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64화
피크닉 (27)
‘왜 너희들끼리 소통하고 그래.’
-사막의 길잡이들이여. 그리고 사하가의 유산의 선택을 받은 이여. 당신들의 앞길에 무운이 있기를 기원하겠습니다.
-…….
-…….
심지어 사하가의 유산을 전달하는 과정 역시 평범하지 않다. 손으로 전달하면 되는 걸 굳이 마력으로 띄워 전달하는 모습, 저게 도대체 뭔지도 모르겠다.
대충 사막 엘프들의 전통 어쩌구가 깃들어 있는 것 같은 날이 휜 단검, 사하가의 존재 자체가 타 대륙에 있으니 스스로 빛이 날 리가 없건만, 극적 연출을 위해서인지 희미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어떤 신의 상징을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신성한 의식이건만 그런 것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이지후의 표정 역시 현 상황과 굉장히 대조적이다.
이지후는 중얼거렸다.
-내게 필요한 건 무운이 아니라. 그녀야.
‘너무 명대사에 집착하지 마, 누나.’
-그렇군요.
‘도미니온스. 너도 긍정하지 마. 날개 휘겠다. 그만 좀 펼쳐.’
-세상의 균형을 관장하는 용이시여.
-어? 도미… 어? 나?
-희생과 부활의 딸이여. 부활의 용이여. 작은 청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도미 너 갑자기 왜 그….
-…….
-크… 크흠. 말하는 것을 허락하겠노라. 세상의 지혜를 관장하는 천사여.
-이들이 검은 태풍의 심장에 도달할 수 있게, 작은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갑작스러운 도미니온스의 태세 전환에 당황한 디아루리아 역시,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 애써 근엄한 모습을 선보이기 시작한다.
분위기를 파악한 다른 애들 역시 그리 다르지 않은 모습.
사막의 길잡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신경 쓰기 시작한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나, 희생과 부활의 용이 인간들의 일에 간섭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저 수식어 마음에 들었나 봐.’
-누… 누나님?
-하지만 세상의 지혜를 관장하는 천사여. 그대가 그렇게까지 내게 청하는 것은 분명 이유가 있을 터. 그대가 아무 생각 없이 내게 그러한 말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에… 그대의 청을 허락하겠노라.
-어찌… 희생과 부활의 용이시여. 그렇게 하다가는 억제력이….
‘언제 그런 설정까지 붙었어. 억제력이라는 건 또 뭐야. 막스야. 너는 또 왜 그래. 억제력 같은 거 없어.’
-내 선택이다. 균열의 주인이여. 희생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용이시여….
-그게 나의 일이다.
마치 대단한 희생이라도 하는 양, 희생과 부활의 용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역병의 숨결 반대편에 있는 부활의 숨결이라도 사용하려고 하는 것일까.
거대한 뿔을 달고 있는 용이 웅장한 눈빛과 함께 큰 숨을 들이켜는 장면은 단연코 극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엄격 근엄 진지한 아이들의 표정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쟤네 뭐 잘못 먹었나 봐.’
물론 사막의 길잡이들은 커다랗게 입을 벌리는 중이다.
-지금… 우리가 뭘 보고 있는 거지?
-뭐긴 뭐겠어. 기적이지.
-희생과 부활의 용… 세상의 지혜를 관장하는 천사. 균열의 주인이라는 건 대체….
-대륙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들이 아직 많은 모양일세. 아직도 풀어내야 할 비밀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을 수도….
-대륙에 숨겨져 있는 비밀… 이상할 것도 없지만… 알아서는 안 될 것들을 알아버린 것 같은 기분이야. 조지.
‘대륙 설정에 갑자기 이상한 거 집어넣지 마. 애들아.’
갑작스레 등장한 용과 천사, 그리고 균열의 주인의 등장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모습.
도대체 뭐가 대륙의 숨겨진 비밀인지는 모르겠지만 쟤네들한테는 이 모든 게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비치기야 할 것이다.
