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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62화 (1,062/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62화

피크닉 (25)

아마 익숙하지 않은 공간이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이라는 건 바깥 세계와 다를 바가 없지만 내면의 세계와는 그 느낌이 다르다.

현실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범한 사람이 느끼기에도 이질적인 공기가 주변에 감돌고 있다.

더욱더 고요하고 더욱더 어둡고, 더욱더 외로운 공간. 숨이 막힐 정도로 쓸쓸한 공간.

사실은 김현성이 만들었던 멸망한 1회차를 연출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예산 문제로 거기까지 연출하지 못했다.

‘너무 저예산이라 걱정했었는데….’

엘리오스는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녀석에게 걸 맞은 싸구려 미쟝센.

물론 이 싸구려 미쟝센을 커버해 주는 것은 배우의 물오른 연기력이다.

쓸쓸한 공간의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이기연.

울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슬프다는 표현 역시 하지 않는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그녀의 어깨만이 지금 그녀의 상태가 어떤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멀리서 그녀를 바라본 엘리오스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언제나 밝았던 사람, 어떤 시련과 고독도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여인이 무너진 모습이 그리 충격적이었을까.

어쩌면 이전에 봤던 모습은 전부 가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억지로 강한 척하고, 억지로 웃고, 이겨낼 수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약점을 감추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의 진짜 모습이리라.

그 사실을 깨달은 것 같은 녀석은 한동안 말을 잊지 못한 채로 이쪽에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

“기연 씨… 접니다. 엘리오스입니다.”

“…….”

“기연 씨를 찾으러 왔습니다.”

“…….”

“기연 씨?”

용기를 내서 한 발자국을 더 내디딘 녀석. 어떻게,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갈피를 찾지 못하고 있는 엘리오스.

이번에도 구 썸녀에게 도움을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기분 탓일까. 자신의 뒤를 봐주고 있었던 구 썸녀가 없으니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디는 것도 힘에 겨워 보인다.

애초에 혜지니가 없었으면 이 진상 새끼 여기까지 못 왔을 거야.

‘진상이기는 해. 진짜.’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 혼자서 해야지.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이 필사적인 몸짓이 보이지 않는 거냐구.

좀 빨리 오라고.

“기연 씨.”

결국 이쪽이 살며시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으로 템포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충격으로 녀석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은 당연지사.

퉁퉁 부어오른 눈, 망가진 얼굴은 엘리오스가 마지막으로 봤던 그녀와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을 테니 다소 당황스러워할 만하기는 했다.

그렇다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실례되는 행동으로 보인다.

“엘리오스 님?”

“…….”

“정말로… 엘리오스 님이 맞나요?”

혹시나 환상이 아닐까. 이 정체불명의 공간이 만들어낸 헛것이 아닐까?

다시 한번 희망이 없는 눈으로 녀석을 바라본 것도 잠시, 이쪽의 시선이 머문 곳은 왼쪽 손가락이었다.

‘붉은 실.’

눈에 띈 것은 보일 리가 없는 붉은 실이다. 느끼고는 있었지만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던 붉은 실. 언제나 연결되어 있을 거라고 믿고는 있었지만 그 존재를 의심하고 있었던 붉은 실.

당연히 시선은 가늘고 길다란 손가락에 걸려 있는 붉은실을 따라간다. 그리고, 자신의 붉은 실과 연결되어 있는 또 다른 손가락을 마주한 순간….

“엘리오스 님?”

이기연은 희미하게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다.

환상이 아니라, 정말로 엘리오스 님이 찾아오신 거구나. 인연의 끈이라는 게 정말로 있었구나,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 인연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했구나.

기댈 곳 없었던 이기연에게는 그 어떠한 말보다 더 위로가 되어주는 붉은 실의 존재.

엘리오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까. 녀석 역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에 달려 있는 붉은 실을 움켜쥐었다.

두 사람의 거리가 줄어든다. 지금껏 가까워진 적이 없었던 붉은 실은 마치 서로의 짝을 처음 만난 것처럼 아주 엷게… 희미하게 빛나며 서로를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네. 접니다. 기연 씨.”

“정말로… 정말… 엘리오스 님이 맞는 건가요?”

“네.”

“정말로… 그 엘리오스 님이 맞나요? 라베하에서 만났던 그 엘리오스 님이….”

“예! 제가 맞습니다. 기연 씨.”

“흐윽… 흐으윽….”

“죄송합니다.”

“…….”

“이 모든 게… 죄송합니다.”

“아니요. 엘리오스 님께서… 죄송해하실 필요 없는걸요. 이건….”

“너무나 오랜 시간을 혼자 내버려 둬서 죄송합니다.”

“그게….”

“기연 씨의 말씀을 믿지 못해 죄송합니다. 깨닫는 것이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

“정말로 붉은 실이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인연이라는 것, 아니… 그런 것보다… 고작 그런 것뿐만이 아니라… 기연 씨에 대한 제 마음이 무엇인지, 제 진심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 새끼 급발진하자너. 마음까지 다시 확인한 건 도대체 뭐야. 시바. 도대체 언제 마음까지 확인한 거야. 어제까지만 해도 시바 마음 확인 안 했잖아.’

“친절하시네요. 엘리오스 님께서는.”

“네?”

“정말로… 친절하시네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지 않으셔도….”

“아니요. 단순히 말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여기까지 와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걸요. 저답지 않았죠. 이런 모습.”

나답지 않았다라는 명대사 한번 날려주고.

빠르게 템포 올리자.

촬영 시간 길어지면 제작비 더 나가자너.

“사실… 사실은 쭉 혼자라고 생각했었어요.”

