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101화
우효열 (8)
“모의전의 규칙은 간단합니다.”
‘깃발 뺏기네.’
“간단히 정리하자면 각자의 진영에 있는 깃발을 먼저 손에 넣는 팀이 승리하게 되는 룰입니다. 물론, 조원 전원이 전투 불능일 경우에도 모의전이 종료됩니다. 맵은 사전에 고지드렸던 그대로이며, 기본적으로 블루팀 레드팀의 장비는 아카데미 쪽에서 지원합니다. 사망자가 생기지 않도록 사제와 교관들이 대기 중이며, 여러분들이 걸고 계신 목걸이에는 치명적인 공격을 받았을 때 발동되는 보호막이 내장되어 있습니다. 절대로 목걸이를 풀지 않을 것을 당부드립니다.”
“각 조의 조장은.”
“우효열.”
“한소라입니다.”
“진영은 동전 던지기로 결정하겠습니다.”
“좋아요.”
‘암만 봐도 단순한 아카데미 이벤트가 아닌데.’
교육기관이 그냥저냥 지나가듯 진행하는 모의전이라기에는 그 규모가 지나치게 커 보였다.
물론 로헨 대륙의 특성상 이런 현상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으리라.
기본적으로 관심이 끌리고 주목도가 높은 이벤트들은….
‘윗놈들 관심을 끌 수 있으니까.’
자본이 모이고, 인원이 모일 수밖에 없다. 대형 패밀리아들까지 발을 들인다면 아카데미 내에서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진행할 수가 없다.
타 아카데미까지 끌어들인 것은 아마 그쪽 아카데미의 자본을 합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본래 있었던 형편없는 훈련장 대신 자리한 것은 실제 맵을 구현해 놓은 듯한 전장.
로헨 대륙의 시가전을 컨셉으로 한 것인지, 건물들이나 나무 같은 오브젝트들도 제대로 구현되어 있었다. 갑작스럽게 투입된 인부들이 게거품을 물지 않았을까 걱정이 다 될 정도로 말이다.
그 가운데 한소라와 우효열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식당에서 우효열 좀 불러오라고 그렇게 외친 녀석이 원하는 그림이 바로 이런 그림이 아니었을까.
‘멋있기는 하자너.’
언제나 그렇듯 아카데미 일짱들의 대결은 설레이는 법이다. 심지어 자기 세력들도 끌고 왔단다.
‘시청률이 안 올라갈 수가 없다니까.’
우효열은 다소 한소라를 내려다보고 있는 모양새.
한소라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조용히 녀석을 올려다보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얼마나 진지한지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한소라의 스펙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다. 대륙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마법사였고, 흑마법사로는 아마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
어처구니없게도 그녀의 약점은 실전경험이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싸울 일이 없었자너.’
말 그대로 그녀가 일선에 나설 만한 일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다.
보통 파란 길드원들이 분기별로 나가는 원정에도 항상 열외되었던 상태, 알프스마저 흰둥이와 함께 파란 길드의 이름으로 원정을 다녀왔다는 걸 생각해 보면 한소라가 얼마나 특수한 경우인지 알 수 있으리라.
애초에 일이 터지면 전략마법을 한 번 사용한 이후에 복귀하는 것이 그들의 주요 업무, 한소라는 정하얀과 함께 대형 마법진을 그리거나, 함께 전략마법을 외우는 것이 끝이었다.
어떻게 보면 효율적인 일 처리였다.
굳이 마법사가 전열에 나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미 정하얀의 수준은 전위들에게 보호받아야 하는 캐스팅을 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순간이동 주문을 활용한다면 마법을 적의 진지 앞에 배달시키는 것도 가능했으니까.
‘이러니까 원정을 나갈 일이 뭐가 있겠어.’
병아리 시절에 던전을 몇 번 뛰어봤다지만 그건 말 그대로 병아리 시절일 뿐이었다.
물론 한소라의 재능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상대가 평범한 상대였다면 걱정하지도 않았을 테고….
비서 시절만 생각해 봐도 전술 이해도가 상당한 수준이었으니까. 하지만….
“상대가 조금 안 좋을 수도 있겠네.”
병신이라고 해도 회귀자는 회귀자다. 녀석은 김현성과 비슷할 정도의 경험을 가지고 있고, 그 경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재능도 갖추고 있다.
