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50화
피크닉 (13)
[잘 들어가셨나요? 엘리오스 님?]
[네. 기연 씨는 잘 들어가셨습니까?]
[잘 들어갔으니까.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죠. 숙소 앞까지 직접 데려다주셨는데 ㅎㅎ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이렇게 인연이 이어지게 될 줄은 몰랐는데. 참 신기하네요.]
[네.]
[사실은 어제 만남이 끝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렇게 다정하게 안아주실 줄은….]
[어제는 제가 죄송했습니다. 기연 씨에게 정말 큰 결례를 범했습니다.]
[그 실수를 오늘 만회한 셈이군요.]
[그렇게 생각해 주신다니 다행입니다.]
[아무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거나 고민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딱히 언론에 알리지 않으셔도… 아니,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리면 그러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조금 부담스러워서… ㅎㅎ]
답장 안 오자너.
우리 오늘부터 사귀기로 한 거 모르나 봐.
[아직은 그냥 가볍게 만나는 느낌인데… 제가 괜한 걱정 하는 거일 수도 있겠지만… 에베리아의 후계자라든가… 그런 여러 가지 문제들이 있잖아요. 물론 엘리오스 님이 거기까지 생각하고 계시면 저는 기쁘겠지만… 아직은… 아직은 저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달까… 조금 성급하기보다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고 싶어요.]
당황했나 봐.
[혹시 기분 나쁘지는 않으시죠? ㅜ]
진짜로 당황했나 보네. 읽기는 하는데 답장이 안 오네.
오해의 소지는 있을 수 있었다. 딱히 엘리오스에게 고백을 들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모든 관계가 말로만 정의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안아주고 아무 말 없이 숙소까지 손깍지 끼고 데려다줄 정도면 이미 간접적으로 단순한 데이트 상대 이상이 된 거지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 간의 행동과 감정으로 관계가 정의된 셈.
저 엘프 놈은 몰라도 순수한 이기연의 입장에서는 고백으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다.
‘단순한 감정의 교류가 아니었자너.’
엘리오스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영혼의 교류. 그 누구도 우리의 영혼의 교류가 평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거라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
우리는… 분명 운명이라는 거대한 물살을 타고 있었다.
그날, 엘리오스와 이기연은 비가 갠 뒤의 하늘을 보며 서로의 손가락에 연결되어 있는 붉은 실을 틀림없이 확인했다.
‘이래놓고 입 꾹 닫고 있으면 양심이 없는 거지. 어딜.’
답장이 도착한 것은 약 20여 분이 지난 이후였다.
[기분 나쁘지… 않습니다만….]
망원경으로 시선을 돌리니 여신의 손거울을 책상 위에 올려놓은 채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조금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네?]
[이렇게 메시지로 말씀드릴 내용이 아니라. 혹시 내일 만나서 직접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아… 네. 물론이죠. 기대해도 되나요?]
[아니…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아무래도 이 영혼의 교류를 없었던 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느낌.
한숨을 쉬면서 손가락으로 손거울을 꾹꾹 누르는 녀석의 모습은 온갖 근심과 걱정이 들어서 있었다.
아마 조혜진이 없었다면 그대로 이기연과 이어지는 루트를 탔을지도 모르겠지만 두 여자를 두고 갈등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싸가지 없는 새끼. 진짜.’
기존에 마음이 있었던 여인,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고 인간이라는 종족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였으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여인, 조혜진.
어쩌면 일생에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을 사랑이라 느꼈을 때 갑작스레 녀석의 마음에 다른 여인이 들어왔다.
‘지금 내 포지션은….’
왠지 모르게 신경 쓰이는 사람일 거야.
말 그대로 현재의 이기연의 포지션은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사람이다.
물론 외부적인 요소를 보면 신경 쓰이는 사람 이상이다.
엘룬이 점찍어 준 미래의 짝이었고 운명의 붉은 실로 연결되었다고 판단되는 여인.
녀석의 마음속으로도 도저히 이기연을 내버려 둘 수 없었을 것이다.
지혜 누나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기연은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니까.
실제로도 이기연은 무척 불안한 심리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모든 걸 다 잃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배신당했다.
