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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59화 (1,05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59화

피크닉 (22)

-기연아… 이기연! 어디 있어! 이기연!

-…….

-어디 있냐고! 제기랄! 이기연! 내 말 안 들려?!

이 누나 몰입하느라 아무것도 눈에 안 보이는 것 좀 봐.

그야말로 후회로 점철된 얼굴. 가면이 깨어진 이지후의 맨 얼굴은 이미 일그러져 있었다.

간혹 보여줬던 미친 복수귀의 표정은 이미 보이지도 않는 상황, 애초 설정상으로 이지후가 저런 모습이 된 것 역시 소중한 사람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녀석에게 그 누구보다도 소중했던 이기연, 잃어버린 가족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그녀를 버렸던 것 역시, 사실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세기말 감성에 어울리는 스토리텔링과 캐릭터 설정이기는 하지만 아직까지도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야기 흐름에 걸맞은 연기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모습은 놀라울 정도.

‘이 누나 미쳤나 봐.’

하지만 그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기연… 기연아! 누나… 제발…. 누나….

검은 비가 내리는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사랑을 외치고 있는 그.

자신에게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드디어 깨달아 버린 사랑꾼의 얼굴은 당장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처절한 몸짓, 정신없이 달리다 넘어진다든가, 목적지 없이 무작정 달리고 있는 모습은 광인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활활 불타오르는 복수심이 진실된 사랑 앞에서 무릎 꿇는 순간.

다시 한번 소중한 사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후회와 걱정.

어느 순간 그는 개인의 복수보다 진실로 소중하게 여기던 사랑을 좇고 있었다.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쟤네들 어떻게 들어왔냐고.’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저들은….]

‘애초에 여기를 어떻게 찾아온 거지?’

준비된 무대에 멀뚱멀뚱 자리를 잡고 있는 엑스트라 셋.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어떻게 라베하에 초대됐는지 이해하기 힘든 정도의 몰골을 하고 있다.

대륙 기준으로 상위 모험가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는 스펙이기는 했지만 그래 봤자 대형 길드, 혹은 중형 길드의 일반 길드원들 정도.

라베하를 통제하지 않은 것이 저 배우들이 무대를 밟게 된 계기이리라.

말하자면 정극이 갑작스레 관객 참여형 공연으로 바뀌어 버린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되는 거야? 알렉스. 이대로 되돌아가도 되는 건가?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나 파란 길드에 알려야 되는 거 아니야?”

“아마 그러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그러지 마. 그러면 안 돼. 괜히 알리지 마. 알리면 복잡해져. 여기는 그 정도 아니야.’

“우리끼리 뭘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지금 내리는 검은 비가 저 여신님 때문에 일어난 것이 맞다면… 우리는 그저 평범한 놈들일 뿐이야. 알렉스. 여기에 닿은 것도 우연이고….”

“…….”

“우리끼리 해결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제길 통신도 안 터지고… 일단 나가는 게 좋겠다. 여기 왠지 불길하고… 알렉스 어때?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에서 사용하는 비상용 채널. 그거는 될 거 아니야?”

“그렇지 않아도 지금 연결하고 있어.”

“애초에 우리가 왜 여기로 오게 된 건지….”

“세상에 우연이라는 건 없네. 캐넌.”

“조지? 무슨 소리야.”

“우리가 여기까지 닿은 게 어떻게 우연이라 치부할 수 있겠나. 모두에게 주어진 역할이 있는 거야.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네. 모르긴 몰라도… 운명의 흐름이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걸지도 모르지.”

‘시발. 그게 뭔 개소리야. 너네 같은 애들 부른 적 없는데.’

하지만 놈의 말에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참여한 이상 녀석들에게 역할을 부여하는 게 가장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상황이었으니까.

굳이 지혜 누나가 이 참여형 관객들에 대해 따로 피드백하지 않은 이유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역할을 하나 주라는 것 같은데.’

마침 길을 헤매고 있는 이지후를 보고 있노라면 이 참여형 관객들에게 어떤 역할이 어울리는지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도와주세요.]

“뭐야….”

[도와주세요….]

“방금 들었어? 캐넌?”

[제발… 도와주세요.]

“당신… 당신입니까?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여신님… 아니, 천사… 아니… 그러니까…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악마… 악마는 아닌가….”

[제발… 도와주세요.]

“조, 조금만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아도 현재 구조 요청을….”

‘아니, 구조 요청 하지 말고….’

[그를… 도와주세요.]

아마 녀석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장면들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 것이다.

검은 비가 내리는 사막에 홀로 남겨져 있는 이지후. 처절하게 울부짖으며 위태롭게 달리고 있는 청년.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기연은 이지후가 이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에게 배신감과 실망스러움을 느끼기는 것이 당연했지만 이기연은 그가 무사하기를, 그가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

[당신들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막의 길잡이들이여.]

‘사막의 길잡이. 울림 괜찮자너.’

“당신께서… 저희들을 이쪽으로 부르신 겁니까? 지금 이 상황에 대해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나도 몰라. 시바. 니들이 여기까지 온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정말로 당신이 이 검은 비를 내리게 한 장본인이 맞다면… 초조해하지 마십시오. 명예추기경님께서 곧 이쪽으로 오실 겁니다. 그가 곧 당신을 구원하실 겁니다. 조금만 참으시면….”

‘시바 명예추기경이 난데 오긴 누가와.’

[아니요. 당신들에게 주어진 일은 그것이 아닙니다. 제발… 이 힘이 더 거세지기 전에… 그를….]

“…….”

[그를 도와주세요.]

“…….”

[제가 아직도 완전한 저로 남아 있을 수 있을 때… 그를… 안전한 곳으로….]

“…….”