약점은 지휘봉을 잡아본 적이 없었다는 것 정도, 기왕이면 방심하거나 대충 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녀석이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미 확인하지 않았던가.
타인과 소통하는 것을 싫어하는 만큼 녀석을 중심으로 특별한 조별 훈련 같은 것을 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함께 싸우는 이들이 어떤 이들이고, 뭘 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지휘봉을 잡은 것은 우효열이 아니다. 아마 녀석 역시 우효열을 프리로 쓸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허벅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고 있을 때였다.
“이기영 님은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아! 윌리엄 님 오셨군요.”
그 정체는 최근 자주 만났던 윌근본. 평소처럼 미소를 띠며 슬그머니 자리에 앉는 것이 눈에 띄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밀린 업무를 처리한다는 게….”
“아니요. 늦지 않으셨는데요. 제가 조금 일찍 온 것뿐이에요. 오히려 제시간보다 더 빠르게 도착하신 것 같은데… 그보다 윌리엄 님. 초대해 주셔서 오기는 했지만… 제가 여기에 앉아 있어도 되는 건가요?”
“네. 물론입니다. 자리를 옮기는 것뿐입니다. 아카데미에도 잘 말씀드렸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새끼도 은근 영악하네.’
많은 갤러리들과 패밀리아들이 모여 있는 자리. 꽃과 풍요가 앉아 있는 상석에 내가 함께 앉아 있다는 것을 모든 패밀리아들에게 광고하는 자리나 다름이 없다.
이기영은 꽃과 풍요가 침 발라놨다고 공표하는 것이다.
웬만하면 대중들 앞에서 이런 자리에 앉아 있는 걸 지양하고 싶었지만….
‘아카데미 학생들 자리는 너무 불편하자너.’
그리고 여기는 말만 하면 다 척척 나오니까.
“혹시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그럼 커피 한 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네.”
윌근본 녀석이 꽃과 풍요의 인원에게 손짓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윽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내 손에 짠하고 나타나는 커피.
“고마워요. 켈트.”
“당연한 일입니다. 이기영 님.”
심지어 맛도 좋다.
시트도 푹신푹신하고 다과도 먹고 싶으면 주문할 수 있게 되어 있자너.
“아! 그러고 보니 아까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못 드렸네요.”
“네.”
“이 모의전의 향방이 어떻게 될지 물어보셨나요?”
“네. 그렇습니다.”
“윌리엄 님은 어떻게 보시나요?”
“개인적으로는 우효열 쪽에 걸고 있습니다.”
“아… 역시.”
“예. 한소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미 그는 일반적인 레벨 3이라고 부를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으니 말입니다. 갤러리들이 많으니 어느 정도는 본신을 숨길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효열 쪽에 손을 들어주시는군요.”
“네. 이기영 님께서도….”
“아. 저는 반반이라고 보고 있지만….”
‘사실 소라를 응원하고 싶기는 해.’
실제로도 승산이 있다고 본지만….
아마 한소라의 팀원들이 그녀를 따라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이론이나 전술을 알고 있더라도 그걸 시행하는 플레이어들이 따라주지 않는다면 썩을 수밖에 없다.
마음의 눈으로 장기 말들의 활동량과 스펙, 성향을 실시간으로 확인 하는 이쪽과는 차이가 크다.
심지어 팀원 중 병신이 한 명 끼어 있다면 공든 탑이라도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저 크리스티앙이라는 애가 조금 그래.’
“14번이 조금 불안하네요.”
“14번이… 파블로 크리스티앙이로군요.”
“긴장한 것도 눈에 보이고….”
이기영의 등장으로 자기 포지션 빼앗길까 봐 전전긍긍 앓고 있다고. 어떻게든 소라 누나한테 사랑받고 싶어서 무리수 던지는 그림이 너무 뻔하게 나올 것 같아.
전열이 무너진다면 마법사의 몸으로 전사와 대치해야 한다. 스펙이 너프된 한소라로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니나 다를까 잘 진행되고 있는 모의전에 과감하게 움직이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
‘내가 저럴 줄 알았지.’
갤러리들 중에 저 14번이 명령에 불복종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잘 맞춰지고 있는 화음에 끼워져 있는 불협화음 하나.