태연한 척, 강한 척, 당당한 척하고 있었지만 영혼 깊숙한 곳에 있는 상처를 녀석이 알아보지 못할 리 만무.
엘리오스는 이기연의 상처를 처음으로, 가장 똑바로 직시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대륙멸망 떡밥도 있으니까.’
[지혜 누나.]
[지금 이지후예요. 지금 혜진이랑 문자하고 있으니까 조금 있다가 이야기해.]
[아니, 그게 아니라. 얘 거의 넘어온 것 같아. 엘리오스랑 오늘부터 1일인 듯?]
[…….]
[…….]
[예상은 했는데. 지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네. 그 엘프 놈은요.]
[일단 억지로 1일이기는 한데… 지조라는 게 없는 것 같기는 해. 마지막 시험은 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은데?]
[아니. 그래도 해야죠. 원래 인간이든 엘프든 간에 가장 최악의 상황에 그 본성이 튀어나오는 법이에요. 솔직히 기연이도 백 퍼센트 넘어왔다고 장담 못 하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이거 끝내야 돼.]
[뭐?]
[이거 스토리요. 그냥 가볍게 해볼 생각이었는데 다음이 또 언제 올지 모르겠으니까. 어떻게든 끝을 봐야죠. 휴가 오길 잘했어. 이게 휴가지.]
[대륙멸망 시나리오 진짜 쓰자고?]
[설마 진짜로 하겠어요? 분위기만 내는 거예요. 분위기만. 설정집 새로 보낸 거 읽었어요? 그거 확인한 이후에 다시 이야기해요.]
[오늘은?]
[오늘은 여기서 끝내야죠. 오빠도 오빠 할 일 해요. 오빠가 제일 좋아하는 거 있잖아. 오빠 취미 생활.]
[뭐.]
[망원경 가지고 얘들 노는 거 구경하는 거 있잖아요. 관음하는 거.]
‘이 누나는 뭐 말을 그렇게 해.’
근데 틀린 말은 아니기는 하다.
‘애들 노는 거 보면 재미있잖아.’
처음에 왔을 때는 솔직히 욕이 나오기는 했지만 이만하면 돈을 쏟아부은 보람이 있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 한 잔 더 주쇼!
-취하셨습니다. 예리 씨.
-근데 기영이 오빠랑 현성이 오빠는 뭐한대?
‘기영이 오빠라고 부르는 거 보니까 취했자너.’
-거 형님은 얘들이랑 놀고 있는 것 같고… 현성이 형씨는 뭐 중요한 이벤트를 준비한다고 하던데…
-그거 끝나면 우리도 모일 수 있는 거 맞지?
-단체 일정은 나와 있습니다. 디아루리아 님이나 막스 때문에 취소되기는 했지만 아마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저희도 모일 수 있을 겁니다. 아! 벨리에 씨, 알프스 씨. 여깁니다.
-선배님들 안녕하세요.
-뭘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하고 그래? 편하게 하라니까. 편하게.
-지킬 건 지켜야지. 애들 버르장머리 없어진다니까. 덕구 아저씨. 우리 때는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많이 흘렀다. 많이 흘렀어.
간단하게 길드 내 소모임을 가지고 있는 박기리 삼남매와 신입들.
-안 된다니깐요. 정하얀 님. 아빠를 찾아라는 아이들만 참가할 수 있다고 했어요.
-나, 나, 나도 참가하고 싶은데. 오빠가 상을 준다고 했었단 말이야.
-그럼 세라한테 부탁하면 되죠. 분명히 세라가 찾아낼 테니깐요.
-그… 그럴까? 그렇게 되겠지?
-네. 물론이죠. 그러니까 이제 자러 가요.
이제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하는 정하얀과 한소라.
-평화롭군요.
-예.
-부디 이 평화가 계속되면 좋을 텐데….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하늘을 바라보는 엘레나와 편안한 얼굴로 차를 들이켜는 선희영도 보인다.
그렇게 늦은 시간이 아니었지만 다들 나름대로 여가생활을 즐기고 있는 모습에 미소가 그려진다.
장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이템 샵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박리안이나 오랜만에 밤늦게 데이트를 나온 유아영과 김창렬.
