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56화
피크닉 (19)
즐거운 분위기가 갑작스레 가라앉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정말로… 정말로…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왠지 모르게 슬프게 들려오는 목소리, 눈물은 고여 있지 않았지만 당장에라도 눈시울을 붉힐 것만 같은 눈, 많은 뜻을 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애초에 긍정적인 의미로 말한 것도 아니었다. 이 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부터가 이 시간이 언젠가는 끝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엘리오스도 대충은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른다.
‘알고 있구나.’
자신이 말하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구나.
언제부터 들킨 건지, 어째서 알고 있었던 건지, 혹여나 자신이 너무 티를 낸 건지 의문을 표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야 왼쪽 손가락에 걸려 있는 붉은 실을 보고 있자면 이 여인이 자신의 상태가 어떤지 눈치채는 것도 이상하지 않게 느껴졌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끝나고 말겠죠?”
“…….”
“이 꿈도 언젠가는 먼지처럼 흩어져 버릴 거예요.”
부정해 달라고, 내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달라는 외침이었지만 무정한 녀석은 그 외침을 부정한다. 그저 입을 꾹 닫으며 먼 곳으로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
“…….”
“그럼… 이만 일어날까요?”
“네.”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두 사람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힘내자. 기연아.’
즐겁게 웃으면서 말이야.
최대한 행복한 하루를 보내기로 다짐한 것처럼, 다시 한번 기운을 내고 힘내보자.
아직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잖아. 어쩌면… 일말의 희망이 있을지도 몰라.
자꾸만 눈물이 차오르려고 했지만 애써 눈물을 참아본다.
길거리를 거닐며, 완전히 잡히지 않은 손을 잡고 웃으면서, 억지로 기분을 내며,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으면서.
실제로 설정상 이기연은 어떤 시련과 역경이 들이닥쳐도 꿋꿋했었으니까. 지금도 꿋꿋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맞다.
“그러고 보니 무지개 솜사탕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네? 들어보기는 들어봤지만….”
“교국의 명예추기경께서 좋아하시는 디저트로 유명하더군요. 린델의 유명한 거리에서만 판매한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라베하로 들어왔나 봅니다.”
‘이제 시바. 솜사탕 좀 그만 먹자. 진짜 이 역경은 생각하지 못했자너. 다들 하나같이 솜사탕 타령이야.’
“이게… 무슨 맛이람.”
“입맛에 좀 맞으십니까?”
“맛있어요. 정말로 놀라울 정도로요.”
‘그리고 물려. 시바.’
함께 무지개 솜사탕을 먹고.
“그러고 보니 영화는 자주 보시나요?”
“아니요. 자주 보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 엘프들 사이에서 천연사라는 영화가 유행한다고 하더군요. 제가 알기로는 대륙 전체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고… 아! 기연 씨는 어떻습니까?”
“저는 영화보다는 연극을 조금 더 선호하는 편이에요. 공연이나… 뭔가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잖아요. 배우들과도 더 가깝고….”
“다행이군요.”
“네?”
“오늘 좋은 공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 정말인가요?”
“네.”
취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극장으로 향하기도 한다.
‘볼만하네. 근데 고증이 조금 잘못 됐는데.’
27군단 소환 사태에 있었던 노을빛의 검사의 각성 시나리오. 제목은 두 사람의 노을.
판권을 판 돈은 제대로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의식 세계로 도망쳐 잠들어 있던 파란 길드마스터를 깨우는 파란 부길드마스터의 이야기였다.
책임지는 걸 두려워했었던 김현성과 짐을 함께 들면 된다는 이기영의 감동적인 이야기.
그 감동 실화를 재구성한 모양인데… 아무래도 자본이 많이 들어갔는지 퀄리티가 심상치 않았다.
“제길… 제길! 흉내 내지 마. 흉내 내지 말라고. 제기랄!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서 나에게 책임을 강요하지 마. 이렇게까지 나타나서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 말란 말이야. 나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한 적 없어. 다시 한번 하고 싶다고 부탁한 적도 없다고! 그러니까 그만 내버려 둬. 제발 그만! 그만 내버려 둬! 더 이상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 마! 이 개새끼들아! 나한테 씨발… 책임을 강요하지 말라고… 씨발….”
“…….”
“제발 그만해… 제발… 제발 그 모습으로 나한테 책임을 강요하지 마요.”
생각해 보면 진짜 저랬던 적도 있었는데. 지금 보면 애가 많이 좋아지기는 했어. 사실상 거의 완치된 거야.
“아무도 네게 책임지라고 말한 적 없다.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한 사람은 없어. 기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압박으로 느껴진다는 것도, 많은 걸 감당해야 한다는 걸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굳이 혼자 스트레스받을 필요 없어. 짐은 같이 들면 돼.”
“…….”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근데 이거 대사가 거의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은 것 같아.
뭔가 연출이 더 극적인 것은 확실했다. 당시 실제로 봤었던 로노베의 연출도 나쁘지는 않았었지만 마법적인 효과가 들어가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노을빛이 터지고 난리도 아닌 상황.
함께 들어온 관객들은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데 저거는 배우 비주얼이 살짝 아쉽기는 하네.’
“재미있네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더욱더요. 27군단 소환사태 이야기야 질리도록 들었지만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었을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그러고 보니 엘리오스 님은 두 분과 실제로 만나신 적이 있지 않나요?”
“네. 그렇습니다. 사적으로는 아니지만 공적으로 만날 일이 더러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자주 만나지는 않지만….”
“실제로도 두 분은 어떠신가요?”
“으음… 파란의 부길드마스터는 듣던 그대로 성자라는 이름이 어울릴 정도로 신앙이 깊으신 분입니다.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시고, 타인을 배려하고… 또 무척 여리신 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위태한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중요한 순간에는 그 누구보다도 강인해지시는 분입니다.”