“…….”

“이 대륙으로 소환된 이후로… 계속, 혼자라고 생각했었어요. 물론 가끔은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줄곧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나 봐요. 정확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이곳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나 봐요.”

“…….”

“어떻게든…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했었지만 이겨낼 수 없었나 봐요. 제 마음속에서 저도 눈치채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에 계속해서 먹혀가고 있었던 건가 봐요.”

“…….”

“밖은… 바깥은 많이 심각한가요? 라베하는… 린델은… 큰일이 벌어지지 않았나요?”

엘리오스는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건 이기연을 배려한다기보다는 어째서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에 대한 의문처럼 보이기도 했다.

“알고 있었어요.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여기에서도 대충 바깥의 상황에 대해서 느끼고 있었거든요.”

“기연 씨가… 이곳으로 들어온 이후부터 쭉 검은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통신이 끊겨 라베하 지역 이외에 다른 지역에도 같은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

“…….”

“그 검은 비가 고여 검은 짐승을 만들고, 그 검은 짐승들이 비를 맞으며 점점 덩치를 키워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라베하 사막 전체에 커다랗고 위험한 검은 짐승들이 창궐하고 있습니다. 마치 대륙 멸망의 전초를 예고하는 것처럼, 라베하에 어둠이… 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온 것은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기연 씨.”

‘내가 뭐라고 했어? 왜 제 발 저리고 그래? 내가 그것 때문에 왔대?’

“정말로… 단지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저는….”

“그렇게 배려하지 않으셔도 되요. 엘리오스 님.”

“…….”

“그렇다면… 정말로 제 안에 무언가가 있는 게 확실한 모양이네요.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사실이었군요.”

“…….”

“자신을 겔라라고 소개하는 존재의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아니,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제안에 있는 게 느껴졌어요. 최대한 저항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더라고요. 이미 어둠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거리고, 계속해서 위로 떠오르려고 발버둥 쳐봤지만 의식은 계속해서 심연 속으로 떨어지는 것처럼… 한참이나 멍하니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런 곳에서 울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죠.”

“괜찮으십니까?”

“네. 이제는… 괜찮아요.”

“…….”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답니다.”

“…….”

이기연은 원래 꿋꿋한 여인이다.

외롭고 슬퍼도 울지 않는 꿋꿋함 그 자체.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칠전팔기의 대명사.

어둠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아주 작은 계기였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 등을 떠밀어 주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 하나.

아주 작은 계기로 사람은 더 강해질 수 있다.

‘김현성도 그랬지.’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는 말이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말의 답변처럼 들려왔는지, 엘리오스는 다시금 가까이 걸어와 몸을 포개기 시작했다.

“이제는 괜찮아질 겁니다. 기연 씨. 제가 기연 씨를 구하러 이곳에 왔으니까요. 이제 더 이상 혼자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이런 곳에서….”

“고마워요.”

“…….”

이윽고 짧은 해후를 마친 이후에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리고… 죄송해요.”

“네?”

엘리오스를 살짝 떼어낸 이후에는 곧바로 붉은 실로 시선을 돌린다. 이후에는 스스로 붉은 실을 과감히 풀어낸다. 무척이나 담담하게 말이다.

얼어붙은 녀석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어째서….”

‘몰라. 그냥 나도 몰라. 굳이 말하자면 네가 싫어서 그래.’

거창한 이유는 없다. 준비된 대사는 있지만 대사를 내뱉을 필요조차도 없다.

녀석이 스스로 해석하게 될 것이다. 누가 봐도, 무언가 변화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테니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붉은 실을 풀어냄으로써 그녀가 인격적인 성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테니까.

눈에는 총기가 가득 들어차기 시작한다. 슬픔과 외로움이 있던 곳에 다시금 자리 잡은 것은, 자립성과 자신감이다.

누군가에게 인생을 맡기겠다는, 이 외로움을 누군가를 통해 해소하겠다는 빈약한 의지가 아닌, 자신의 삶과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어둠은 걷히고 희미한 빛이 공간에 들어차기 시작한다. 드라마틱하게도 그 빛은 이기연은 비춘다.

이기연은 서 있었다.

누군가의 여인으로서가 아니라,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이기연 그 자체로 자신의 내면 속에, 대륙 위에 홀로 빛나며 서 있다.

“기연 씨?”

‘너 싫어. 나는 너 싫어. 시바.’

“네. 엘리오스 님.”

“지금 이건….”

“죄송해요. 하지만.”

“…….”

“이해해 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끊어진 붉은 실에 미련은 없다. 끊어진 붉은 실과 함께, 점점 희미해져 가는 엘리오스가 마지막으로 본 이기연의 얼굴은 틀림없이 활짝 미소 짓고 있을 것이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보았던 그 환한 미소, 그 미소보다 더욱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세상에 발걸음을 당당하게 내디디려 준비하는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기대는 사람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주먹을 꽉 쥔 사람을 보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 몸을 일으켜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몸을 일으키는 사람을 보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 대륙에 홀로 서기 위해.

이기연이 필요로 하는 것은 자신을 구하러 와주는 왕국의 엘프가 아닌, 자신을 믿고 지지해 줄 수 있는 짝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은 불안하고 초초한 얼굴로, 그녀의 삶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 그 한 발자국을 더 내디뎠다.

“고마워요. 엘리오스 님.”

‘너 차였어. 시바.’

“기연 씨….”

‘너 차였다구.’

“…….”

‘엘리오스 님은 저와 함께 가실 수 없습니다.’

“응원… 하겠습니다.”

구 남친이 새벽에 문자 보내는 느낌으로 말하지 말구.

“네.”

기연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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