에서는 그렇게까지 비치지는 않겠지만 적 1분대가 느끼는 감정은 또 다른 법이다.
한소라와 우효열과는 다른 종류의 공포.
거대한 소환수나 이해할 수 없는 무력을 지닌 우효열 같은 경우에도 이질적인 공포를 전달했다 말할 수 있겠지만 본래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공포가 더 효과적인 법이다.
아직 적응하고 있는 인원들도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오늘 이후로는 전투에 전자만 들어도 학을 떼지 않을까.
‘길모어 걔는 그래도 기본은 되어 있던 것 같던데.’
“그리고… 어제 이후로 부길드마스터한테 온 초대장이 100장이 넘네요.”
“음….”
“어차피 꽃과 풍요에 들어가실 거죠?”
“글쎄 솔직히 생각 중이기는 한데… 딱히 어디 패밀리아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봐서….”
“그럼 다른 곳은 전부 캔슬할까요?”
“괜찮은데 다섯 곳만 추려줘요.”
“네.”
‘얘도 은근히 자존심 쎄긴 쎄.’
아침 브리핑을 하는 와중에 한소라 눈이 부어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많이 억울하기는 했나 봐.’
어젯밤에 눈물 좀 쏟은 흔적이 고스란히 보인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누가 지는 걸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와서 패배하게 된 만큼 아마 속에서는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근데… 너무 그렇게 신경 쓰지 마요. 소라 씨.”
“네?”
“걔 회귀자잖아. 숨겨둔 한 수는 있었겠지. 강한 것도 당연한 거고… 그리고 소라 씨가 실전 경험이 너무 없어서 그렇지. 아마….”
“저 신경 안 써요. 부길드마스터.”
‘신경을 안 쓰기는 개뿔.’
“전장이 어떻게 자기가 설계한 대로만 돌아가요? 변수도 있고. 그런 거지.”
“…….”
“…….”
“…부길드마스터는 설계한 대로 하시잖아요.”
“나도 전부 들어맞지는 않는다니까. 그냥 그렇게 보이는 것뿐이지 허점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고 솔직히 그 크리스티앙 그놈. 그 개념 없는 놈만 없었어도 훨씬 할 만했을걸요?”
“그건… 부정 안 할게요.”
‘걔가 좀 너무하기는 했어.’
“아무튼… 부길드마스터는 걱정 안 해도 되나요?”
“글쎄요. 마음 같아서는 찍어 눌러주고 싶은데….”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기본적인 설계는 유리하게 되어 있다. 전술 김현성을 운용하면서 짜증 났던 것들, 짜증 나는 요소들을 내가 그대로 사용하면 확실히 이점을 잡는 것이 당연할 테니까.
진청과 모의게임을 한 적도 있으니 녀석의 수를 그대로 가져오면 되지 않을까.
심지어 우효열한테는 회귀자 사용설명서가 붙어 있지도 않다. 전장의 길을 읽는 본능적인 감각은 보유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 봤자 날뛰는 짐승 한 마리 정도에 불과하리라.
문제는 이 녀석의 덩치가 꽤 커다랬다는 점. 덩치가 커다란 짐승을 사냥하는 데 사용할 커다란 작살이 없다는 것이었다.
“쓸 만한 자원이 하나에서 둘 정도 있으면 괜찮지 않아요?”
“임청하랑… 한승윤 이 두 사람 정도고… 아, 마법사 중에서도 특수교육시킨 마법사 하나 있네. 근데 엄밀히 말해서 우효열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닐걸… 훈련받은 대로만 하면 검 몇 번 부딪쳐 보면서 웅크리고 있는 게 가능하다 정도지, 그마저도 확실하지는 않을걸. 소라 씨도 그랬잖아. 피해 다니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설계한 거 아니었어?”
“네. 그랬죠.”
“나라도 그렇게 했을 거야.”
“제가 틀린 선택을 한 건 아니었네요.”
