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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102화 (1,10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102화

우효열 (9)

‘질 거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어.’

분명히, 지는 게 당연하다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그야 어쩔 수 없는 일이리라. 이기영에 대한 정보는 없었지만 이곳에 도착한 이후, 그에 대한 이야기를 질리도록 들어왔었으니까.

물론 이기영과 한소라가 지구에서 미래를 약속한 연인이었다는 시답지 않은 소문이 아니었다.

메인스트림 초보자의 시련에서 20만점 이상을 획득해 1위에 랭크 된 플레이어, 2위였던 한소라, 3위였던 우효열과도 압도적인 격차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패밀리아 꽃과 풍요에서도 매일같이 그에게 러브콜을 보내오고 있는 중.

실제로는 소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지만 꽃과 풍요와 함께 상석에서 모의전을 관람하고 있는 그를 보고서는 그 소문이 오히려 축소된 것임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패밀리아의 리더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미 다년 차에 접어든 이들이 시중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이미 꽃과 풍요의 자리 잡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껴진다.

말인즉슨 이기영이라는 플레이어는 이미 그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그의 숨겨진 한 수가 무엇이든 간에 대형 패밀리아 꽃과 풍요는 그를 인정했다.

이제 고작 튜토리얼을 졸업해 아카데미에서 지내고 있는 플레이어가 이 대륙에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상황, 어떻게 감히 자신들이 이길 거라 생각하고 있었을까.

‘우효열, 한소라.’

바로 직전의 그 둘의 모의전을 봤기 때문에 자신감은 더욱더 내려가 있는 상태였다.

이미 레벨이 다른 플레이어 둘.

한 사람의 힘이 전장에 얼마만큼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지 않은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방식으로 이 무대에서 내려가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다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네. 제기랄.”

시작하기 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조원들을 독려했던 전사는 자조적인 말을 내뱉고 있다.

“…….”

결과가 좋지 않을지언정 모든 힘을 쏟아붓는다면 노력한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외친 궁수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50명에 달하는 조원들이 모두 허망하게 자신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저들이 받은 충격이 자신만 할까. 이번 모의전에서 지휘봉을 잡은 자신 만큼 충격을 받지는 않았으리라.

전직 장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총대를 잡기는 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대원을 관리하는 일이나 군사 연습, 여러 가지 합동 훈련으로 전쟁이라는 것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대전과 로헨 대륙에서의 전투가 다르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병력을 이용해 전투를 벌인다는 그 골조는 변함이 없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천지 차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 강점을 살려야 하고, 발버둥이라도 쳐야 했기 때문에 많은 준비를 한 것은 당연했다.

모의전의 무대, 맵이 나온 순간 그 맵의 특징을 파악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한다.

이는 자신만의 강점이었다.

부대원들을 어떻게 배치할 것인지, 배치한 깃발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방어할 것인지, 적 진지를 예상하고 그 진지를 어떻게 공략할 것인지.

자신이 이런 방면의 천재는 아니었지만 일반인들과 비교한다면 압도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계획이 틀어진 것은 한소라 조와 우효열 조의 싸움이 시작되고 난 이후였다.

‘맵이 바뀌었어.’

정확히 말하면 맵은 그대로였지만 환경이 바뀌었다. 한소라가 소환한 소환수와 그녀가 펼친 마법 덕분에 건물이 깡그리 쓸려나갔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계속해서 전투가 펼쳐지며 각 마법사들이 맵에 끼친 흔적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본래 움직이기로 약속한 루트가 봉쇄되었으며 움직일 수 없는 길이 뚫리게 됐다.

간이로 만들어진 모의 훈련장인 만큼 지형이 변한 경우도 있었고, 작은 도시는 폐허가 되어버렸다.

진지로 사용할 곳은 사라지고 대신 커다란 벽이 생겨난다.

심지어 우효열과 한소라의 마지막 격전이 펼쳐진 장소는 엄폐할 수 있는 장소도 찾을 수가 없었다.

깡그리 박살이 나버려 일종의 진입 금지 구역이 된 것이다.

한 가지 위안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저쪽 역시 자신들과 같은 상황이었다는 것 하나.

하지만 그것 역시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다.

[전장 속의 호화로운 안식처는 운이 따라주지 않아 유감이었다고 당신을 위로합니다.]

[청렴한 녹색 빛의 칼날은 수준 차이가 나는 모의전이었다며 당신을 한심스럽게 바라봅니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아직도 몇 분 전에 일어난 일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몇 시간도 아니고 몇 분 전에 일어난 일이다.

‘움직여. 움직여!’

모의전이 시작된 순간, 각 구역으로 빠르게 이동한 것부터 시작하고….

영문도 모른 채 1분대가 적의 습격을 받았다.

‘1분대 교전 중 2분대에 지원 요청한다! 지원 요청!’

‘마법 지원해! 마법 지원!’

지원 요청을 한 2분대는 상대 원거리 마법에 리타이어.

어디에서 날아오는지 이해하지 못한 원거리 마법, 아니, 원거리 마법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2분대는 자신들을 노린 마법이 어디서 날아왔는지 알고 있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수준 높은 마법사가 없는 만큼 마법사가 50미터 이내에 있다고만 짐작할 뿐이었다.

‘2분대 생존자… 있나? 있으면 3분대에 합류하라.’

‘합류하겠다.’

이미 1분대는 적에게 고립되었다고 생각했다. 1분대를 지원하기 위해 온 2분대가 함정에 빠졌으니 1분대를 버리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일지도 모른다. 아마 모두가 자신처럼 생각했을 것이다.

‘1분대 계속해서 교전 중! 지원 요청 바람! 지원 요청!’

하지만 이는 모의전이다.

