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74화
피크닉 (37)
‘누가 제발 저 새끼 좀 끌어내. 진짜.’
“제가… 제가 어떤 심정인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기영 씨는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모를 리가 없습니다.”
“…….”
“너무하십니다. 정말로… 정말로… 제가 왜 그랬는지 이해해 주지 못하시는 겁니까. 어떻게 알면서….”
진짜 도망치고 싶다.
‘시바.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다.’
즐거운 연회장에 갑작스레 취객이 난입한 상황. 그것도 보통 취객이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문제 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본래 어디서든 간에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이런 놈들이 하나씩 등장하게 마련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 연회장이나 파티장에서 일어나는 트러블을 해결하는 걸 즐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도저히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 새끼 왜 이래? 진짜?’
술에 취해도 그냥 취한 것이 아니다. 제대로 걷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지경, 아니, 애초에 김현성의 육체로 술에 취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성으로 만들어진 독주도 아마 녀석을 취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마력으로 술기운을 몰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떡이 되어버렸다면 놈이 스스로 취하는 것을 원했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맨정신으로는 자신의 심정을 말할 용기가 없으니 취하자고 스스로가 작정한 것이다.
이미 나에 대한 섭섭함과 자신의 억울함을 말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얼굴을 붉어질 대로 붉어져 있었고 눈은 세상 억울함을 다 가진 모양새를 하고 있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참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턱과 몸이 덜덜 떨리는 것이 용기를 내기는 한 모양, 억지로 울음을 참으며 내가 너무 하다고 호소하고 있으니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시바. 분위기 완전 개판 됐자너.’
“기영 씨… 기영 씨이… 대답해 주세요.”
‘진짜 진상이다. 진짜루.’
“대답해 주세요… 기영 씨에게 저는 뭡니까. 이렇게… 이렇게….”
‘네가 뭐긴 뭐야. 시바. 김현성이지.’
“이런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 얼마나… 앞으로는….”
이 새끼 다른 길드원들한테 다 불어버리는 거 아니야?
계속해서 두서없는 말을 지껄이고 있으니 녀석의 입에서 어떤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두려움이 생겨나는 것도 당연지사.
하지만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현재 김현성의 입에서 나온 말을 귀담아듣는 길드원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착한 엘레나마저 슬그머니 이 소동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안기모 같은 경우에는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라는 듯이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새끼. 너무 얄미워.’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는 스미스 대령이 뭔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길드에 가입한 걸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시바.’
불행 중 다행이라면 정하얀이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
혹시나 김현성의 말에 뭔가 일이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한소라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새끼 아주 안하무인이야. 이제 진짜 보이는 게 없나 봐.’
“기영 씨!”
“거, 형씨. 너무 취한 것 같은데… 잠깐 진정 좀 하쇼. 좀 흥분하기도 했고.”
“놓으세요! 오늘은 꼭 기영 씨에게 말을 해야겠습니다. 할 말은 해야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너무 마신 것 같다니까! 이 좋은 날에 도대체 왜 이러는 거요? 이러지 말고 우리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허심탄회하게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거, 둘이 나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형님이 당황하고 있잖소. 신입들도 보고 있는데 이러면 쓰나.”
“덕구 씨 말대로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길드마스터. 조금 취하셨습니다.”
“덕구 씨… 혜진 씨….”
“네?”
“오늘은 기영 씨한테 말해야겠습니다.”
“거, 오늘만 날인가! 자자! 얼른 들어가자니까. 많이 취했소.”
그나마 박덕구와 조혜진이 저 폭주기관차를 말리려고 했지만….
“저… 취하지 않았습니다!”
‘취했어.’
“취해서 이러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제가 취할 것 같습니까? 저! 취하지 않습니다.”
“아니, 취했다는 게 아니라. 그냥 오늘 좀 안 좋아 보여서 그렇지… 이러지 말고 한 잔 더 하고 싶으면 거 나한테….”
“기영 씨! 기영 씨!”
이미 김현성의 핸들은 고장 나버린 모양이다. 일단 조박 듀오가 김현성을 막고 있기는 하지만 쟤네들도 김현성을 막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신입 길드원들이야 그냥 이 불똥이 자신들한테 튀지 않기만을 바라는 것 같고.
‘어쩔 수 없자너.’
결국은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기영 씨! 비키세요! 혜진 씨! 기영 씨가….”
근데 이 새끼 말이 통할 것 같은 상태가 아니긴 해.
물론 한 차례 욕을 먹이면 정신이 바짝 차려지기는 할 것이다.
‘아니야. 정신 못 차릴 수도 있어. 깽판 치려고 작정한 놈이자너. 평소랑 달라.’
왜 술을 마셨겠어? 이 새끼 분명히 내가 화낼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거야. 맨정신으로는 말싸움 못 할 것 같으니까. 술기운 빌려서 한번 싸워보자는 거라고.
평소의 김현성이었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화난 이기영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술이라는 방패를 들고 전장으로 향한 것이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 화를 내는 것은 역효과. 녀석은 숙이는 것이 아니라 칼을 빼 드는 것을 선택했고, 그 선택을 위해 자기 무장까지 마친 상황.
달래느냐, 맞서느냐의 선택지 중 더 합당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전자라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기영 씨….”
“왜 그러세요?”
“기영 씨가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일단 자리를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신입들이 수군수군대자너. 이게 뭔 상황인지 무서워하고 있자너.
길드의 두 기둥이 이러고 있으면 쟤네가 뭐라고 생각하겠어. 애들 보기 부끄럽지 않아?