“응. 틀린 선택은 크리스티앙을 핸들링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고… 나머지는 무난했다고 봐. 나도 중간까지는 소라 씨한테 승기가 기우는 게 확실히 느껴졌었으니까. 아무튼 이제… 큼… 나갈 시간 아니에요?”
“네. 미리 가서 준비하셔야죠. 조원들도 독려하시고.”
“소라 씨도 고생 많았어요.”
고개를 끄덕이며 한소라를 뒤로하고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당연히 사방에서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기영 님! 가녀린 촉수 패밀리아에서 나왔습니다!”
‘너희는 가.’
“이기영 님! 잠시만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신진 패밀리아인….”
“이기영 님! 이기영 님!”
대기실에서 경기장까지 가는 길에 많은 스카우터들이 몰려와 아우성을 치고 있다.
통제가 전혀 되지 않은 상황에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 멤버들이 도움을 주고 있는 중.
마치 보디가드마냥 바싹 달라붙어 팔로 밀려드는 들러리들을 밀치는 모습은 든든하다.
‘그냥 꽃과 풍요에서 활동해 버릴까.’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사이에 조원들 역시 각자의 대기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기영아. 요즘 누나 섭섭해. 아무리 여자 친구랑 만났다지만… 이렇게 찬밥신세 하기야?”
“그런 거 아니에요. 청하 누나. 소라 누나랑은 그냥 친한 사이였다니까요. 무슨….”
“그거 정말이야? 믿어도 되는 거지?”
“그럼 정말이지 가짜겠어요? 혹시 형도 믿은 거 아니죠?”
“물론 나는 네 목소리 말고 믿는 거 없어.”
“승윤 오빠도 어제부터 섭섭하다고 그랬잖아요! 자꾸 기영이 뺏기는 거 아니냐면서….”
“아니, 내가 언제….”
“어제 모의전 끝나고 곧바로 그런 말 했었거든요.”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면서 통로를 지나친다. 그렇게 통로를 빠져나오고 무대에 등장했을 때 쏟아지는 환호성 소리.
“우와아아아아아아아!!”
‘무슨 스포츠 경기 보러 왔나 봐.’
병아리들이 펼치는 모의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인파가 몰려 있다.
좋아하는 스포츠팀이라도 응원하는 것처럼 여기저기에서는 커다란 응원 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몇 명 대형 패밀리아들도 자신들의 체면을 잃은 채 박수를 보내오기는 마찬가지. 아마 그 정도로 이 모의전을 기대하고 있음이 틀림없으리라.
당연히 게니우스들 역시 난리가 난 상황이었다. 누가 보면 메인스트림급의 이벤트라도 펼쳐진다고 착각하고 있지 않을까.
“이기영! 이기영 사랑해!!”
“기영아! 누나가 너 많이 아낀다! 기영아!!”
“기영아!”
“이기영은 천재라고! 귀족이라고!”
역시 사람이 컨셉이 중요해.
기행. 모의전이 시작하자마자 산책하듯 맵을 거닐었던 그 쇼에 감명을 받은 팬들이 소리치는 모습이 들려온다.
주목을 받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애초에 조금 더 이쪽을 주목해 주기를 바랐기 때문에 기획한 퍼포먼스였고 결과는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찜찜한 승리를 얻은 우효열과 비교할 것도 없이 모의전 4강전의 최대 수혜자는 이기영이었다.
‘화제성 장난 아니잖아.’
기품이 느껴지는 걸음걸이 때문에 더 그랬을 거야.
혁명 전 교국에서 그렇게 연습한 귀족 걸음이 이렇게 쓰일 줄은 누가 알았을까.
이기영의 상품 가치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우효열은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할 테고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도무지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놈에게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우리 쪽 내부 정리도 해야 했으니까.
“다들 떨리세요?”
“왜… 왜 안 떨리겠냐. 기영아. 지금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어, 어제랑 분위기가 너무 다른 거 아니야?”
“평소대로, 훈련하신 대로 하시면 돼요.”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면….”
