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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47화 (1,04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47화

피크닉 (10)

“당신은….”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이기연이라고… 아니면, 어째서 여기 있는지 물어보시는 건가요?”

“…….”

“일하고 있었거든요.”

“…….”

“아까 계시던 바에서요. 뭐, 방금 출근한 거지만. 덕분에 오늘은 하루 쉬게 됐네요.”

익숙한 모습이었다. 단순히 바에서 일하는 사람치고는 엘레나를 대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환자를 치료해 본 경험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표정이 눈에 보였던 것일까. 조금은 기분 나쁜 티를 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륙전쟁 때, 간호신관으로 참여한 적이 있을 뿐이에요. 한때 모시고 계시던 분이 있어서… 뭐… 제 발로 걸어 나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분의 은혜 때문인지 신성력을 잃지는 않았거든요.”

“…….”

“왜요. 의심스러우신가요? 갑자기 낯선 사람이 나타나서 접근하고… 친절을 베푸는 게… 아니면 제가 인간이라 그런 건가요?”

“그런 것이… 아닙….”

“대륙에 떨어진 소환자였어요. 한때 모험가로서 활동한 적도 있었고… 모험가 길드에서 접수원으로 일한 적도 있었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간호신관으로 전쟁에 참여한 적도 있었고… 심지어… 심지어 노예로 지낸 적도 있었고요. 다른 것도 전부 다 설명드려야 하나요? 제가 어디서 뭘 하다가 이곳으로 온 건지… 전부 말씀드려야 되나 봐요? 그래야 마음이 편하실 것 같으세요? 신상명세라도 자세하게 알려드릴까요?”

“아닙니다. 제가 무례를 범했군요. 진심으로 사과드리겠습니다.”

“이웃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지 말고 사랑하라. 엘룬 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지 않으시고….”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엘룬 님의 말씀은….”

‘설마….’

“…….”

“…….”

“이 정도면 될 거예요. 호흡도 안정적이시고… 갑작스레 큰 신성력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 원인이니 아마도 금방 회복하시지 않으실까 싶어요.”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모습, 그제야 정체불명의 여인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전형적인 사막 엘프들의 복장 양식을 그대로 하고 있는 모양새, 라베하에 많은 이들이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는 복장이었다.

화려하고 반짝이는 장신구가 달려 있는 하의는 다리 한쪽을 내놓을 수 있게 깊게 파여 있다. 배꼽을 훤히 내놓고 있는 상의와 목에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목걸이들이 눈에 띈다.

안이 비치는 얇은 천으로 노출된 부분을 가리고 있었지만 말 그대로 얇은 천일 뿐이다.

곱게 땋은 머리 위로 주렁주렁 달려 있는 머리 장식, 이마에 작은 보석 같은 것으로 장식한 것은 사막 엘프들이 자주 사용하는 대표적인 장신구였다.

이기연이라 자신을 소개한 여인이 입가를 가리고 있는 투명한 천을 걷자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다시 한번 소개드려야겠네요. 이기연이라고 합니다.”

‘아름답다.’

순수한 감상이었다.

다른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순수한 감상으로써의 표현이었다. 마치 작품이나 자연물을 보고서 느낀 감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리라.

이상한 상황이었다. 최소한 엘프들은 누군가의 겉모습을 보고 아름답다 여기지 않았으니까.

엘룬의 축복을 받아 타고나길 미적인 존재로 태어난 엘프들은 겉모습보다는 내면의 모습에 더욱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 역시 그랬고… 아니, 모든 엘프들이 그러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저 여인을 보자마자 아름답다고 느끼고 있다.

‘이상해.’

마치 늪 같지 않은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점점 더 빠져들게 되는… 이상하게 얼굴이 붉어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다.

뭔가 마법적인, 혹은 연금술이나 주술의 효과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순간적으로 그녀의 모습이 하얀색 뱀처럼 보였다면 기분 탓일까. 그녀의 눈과 그녀의 입술이 마치 뱀의 그것처럼 보였다면 그냥 착각일까.

그때였다.

모든 것을 빨아들인 것만 같은 그녀의 흑요색 눈동자에서 형용할 수 없는 어둠을 목격한 것은.

“아….”

순식간에 퍼져 나간 어둠이 온몸을 끌어당기는 것으로 모자라 마치 영혼마저 갉아먹는 것처럼 느껴진다.

찰나였지만 영겁의 시간처럼 느껴진 그 순간이 지나간 이후…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손발이 덜덜 떨려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한 번 몸을 휘감은 기분 나쁜 감각이 사라지지 않는다.

‘도대체 뭐야… 도대체 이건… 이건….’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였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려고 하고 있는 건지, 도대체 이 여인은 누구이고 무엇인지, 어째서 자신의 앞에 나타났는지, 라베스 사막에서의 이 만남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잡으며 시선을 돌린 곳에는 엘레나가 편안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당연하게도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네 앞에 너의 운명의 상대가 나타나리라. 그 아이를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거라. 대륙에 평화와 사랑을 불러올 그 아이를 아껴주거라. 너에게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 줄 그 아이를 위해 살아가거라. 그리하지 않으면… 그리하지 않으면… 대륙에 파멸이 찾아올 것이니….’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이상하지 않은가. 엘룬 님의 예언이 떨어진 이후, 이 여인이 자신에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 정말로 우연일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이 여인과 이곳에서 이렇게 마주친 것이 정말로 우연일까.

운명의 상대, 대륙의 파멸… 평화와 사랑을 불러올 여인.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 줄 아이.