“싫… 싫습니다.”
“…….”
“여기서 말할 겁니다. 기영 씨.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에요.”
‘네가 더 아니야.’
“이 평화를 찾기 위해… 기영 씨가 얼마나… 얼마나 고생하고… 힘들었는지… 기억하고 계십니까?”
“저만 고생한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어서 빨리 가서 주무시고….”
“아닙니다! 아니에요! 다른 사람들은 기영 씨가 얼마나 아팠는지… 흐윽…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지 못한단 말입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 대륙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단 말입니다. 그들은 기영 씨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몰라요.”
‘네가 뭘 알아. 시바.’
“겨우 손에 넣은 평화를… 이 안락함을 잃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타인을… 아니… 너무나 많은 것들을 사랑하고 아끼십니다. 그게… 기영 씨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알고 계시냔 말입니다! 기영 씨 혼자만의 몸이 아니지 않습니까.”
‘시바, 내가 왜 혼자만의 몸이 아니야. 혼자만의 몸이지. 시발.’
“그게 얼마나 위태로워 보이는지… 얼마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지… 이제는 이해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기영 씨는 이기적이에요. 너무나도 지독하게 이기적입니다!”
“뭐라고요?”
내가 시바 이기적이라고? 내가 시바. 얼마나 너한테 잘해줬는데.
아니야. 화내지 말자. 같이 부딪치지 말자.
“네. 네… 이해하고 있어요. 현성 씨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째서 그렇게 열변을 토하시는지. 저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 이만 들어가요. 다들 보잖아요.”
슬그머니 녀석의 손을 잡아끌어야지. 살짝 손을 가져다 대자 이 새끼가 미쳤는지 손을 확 쳐내는 것이 느껴진다.
“아!”
분위기가 심각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일까. 먼 산을 바라보던 신입들은 구석에서 이 드라마를 지켜보고 있었고 조혜진이 황급하게 자리를 정리하는 것이 눈에 띄었다.
길드마스터와 부길드마스터가 의견충돌을 라이브로 보낼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연차가 좀 쌓인 길드원들은 알아서 숙소로 들어가고 박덕구가 술에 취한 이들을 챙겨 안쪽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눈에 보인다.
“오, 오, 오빠. 방. 방에서 기다릴게요.”
라고 한마디를 남긴 정하얀은 한소라에게 이끌려 숙소로 들어가고. 김예리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한참을 바라보다 느릿하게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태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샤넬리아 에르메스 역시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후다닥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조금 열이 뻗치기는 했지만 결국 선택한 것은 화해의 손길.
이쪽이 다시 한번 슬쩍 녀석의 팔을 뻗자 김현성 이 새끼가 고개를 돌리며 팔을 밀어낸다.
그걸로는 모자랐는지 이쪽을 노려보기까지 하는 모습. 그 눈에는 틀림없이 이대로 끝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이 새끼. 미쳤나 봐.’
“이번에는 안 됩니다. 이건… 이건… 이건 미친 짓입니다. 이번만큼은 아닙니다.”
아직 제대로 결정된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전부 따지고 보면 미친 짓이라고 볼 수도 없는데.
“…….”
다시 한번 더 팔을 뻗자. 몸을 흔들어 이쪽을 털어내는 녀석.
‘이 새끼 네가 어떻게 이래.’
내가 시바 회귀도 시켜주고, 선물도 주고, 배때지도 내어 줬는데. 이러는 게 말이나 돼?
배짱 한번 부려보겠다. 이거야?
“기영 씨. 저들은 기영 씨를 이용할 생각밖에 하지 않는단 말입니다! 기영 씨의 상냥한 마음을… 따뜻한 마음을 이용하려는 것뿐입니다. 적어도 저들에 대해서는 제가 기영 씨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샤넬리아 에르메스를 이곳으로 불러온 것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제가 일으킨 일이지만… 이번 한 번만….”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네요.”
“네?”
부딪치는 것도, 달래는 것도 정답이 아니라면….
‘무시하는 것밖에 없자너.’
말은 그걸로 끝이다.
‘버릇 좀 고쳐줘야지.’
마치 남을 바라보는 듯한 싸늘한 표정을 한 차례 선보인 이후에.
곧바로 몸을 돌린다.
당연하지만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 기영 씨?”
하는 목소리.
시바 잡기만 해봐.
진짜 잡기만 해봐.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하겠다는 당찬 포부와 발걸음, 잘못한 것은 내가 아니라 너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겠다는 뒷모습.
아마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야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겠지. 갑자기 술이 확 깨버린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떻게 사과를 하면 좋을지 고민 아닌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녀석의 첫 번째 과제는 이기영을 붙잡는 것이다. 일이 더 커지기 전에 해결하고 싶어 할 테니 지금 당장 사과의 말을 어떻게 건넬지 생각하고 있겠지.
멀어지는 이쪽을 따라붙으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할 거야.
시간상 녀석이 슬슬 이쪽을 붙잡을 타이밍.
‘뭐야.’
얘 뭐 하고 있어?
‘아직도 고민 중이야?’
속도를 조금 늦춰봤지만 이쪽을 부르는 목소리나 잡는 손길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대로 숙소의 앞까지 당도할 때까지.
은혜도 모르는 회귀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상황.
참지 못해 뒤를 돌아본 곳에.
“…….”
“…….”
김현성은 없었다.
“…….”
“너 이 새끼. 손절이야.”
차원은 넓고 회귀자도 한 명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