“제가 처음에 그랬잖아요. 누나. 확신이 없으면 저를 믿어달라고요.”
싱긋 웃는다. 50명에 달하는 조원들 모두를 바라보며 말이다.
“어차피 모의전이에요. 이 대륙에 플레이어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이상 겪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예요. 진짜 적들과 싸우는 것도 아니고, 정말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도 아니라고요. 형, 누나들이, 여러분들이 보여줄 수 있는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시험무대라고 생각하자고요.”
꿋꿋하고 활기차게.
이기영은 천재지만 자신이 천재인지 모르는 순수한 아이.
아직은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듯이 모두를 바라보며 파이팅을 외친다.
하지만 적잖은 사람들은 눈치채고 있을 것이다.
꽉 쥔 주먹을 소심하게 들어 올린 이기영의 팔이 덜덜 떨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기영도 사람이다. 20대 초반에 영문도 모른 채 로헨 대륙에 끌려와 서로에게 칼과 검을 겨누어야 한다.
게다가 그는 수많은 사람들 압박과 기대감 속에 있다. 조원들을 책임지고 그들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등에 지고 있다.
어째서. 어째서 기영이가 떨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어째서 이 어린 천재가 언제나 당당할 거라고, 언제나 침착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지?’
확실한 거지? 동정해 주고 있는 거지?
“청하 누나.”
“응.”
“승윤이 형.”
“그래.”
“메르켈 누나.”
“응. 기… 기영아.”
“히로세 형.”
“그래. 인마.”
짧았지만 길다. 그동안 함께 훈련하고 이 모의전을 준비했던 인연들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준다.
물론 중간부터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아 마음의 눈을 켜고 부르기는 했지만 모두의 눈에는 무언가를 이루고 싶어 하는 욕망이 가득하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위해 밤이 새도록 노력해 준 작은 기영이를 위하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한 톨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제 말을 믿기 힘드셨을 수도 있고, 제 말을 굳이 따라야 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함께해 주셔서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했어요.”
“이 자식 너… 너 왜 그러냐. 모의전 끝나면 안 볼 것처럼.”
‘안 볼 건데?’
“네?! 아니,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허둥지둥 기영이 매력 발산.
“됐다. 농담이다. 인마. 설마 네가 우리를 버릴까. 하핫. 우리야말로 너한테 고마운 마음밖에 없다. 오히려 너무 혹사시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야.”
“형….”
“승윤이 오빠 말이 맞아. 네가 우리한테 감사할 게 아니라. 우리가 너한테 감사해야지.”
“청하 누나.”
“고맙다. 얼마나 많은 걸 배웠는지 모른다. 검술이나 이런 것뿐만이 아니다. 너를 보고 삶에 대해서도… 올바른 시선으로 이 대륙을 바라본다는 것에 대해서도… 나 자신에 대해서도 배운 게 너무나도 많다.”
“히로세… 히로세 형까지.”
“담담한 척하지만 제일 불안한 건 너라는 거. 모를 줄 알았니? 얼마나 이번 모의전을 걱정했는지도 알고 있고 말이야. 우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조금은 짐을 내려놔도 돼. 적어도… 적어도 이번에는 우리가 너를 위해서 싸울 테니까.”
“모… 모두들….”
눈물 왈칵.
모두가….
모두가 하나가 될 수밖에 없었던 타이밍.
그 열의와 다짐이 너무 뜨거워 마음이 데일 것처럼 느껴진다.
‘사기가 올라왔다.’
이런 텐션이라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뛰어넘는 활약을 보여줄 수도 있으리라.
“괜히 울먹이지 마라. 녀석.”
‘시바. 머리 좀 쓰다듬지 말라고.’
“네가 그렇게 걱정하는 저 양아치는… 나랑 청하가 목숨을 걸고서라도 막아볼 테니까.”
한 명, 한 명씩 마치 행운의 부적이라도 만지듯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는 상황.
이 감동적인 상황에서… 어수룩한 천재는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