갑작스레 신탁을 받은 것부터, 검은 사막을 헤치고 용의 도움을 받고 천사와 대화를 하고, 균열의 주인을 목도했으며 잊혀진 신의 유산을 받았다.
평범한 모험가들이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그들의 기대처럼 희생과 부활의 용은 커다란 숨결을 내뿜는다.
검은 비로 만들어진 검은 짐승들은 형체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기 시작.
콰아아아아아아아앙!! 하는 거대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계속해서 귀를 울린다.
자신이 낼 수 있는 출력을 벗어났는지 디아루리아의 몸이 밀리는 것으로 모자라 고개가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 숨결 역시 하늘을 뻗어 나간다. 마치 비구름을 뚫어버릴 것 같은 기세.
일시적이었지만 잠깐 동안 검은 비가 멈추지 않았을까 느낄 정도의 충격이 가신 이후, 디아루리아는 다시금 근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향하거라. 사막의 길잡이들이여. 그리고. 유산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희생과 부활의 용신님!
-감사합니다! 용님!
-그래. 그래. 오랜만에 보는 예의가 바른 필멸자들이로군.
만족스러운 미소를 띤 디아루리아를 뒤로한 채로 다시금 모험을 떠나는 일행.
사실상 검은 비의 짐승들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은 단순한 행군 길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순간에도 어찌나 보여줄 게 많은지 여러 가지 표정이 얼굴에 담기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드디어 이기연, 그녀에게 닿을 수 있다는 기대감과. 그녀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에 대한 두려움, 오랜만에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을 만난다는 설레임.
당연히 그 모든 것들을 포용할 수 있는 감정은 그녀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었다.
이지후는 그렇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역시 태풍의 눈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
“이곳입니다. 유산의 주인이여.”
“…….”
“이지후 님?”
“…….”
“…….”
자연스럽게 안에서 이기연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조혜진과 엘리오스를 마주쳤지만 이미 이지후의 시선은 이기연에게 고정되어 있다.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까. 설정상 오랜 시간 동안 떨어졌다가 만난 연인에게, 배신감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던 연인에게….
이지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 싸우고 있는 그녀에게 이지후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지후는 이 내면의 싸움이 단순히 겔라와 싸우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이것은 말 그대로 이기연 그녀가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한 싸움.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한 싸움이었다.
이기연의 몸,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이었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심지어 저예산이었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력으로 모든 것을 커버해야 하는 상황.
“그녀는….”
“계속해서 싸우고 있습니다.”
이지후가 물었고 엘리오스가 중얼거렸다.
“기연 씨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 기연 씨와 만났지만… 제 도움을 바라지 않더군요.”
“…….”
“혼자서 해결하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뭘 어째서야. 네가 마음에 안 드니까 그렇지.’
순간 조용하고 달콤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아이야. 이제 그만 포기하려무나.]
이후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절대로… 절대 포기할 수 없어요.”
나는 꿋꿋하니까.
[네가 아무리 강한 정신력을 지녔다고 한들,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 너에게 상처 준 세상이 밉지 않더냐. 너를 홀로 내버려 둔 이곳이 원망스럽지 않느냐.]
어떻게 원망스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
대륙에 떨어진 이후부터 그녀는 쭉 혼자였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했고 마치 세상에 버림받았다고 느껴질 정도로 힘든 일들을 많이 겪었다.
그 모든 일들을 전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이기연은 상처받고 또 상처받았다.
[내가 너의 복수에 손을 내밀어 주마. 아이야. 네가 느끼고 상상하던 것들을 실현시킬 힘을 주겠다.]
안 좋은 생각을 품었던 적도 있었다. 악신 겔라의 말처럼 세상에 복수하고 싶었던 적도 있었고,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려고 한 적도 있었다. 물론 힘을 바랐던 적도 있었다.
[너를 배신한 아이가 와 있구나. 네게 상처를 준 아이가 말이다.]
“…….”