‘이대로 버릴 거야? 길모어?’

‘버리는 게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따르겠지만, 이건 아니라고 본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고 있지? 지금 위에서 보고 있는 놈들 때문에라도….’

지금 위에 있는 패밀리아들이 이걸 보고 있다면 무슨 생각을 할까.

목적을 우선시하는가. 동료를 우선시하는가. 그 누구도 동료를 버리는 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건 함정이다. 그렇게 느끼면서도 범의 아가리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분명히 그리 판단했을 것이다.

‘1분대… 교전 중이다. 계속해서 교전 중이야! 지원군은 어디에 있나!’

‘1분대 퇴각! 퇴각해!’

‘제기랄 퇴각할 수가 없다고! 사방이 적이야!’

‘인원이 몇 명인지….’

‘보이지 않는다고! 제기랄! 공격을 막아내는 게 고작이야.’

‘어떻게든 퇴각해라! 9번 진지로 이동해!’

갈 수 없어.

조원들을 모조리 죽이는 꼴이다. 마치 함정이라고 광고하는 듯한 블러핑. 1분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전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교전 중이라고 들려오는 메시지는 누가 보기에도 자신들을 불러내기 위함이었다.

‘1분대는 버려. 작전은 그대로 진행한다.’

‘뭐?’

‘내 선택이야. 혹시 이걸로 입단할 때 문제가 생기거든 날 팔아먹어. 지금 1분대를 도우러 가면 전멸이다. 치졸한 수야. 아마 모두가 너 같이 생각했을 거다. 펠릭스. 패밀리아 관계자들이 보는 앞에서 동료를 버리는 꼴을 보여줄 수 없다는 심리를 이용한 개수작일 거야.’

‘난 모르겠다. 아무튼 믿는다. 길모어.’

적의 병력은 1분대에 집중되어 있다라고 판단했지만.

그것마저도 속임수.

‘적이 깃발로 진입한다.’

이미 적은 자신의 본진 앞까지 당도해 있다.

어떻게? 아직도 그게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도대체 적이 어떻게 우리 쪽 깃발에 닿을 수 있었던 걸까.

‘제길 5분대가 수비해! 최대한 끌어 병력은 우리가 우위다. 우리도 적의 진지로 달린다. 최단거리로.’

라고 명령을 내리는 순간 화살이 쏟아져 내렸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적이 몇 명인지, 자신들이 누구와 상대하고 있는 건지 처음부터 끝까지 알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상대의 몸과 얼굴을 확인하지도 못 한 채로 병력이 말라 죽었다.

1분대는 계속해서 교전 중이라는 말만 띄웠을 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2분대는 1분대를 지원하러 가는 도중에 리타이어.

3분대는 적의 진영으로 진입하는 도중 화살에 맞아 반파됐고.

4분대는 3분대와 함께 무대에서 내려갔다.

5분대는 끝까지 깃발을 지키기 위해서 항전했지만, 그들이 무엇을 대상으로 항전한 것인지는 여전히 수수께끼다.

6분대는 후방에서 전위들의 습격을 받았다. 오직 그들만이 적 병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7분대는…….

8분대는…….

9분대는…….

뭘 보여줄 수도 없었다. 호기롭게 시작한 것과는 달리 거의 모든 병력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적이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숫자는 정확히 5명. 그 다섯 명 말고는 아무도 적의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웃기게도 마지막 즈음에 이기영의 모습을 확인하기야 했다.

조용히 폐허가 된 모의전 도시를 거니는 모습으로.

귀족적이고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모습은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꽃과 풍요의 패밀리아의 내정된 안주인이라는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비현실적인 외모로 그는 미소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가 무엇을 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검을 들지도 않았고 전투준비를 하지도 않았다.

갑작스레 나타나는 적이 없을 거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자신을 노리는 이들이 없을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사방이 훤히 노출된 공간에서 산책이라도 하듯 유유자적하게 걷는 행위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

그의 팀의 깃발에서, 우리 팀의 깃발까지, 모의전이 시작된 순간부터 그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으리라.

그렇게, 그는 그렇게 아무도 없는 적의 진지로 들어가 깃발을 집어 들었다.

마치 왕위를 찬탈하려고 하는 것 같은 망국의 왕자처럼 그가 깃발을 집어 드는 모양새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

고작 깃발일 뿐이다.

집어 든 것이 고작 깃발일 뿐인데도 이런 이상한 표현을 생각나게 할 정도로 그의 기품이 느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들.’

마치 이기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한 목소리.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 거야.’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다.

맵을… 맵을 통째로 외우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해서 변하고 있는 맵을 통째로 머릿속에 때려 박은 것이리라. 자신들에게 보이지 않는 루트로 움직일 수 있는 길을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하잖아… 씨발… 이건… 이건 너무하잖아.”

한소라와 우효열의 모의전이 진행되면서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변형되고 있는 맵을 통째로 외워서 적에게 발견되지 않는 루트를 만드는 것이 가능할까.

변형된 맵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3시간 정도밖에 없었다. 이 세 시간 내에 맵을 통째로 외워 작전을 새롭게 만들 수 있는 것이 진정 가능한 일일까. 그의 눈에는 맵핵이라도 달려 있단 말인가.

“이딴 게… 무슨….”

변수조차 만들지 않을 정도로 자신이 본 맵을 어떻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수 있는 구멍이나, 조원들이 은폐할 수 있는 공간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신들의 눈에 띄지 않고 깃발로 이동할 수 있었고, 어떻게 자신의 작전에 확신할 수 있었을까.

조용히 미소 지으며.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남자는.

“수고하셨습니다. 길모어 님.”

천재라는 수식어조차 부족하게 느껴지는 괴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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