뒤늦게 도착한 라파엘 파티는 도시를 둘러보기 여념이 없었고 희라 누나는 카스가노 유노와 함께 앉아 커다란 대접에 발효주를 담아 들이켜고 있었다.
스미스 대령은 혼자 바에서 분위기 잡고 있고….
‘아! 안개 소환사도 불렀어?’
그 외에도 초대된 몇몇 이들은 친하다기보다는 일면식이 있는 이들이다.
대충 도시를 한 바퀴 돌고 나서 슬슬 잠자리에 들려는 찰나에 깨달은 것은 아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얘네들 어디 갔어?’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디아루기아도 보이지 않는 상황.
망원경을 라베스 사막으로 확대시키는 것으로 모자라 한참이나 찾아 나선 이후에야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야. 너네 뭐 해?’
-준비됐어?
-예. 누님.
-네! 언니!
‘거기 어디야?’
-어그로 잘 끌고 있어! 케루빔! 쓰로! 너 정신 안 차려?
-죄송합니다.
-세나! 세나! 세나! 대답해야지!
-네… 네! 누, 누, 누나님!
-막스 지시대로 움직여! 좌표는 막스가 전부 찍어줄 거야! 명령대로만 움직이면 다칠 일 없어. 겨우 전설 등급 던전이야. 겨우! 이이익! 이 쓸모없는 동생들! 비켜! 변신할 거니까!
-피해! 케루!
-누나님! 아직 쏘지 마세요! 케, 케루가… 케루가!
-케루빔은 이미 이동시켰거든! 그렇지? 도미니온스?
-네! 언니!
오랜만에 드래곤으로 변신한 디아루리아의 거대한 모습이 보인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숨결은 전성기의 디아루기아가 쏘아내던 브레스와 유사하게 느껴질 정도.
정체불명의 몬스터는 브레스에 직격당하자 벽에 처박히며 비명을 질러댔고 쓰로누스는 검을 들고 녀석의 목을 치기 위해 공중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원해! 이제 겨우 첫 번째 보스야! 도대체 뭘 배운 거야! 던전들 많이 다녀봤다며! 숙제로 많이 해결해 봤다면서!
-얘… 얘네들이 조금 달라요. 언니.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몬스터들은….
-제길! 막스! 진영 변경해! 아무래도 안 되겠어! 전술 디아루리아야!
-네! 누나!
골렘들에게 보호받고 있는 막스의 위로 수많은 화면이 보이기 시작, 다시 한번 인간으로 변신한 디아루기아가 검을 들고 쓰로누스를 밀치는 것이 보였다.
-내가 해결한다! 지원해!
-네… 네!
라베스 사막에 있는 던전들 전부 밀어버린 거 아니었어?
-내가 여기에 던전이 있을 때부터 알아봤지. 너희들도 알고 있다시피 여기는 붉은용병이 한 번 지나친 지역이야. 그런데 왜 이곳에 던전이 남아 있는 걸까?
-그건….
-그래. 아마 아빠가 만들어놓은 던전일 확률이 높아.
‘아니야. 내가 안 만들었어.’
-아마 우리를 시험하려고 하는 거겠지. 성인식 같은 개념으로 말이야.
-그런 걸까요? 언니? 아버지가….
-멍청하긴! 왜 우리가 아직 파란 길드의 정식 배지를 받지 못하고 있겠어? 아직 자격이 없다는 거야! 육체적으로 성장했을지는 몰라도 정신적으로는 성장하지 못했다는 거라고!
‘너네 지금 뭐 해.’
왠지 모르게 일이 꼬일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 본능적으로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뗀 이후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이번에는 얼굴을 흉신악살처럼 일그러뜨린 김현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길. 도대체 어째서 성공하지 못하는 겁니까….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발 살려주십시오. 노을빛의 검신이시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단 말입니다. 기영 씨가 얼마나 기대하고 있을지… 원인이 뭔지는 아시는 겁니까?
-촉, 촉매가 부족합니다. 샤넬리아 에르메스가 저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격이 높은 영혼이라… 그가….
-후우… 모든 게 완벽해야 하는데….
너는 대체 뭐 하는 거야….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뭡니까?
도대체 뭐 하고 있는 거냐고….
-최소… 신화 등급의… 촉매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