[아니, 그 아이뿐만이 아니란다. 괜찮은 척하지만 나는 네 안에 어떤 어둠이 있는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단다. 이 내가 너의 가장 큰 이해자 가 될 수 있단다. 거부하지 말려무나. 내 손을 잡거라 아이야. 너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어둠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이기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검은 폭풍이 다시금 그녀를 덮치기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손을 뻗으려무나. 나의 손을 잡으려무나. 상처받은 아이야.]
하지만 이기연이 건넨 손을 잡은 것은 겔라가 아니다.
어느새 이쪽에게 다가온 이지후는 초월적인 피조물조차 고통스러워할 검은 폭풍을 인간의 육신으로 견디며 내게 손을 내뻗었다.
언제나 그렇듯, 어둠에 타락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이들은 좋은 추억을 떠올리게 마련.
안 좋은 일투성이였지만 그 속에서도 좋은 추억을 찾는 것이 세기말 감성이 아니었던가.
이기연 역시 그랬다.
‘따뜻한 손.’
그 누구보다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 주던 손, 세상에 고통뿐만이 아니라 행복이 있음을 알려주던 그 손. 혼자가 아님을, 아픔을 견디는 것은 함께 라는 것을 알려주던 그 손.
“지후… 지후야?”
“그래. 누나. 아니… 기연아.”
“정말로… 지후… 너야?”
“그래.”
이지후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얼굴에 난 긴 자상을 타고 흘러내리는 그 눈물은 그의 후회를 알려주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그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왈칵.
이기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기연아. 사실.”
“아니야. 전부… 전부 알고 있는걸.”
‘누나, 왜 이런 거 좋아해?’
“네가… 네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네가 어째서 그랬던 건지… 이제는 전부 이해할 수 있는걸. 전부… 전부 나를 위해서였다는 걸….”
‘도대체 왜 이런 거 좋아해.’
왈칵.
소수의 픽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누나의 픽이 사실은 대중의 픽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순식간.
“힘내세요. 힘내세요! 두 사람. 흐윽….”
‘진짜….’
조혜진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응원을 보내고 있었고, 엘리오스 역시 착찹한 얼굴로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사막의 길잡이들 역시 마찬가지. 그중 한 녀석은 마치 눈물샘이 고장나 버린 것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고 있다.
무엇이 그리 감동적이었던 것일까. 검은 태풍 속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는 두 사람이 그리 애절해 보였을까.
‘아니야. 시바. 이게 대중의 픽일 리가 없어.’
“힘내십시오!”
“힘내… 힘내!”
‘이게 시바. 먹힌다고?’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이기연.”
“…….”
“나는 언제나. 너를 믿고 있어. 내가 아는 네가 이 어둠에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이런 각본이 대중의 픽일 리가 없어….’
“지후야….”
“내가. 너의 옆을 지키겠어. 이번에는… 내가 너를 지키겠어. 네가 나를 지지했던 만큼. 내가 너를 지지하겠어.”
‘누나가 맞았을 리가 없어….’
“힘내세요! 기연 씨! 흐윽….”
‘혜지니가 너무 순진해서 그래.’
내 심정이 어떻든 간에 극은 절정을 향해 치닫는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겔라 님.”
[…….]
“저는 당신의 말에 응할 수가 없어요.”
[후회할 것이다. 아이야.]
“제 미래는 제가 직접 개척하겠어요. 아무리 어렵고 힘든 일이 닥쳐온다고 한들, 더 이상은 두렵지 않아요. 나를…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기연아.”
“응. 지후야.”
“기연아….”
“응. 지후야.”
“기연아… 기연아….”
“응! 지후야… 지후야….”
두 사람의 목소리와 함께 사하가의 유산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 세상이 밝게 물들었다.
“…….”
“…….”
그 기적의 한가운데.
홀로 선 엘프 하나만이 시원 씁쓸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을 뿐이었다.
‘괜찮은 척하지만….’
괜찮은 표정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