14번이 만들어 낸 조금의 욕심이 녀석을 우효열과 마주치게 한다.
백업을 해줄 수 없는 위치에서 일어나는 전투는 한소라가 피하고 싶어 하는 전투.
“네가 우효열이냐?”
“뭐야. 이 병신은 또.”
“이야아아아아아!!”
적장의 목을 베어 한소라에게 바치고 싶어 하는 충신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녀석은 술이 식기도 전에 리타이어한 채로 널브러진다.
이를 악문 한소라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는다.
병력들은 미리 약속된 것처럼 움직이고 상대의 병력을 막으며 갉아먹는다.
우효열과 마주칠 만한 전투를 최대한 회피하며 압도적인 마법 전력을 바탕으로 원거리 폭격을 쏟아붓는다.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기예였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우와아아아아아아!!!”
“뭐야! 방금! 뭐야?”
한소라의 주문이 튀어나오자 몸을 벌떡 일으키는 놈들이 눈에 띌 정도.
로헨 대륙이 가지고 있는 마법 상식의 틀을 깨버린 것인지, 관련 패밀리아에서도 군침을 흘리며 한소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윌리엄도 다르지 않다.
“그녀 역시… 천재로군요.”
‘아냐. 솔직히 말하면 쟤는 천재는 아니지.’
한소라는 노력가다. 조혜진도 혀를 내두를 정도의 노력가.
마력 회로가 망가지자 연금술로, 연금술에서 빛이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자 흑마법으로.
얘는 웬만해서는 포기하는 일이 없다. 그 바쁜 상황에서도 마도서를 놓은 적이 없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었을 때도 포기한 적이 없다.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전위들을 잃고 우효열과 마주친 상황에서도….
“소환수?”
“허. 저렇게 수준 높은 소환수를… 고작 튜토리얼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방금 트리플 캐스팅한 게 맞나요? 아무리 간단한 마법이라지만….”
“…….”
“현 대륙에서 트리플 캐스팅이 가능한 마법사가 몇 명이죠?”
“열이 되지 않을 거요.”
‘잘 싸우기는 진짜 잘 싸운다.’
인상이 구겨진 쪽은 우효 녀석 쪽이었다.
깔끔하게 승리를 가져가고 싶었겠지만 커다란 소환수 한 마리와 계속해서 자신을 방해하고 있는 마법의 벽을 넘기 힘들다.
본래대로라면 마법사의 품에 파고드는 것은 쉬웠을 터였다. 정확히 녀석과 한소라가 마주친 시점에서 10초 안에 승부가 났어야 했다.
무려 4분 이상 펼쳐지고 있는 전투. 결국에는 한소라의 마력이 떨어진 시점에 모의전이 종료됐다.
아쉬워하는 한소라의 얼굴이 보인다. 분한지 이를 악물고 있는 얼굴로 바닥을 내려치고 있는 모습.
그 사이로 우효 녀석은 대기실로 들어가 버렸고 귀가 찢어질 듯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좋은 전투였습니다. 이곳에 있는 패밀리아들도 배울 점이 많았을 정도로 말입니다. 모두 이기영 님의 말씀대로였군요….”
“…….”
“이제 세 시간 뒤에….”
“네. 저도 예선전 준비하러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오늘 초대해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윌리엄 님.”
“아닙니다. 저야말로 초대에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럼….”
“…….”
“응원하겠습니다.”
굳이 응원할 필요가 있겠어?
어차피 결과는 뻔한데.
엑스트라들을 상대로 모의전을 보여주는 건 귀찮지. 가지고 있는 걸 전부 다 보여주기도 그렇고.
그냥 맛만 보여주면 알아서 달려들지 않을까.
“…….”
“…….”
이윽고,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당황한 듯한 교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승… 승리한 팀은… 북쪽 아카데미의 A조… 입니다.”
“…….”
“결, 결, 결… 승전은 내일 같은 시각에….”
“…….”
“승자 조의 팀장인… 이기영… 교육생은….”
한소라와 우효열의 모의전 때와는 다르게 완전히 적막에 휩싸인 갤러리들.
방금 자신들이 본 게 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윌리엄마저도 턱이 빠진 것처럼 입을 벌리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올 정도였다.
“어떻게….”
“…….”
“어떻게… 이런 걸 할 수 있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