[흐윽… 흐으으윽… 흐으윽… 아니야. 나는… 그런 게….]

“…….”

[빨리… 최대한 빨리… 빨리! 이제 더 이상은….]

멍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는 참여형 관객들은….

[사하가의… 사하가의 유산을 찾아 주세요.]

이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출구 쪽으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제길… 도대체 이게 뭔지… 조지. 너 정말로 알고 있었던 거야?”

“이건….”

“캐넌. 위치는 어때? 찾을 수 있겠어?”

“힘들어. 이 넓은 공간에서 사람 하나를 찾으라니… 숙련된 레인저라고 해도 쉽지 않은 일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나는 기본이 전사라고.”

“힌트가 아예 없는 건 아니네. 이곳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검은 비가 거세게 내리는 구조였으니… 우리의 머릿속에 녹아든 장면이 정말이라면….”

“그렇게 생각해 보면… 아마 이 근처 3㎞ 내외야. 하다못해 바위나 다른 구조물이라도 있었다면 찾기 쉬웠을 텐데… 그나저나 그 남자는 도대체 뭐야? 그리고 그분은 도대체… 정말로 몸에 악신 겔라가 깃들기라도 한 건가? 어이, 조지. 내 말이 맞아?”

“…….”

“그걸 우리가 알 필요가 없어, 캐넌. 주어진 일에만 집중해도 모자란 상황이야.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가 그녀를 도와야 한다는 거야. 휴가 나와서 이게 뭐 하는 짓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길… 너희들이랑 같이 다니다 보면 항상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니까.”

잡담을 나누며 빠르게 이동하는 참여형 관객들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머릿속에 잠깐 떠오른 이미지로 사막 한가운데서 이지후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단편적인 기억을 따라 계속해서 몸을 이동시키는 녀석들은 기대 이상으로 잘 움직이고 있는 중.

검은 비가 태풍처럼 몰아치는 한 가운데에서 검은 형태의 짐승들이 몸을 일으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캐넌?”

“나도 보고 있어. 알렉스. 개인 장비를 챙겨 와서 다행이지. 전투 준비해. 조지.”

“알겠네.”

‘참여형 관객들 나쁘지 않네.’

모험 활극 보는 것 같자너. 오랜만에 저런 거 보니까. 기분도 좋아지고….

“뚫어! 그렇게 강한 놈들은 아니야.”

“하지만 점점 강해지고 있는 것 같네만.”

“아무래도 검은 비를 머금을수록 능력치가 올라가는 것 같지 않아? 지금은 우리가 상대할 수 있을 정도지만 수 시간이 지나면 파란 길드 정도는 와야 할 거다. 최대한 빠르게 돌파해야 돼. 캐넌. 힘들 거라는 건 알고 있겠지만 네가 조금 무리해 줘야 할 것 같다.”

“제길. 으아아아아아! 받아라! 이 여, 여신의 피조물 새끼들!”

태풍의 눈을 중심으로 크게 한 바퀴를 돌면서 이지후를 찾아보려는 계획이었겠지만 사실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아무리 확률을 높인다고 해도 계속해서 이동하고 있는 이지후를 찾아낼 수 있을 리 만무.

겔라가 검은 비의 짐승들을 불러낸 것은 그러한 연유였다.

‘조금씩 조금씩. 방향을 틀면 돼.’

녀석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세밀하게 검은 비의 짐승들을 컨트롤해서 이동 방향을 조금씩 바꾼다.

“뚫어내!”

“캐넌! 달려!”

“나만 따라오라고! 조지! 뒤는 봐주고 있는 거지?”

“걱정하지 말게.”

“으아아아아아! 좀 죽어라! 이 괴물 자식들! 애초에 죽일 수 있는 놈들이 아니야! 움직임을 멈추게 하는 게 전부라고!”

계속해서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온몸이 검은 비에 흠뻑 젖은 채로 짐승들에게 무기를 휘두르는 녀석들은 이것저것 생각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갑작스레 튀어나오는 검은 비의 짐승들을 상대하고 검은 비에 의해 실시간으로 뒤바뀌는 지형.

자신들이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건지,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이 짐승들이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알 수도 없는 상황.

체력적으로 지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이제 한계를 맞았다고 생각할 때.

아이러니하게도 희망이 보인 것 역시 그때였을 것이다.

“누나… 누나!”

“알렉스 보여?!”

“보여!”

“제기랄! 짐승들이다! 조금 더 빨리!”

검은 태풍을 헤치고 온 사막의 길잡이들은 한 여인을 위해 사막을 건너는 남자와 맞닥뜨렸고….

“당신들은… 누구야.”

“설명할 시간이 부족합니다. 저희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저희도 잘 모르겠지만… 당신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기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무슨… 개 같은 소리를….”

“정말입니다.”

“…….”

“…….”

“누가 보냈지?”

“지금 이 검은 비를 만들어낸 여신… 입니다. 누구인지는 저희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저희는 사막의 길잡이로서.”

“이기연…?”

“네?”

“그녀는… 그녀는 지금 어디 있나.”

“…….”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묻잖아!”

“이럴 시간 없어 알렉스! 제길! 놈들이 몰려오고 있어! 기절해서라도 데려가는 게….”

“당신은… 그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겁니까?”

“날 그녀에게로 데려가 줘. 제발… 사례라면 얼마든지 할 테니….”

“말이 안 통하는 양반인 것 같은데. 알렉스! 더 이상 대화하지 말고….”

“입 닥쳐. 캐넌.”

“너 왜 그래?”

“미친 소리 같겠지만 말이다.”

“뭐?”

“이 남자를 거기로 데려가야 될 것 같다.”

미친 소리 아니야. 암시지.

때마침 시선을 돌리자.

“기연 씨?”

멍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먼저 온 손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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