너무나도 키워드가 많아 뒤죽박죽 정리가 되지 않는다. 그 예언이 뜻하는 바가 내가 생각한 그것일지에 대한 확신 또한 없다.

하지만….

무언가가 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다. 다시 한번 이 대륙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이건….

‘엘룬 님의 일이야.’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마 마스터께서 파란에 연락을 취해주실 거예요. 엘레나 님을 곧 데리러 오실 테니….”

“연락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대신.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잠깐만….”

“이런 상황 어디서 많이 겪어본 것 같은데… 실례라고 하면 어떻게 하실 건데요?”

“…….”

“실례가 되면 어떻게 하실 거냐구요.”

“그게….”

“뭐야. 재미없게. 농담도 제대로 못 받아줘요?”

“아니….”

“나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하나같이 전부 센스가 없담. 참….”

“데이트가 아니라.”

“어머. 부끄러워라. 제가 오해했네요. 그럼….”

“그저 잠깐…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도와주신… 감사 인사를….”

“에이. 겨우 이 정도로 감사의 인사라뇨. 서로서로 돕고 살아야죠. 굳이 인사하실 필요 없어요. 대가를 바라고 한 것도 아니고… 의심하시는 것처럼 다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러니까 들어가세요. 엘리오스 님 걱정처럼 다시 나타나거나 이번 일을 빌미로 뭔가 요구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런 게 아닙니다.”

“괜찮다니까요. 굳이 따로 감사받지 않아도… 빚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친절은 친절로 받아들이세요. 엘프들이 융통성 없다는 편견을 굳이 심어주실 필요 없잖아요.”

“아니….”

“그럼 안녕히. 만나서 즐거웠어요. 엘리오스 님.”

“그렇다면 데이트… 데이트라고 합시다.”

“네?”

“데이트여도 좋으니 잠깐… 이야기를 나눠주셨으면 합니다.”

“흐응….”

“왜… 그러십….”

“아니에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네요. 그럼 나갈까요?”

즐겁다는 듯이 가방을 챙기며 문을 나서는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예상하기 힘들고 어디로 튈지 가늠이 되지 않는 사람.

하지만 결코 무례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방을 배려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관심 없을 법한 대화도 재미있게 들어주는 부분이나 그 외에도 최대한 자신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는 듯이 느껴진다.

어쩌면 평소에는 농담을 즐기지 않는 성격일지도 모른다. 단지 어색하고 딱딱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솔직히 지금 보여주고 있는 모습이 정말 그녀의 모습이라는 보장도 없다. 아직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마치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군.’

나쁜 의미는 아니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싫어하는 듯한… 항상 진심을 숨기고 있는 듯한 느낌.

전부를 느낄 수는 없었지만 이 여인의 영혼 깊숙한 곳에 난 상처가 느껴진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상처 말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그 상처를 표현하지 않는다. 영혼을 보는 것이 서투른 자신이 느끼기에도 확연히 볼 수 있는 상처건만, 눈앞에 있는 여인은 그런 상처 따위는 겪은 적이 없다는 듯 꿋꿋하고 밝고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하고 있었다.

그래… 마치 세상에 상처받은 적이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여기로 오게 됐어요. 왜요. 사람은 언제나 훌쩍 떠나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잖아요. 취업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답니다. 아까 보셨던 리자드맨 마스터와 조금 연이 닿아있어서….”

“그렇군요. 혹시 어떻게….”

“어떻게 만났겠어요. 공화국에서 뒷골목에서 바를 운영하는 리자드맨 마스터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제가….”

“…….”

“누구나 그렇지만 저에게도 조금은 힘들었을 시기가 있었거든요. 인생을 다 포기하고 싶었을 때. 정말로 가진 걸 전부 잃어버려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아야 했을 때, 과거의 인연을 제 발로 차버린 걸 후회하며 혼자 남았을 때… 이미 떠나간 사람이 진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깨달았을 때… 지독한 배신을 당해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

“그때 마스터가 손을 내밀어 주셨거든요. 있을 곳을 마련해 주시고… 일자리도 마련해 주시고… 모든 걸 잃어버린 저를 받아주신 거죠.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겠더라고요. 리자드맨 마스터에게 도움을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고, 여기까지 와서 엘리오스 님과 데이트를 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

“자세한 이야기는 재미없을 거예요. 에베리아에서 곱게 자라신 왕자님께서 듣기에는 불쾌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전혀 불쾌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알고 있어요. 그냥 하신 말씀이라는 거… 그래서. 그 용건이라는 게 뭔가요?”

“…….”

“저에 대해서 뭘 알고 싶으신 건가요?”

“…….”

“라베하의 작은 바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 뭐가 그렇게 궁금하셨던 건가요?”

“그건….”

“…….”

설명할 수가 없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신탁을 받았다고? 당신이 나의 운명의 상대일 지도 모르고… 당신이 세상을 파멸시킬지도 모른다고?

모두가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물론 신탁이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엘룬께서 거짓을 말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거니와 강림이 흔하게 일어나는 일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부정하고 싶어진다. 이게 용서받을 수 없을 행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흐름으로 가지 않아 줬으면 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게 된다.

만약 예언이 사실이라면….

‘혜진 씨와는….’

혜진 씨와는 어떻게… 되는 거지.

예언대로 이 여인과 자신이 이어질 운명을 타고났다면….

그것이 정말로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면….

모든 게 엘리오스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라면….

자신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걸까.

“한 잔 더 해요.”

조심스레 잔을 내미는 순간,

“어….”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는 한 인형이 시야에 들어왔다.

“잠깐….”

뭔가 말할 새도 없이 주점 안으로 들어온 조혜진이 황급히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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