‘착하네. 살짝 호감됐자너.’
“파란 길드마스터는요?”
“표현하기 어렵습니다. 뭔가….”
“네?”
“이런 말씀드리는 게 맞나 싶기도 하지만… 사실 그분은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게….”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파란 부길드마스터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한 것도 처음입니다만… 파란 길드마스터. 노을빛의 검사는 영웅도 될 수 있지만 악인도 될 수 있는 사람이라… 명예추기경님이 없었다면 그는 영웅이 아니라 학살자가 되었을지도….”
“에이… 설마요.”
‘이 새끼 역시 안 되겠자너.’
아무튼 간에 두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함께하기 시작했다.
무척 긴 산책길을 아무 말 없이 걷는다거나, 조용히 앉아 도시의 전경을 둘러본다거나.
미술관에 들어가 엘프들을 비롯한 이 종족들의 작품을 감상하고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나눈다.
“아직도 활동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네? 하지만 이건… 무려 200년 전… 아. 그랬죠?”
도시 내에서 할 수 있는 활동들이 많기는 했지만 이기연의 배려한 모양인지, 정적인 컨텐츠를 많이 넣은 것 같았다.
“앗. 저거 예쁘네요.”
“제가 사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러시면 왠지 사 달라고 조른 것처럼 보일 것 같아서….”
“아닙니다. 정말로 제가… 선물을 드리고 싶어서….”
“그럼… 감사히 받아도 되나요?”
“예.”
“그럼 이건 제가 선물해 드릴게요.”
쇼핑센터에 들러 구경하고, 다시 한번 식사할 시간이 돼서 그럴듯한 레스토랑에 들어가 와인을 마시고.
취기가 올라올 때 즈음 마음과 마음을 나누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은 당연지사. 마치 그림으로 짜여진 것만 같은 코스였다.
“괜스레 하루가 짧게 느껴지네요.”
하루가 무척 길다.
‘할 게 많아서 그래.’
진짜 엄청 길어. 휴가를 즐기는 게 아니라 이쯤 되면 노동이야. 그냥 책 읽으면서 시간 보내는 것도 휴간데 이번 일정은 너무 액티비티해.
“그렇습니까?”
“네. 엘리오스 님과 함께 있어서 그런가… 평소에는 하루가 정말로 길게 느껴졌었거든요. 일터에서도 그렇고, 혼자 이곳을 둘러볼 때도 그렇고, 또 잠들 때도 그렇고요. 그런데 오늘은 너무 짧게 느껴지는 거 있죠.”
“…….”
“시간이 너무 야속리만치… 짧게 느껴져요. 정말로. 어쩜 이렇게 짧은지… 그래서 더 아쉽나 봐요.”
“기연 씨….”
행복한 하루는 여기서 끝이다.
마치 꿈만 같았던 하루는 여기서 끝이 난다. 그 사실을 직감한 이기연은 괜스레 루비색의 와인잔을 만지작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물론 엘리오스도 다르지는 않다. 녀석은 긴장한 듯했지만, 그래도 이 이야기를 확실하게 매듭지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드디어 그 시간이 다가온 것이다.
“기연 씨. 할 말이 있습니다.”
“…….”
“사실… 말입니다.”
“…….”
“그러니까… 후우… 그러니까.”
“말하지 않아셔도 돼요.”
“네?”
“…….”
“…….”
“사실 알고 있었으니까요.”
“…….”
“그야. 엘리오스 님. 저와 같이 있을 때면… 매번 다른 분을 생각하시는 것 같았거든요. 제가 조금 눈치가 빨라요.”
“…….”
“참 웃기죠. 처음에는 분명히 대용품은 싫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대용품이라도 좋다고… 생각이 들지 뭐예요. 많이 만난 것도 아니고… 그냥 스치듯 슬쩍 지나간 것뿐인데… 저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죄송한 게 아니에요. 어쩔 수 없는 거니까. 오히려…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붙잡으려고 했었던 제가… 조금… 욕심을 냈었던 거죠. 사실… 엘리오스 님이 당황하실 걸 알면서도… 무리해서….”
“…….”
“이번에는 놓치기 싫었거든요. 아니.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운명의 붉은 실이라고 말한 건 거짓말이 아니에요. 저는 정말로 엘리오스 님과 제가 인연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지금도 믿으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기연 씨.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주십시오. 혹시 엘룬 님께서….”
눈물 왈칵!
“더 이상 저를 비참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
쏟아지는 눈물.
절절한 감성.
스스로 느끼기에도 완벽함이 묻어나오는 장인의 솜씨.
정식으로 만난 지는 24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운명의 붉은 실로 이어진 이 연인의 헤어짐은 마치 그 동안 영겁의 시간을 함께 한 연인처럼 느껴졌다.
“정말로 즐거웠어요.”
괜찮다는 듯한 미소.
눈으로는 눈물을 쏟고 있었지만 입가에는 작은 미소를 그린다.
엘리오스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이기연은 그의 손을 뿌리친 채로, 꿈의 도시라고 불리는 라베하의 빛 속으로 사라졌다.
익숙하지 못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준비가 되었구나. 나의 아이야.]
“당… 당신은… 누구….”
[겔라입니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시여.]
“아니. 몰입 좀 하세요. 이거 누나한테 보내야 한다구요.”
[죄… 죄송합니다.]
“당신은… 당신은 누구죠? 이건… 도대체….”
[나, 나… 나느은… 콜록… 네 안에 있는 가장 깊은 어둠.]
‘얘 목소리 삑사리 나는 것 좀 봐.’
“…….”
[네 심연 속에 있는 어둠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