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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1043화 (1,043/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1043화

피크닉 (6)

‘둘이서 만나는 게 더 깔끔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면 너무 티 나는 거 아닌가. 누가 봐도 방해하러 왔다고 광고하는 것 같은 느낌 아니냐구.

‘이 누나 이 갈고 있는 것 좀 봐.’

누나가 여기까지 굳이 행차한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지만 삐죽 튀어나온 입을 보고서는 뭔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얀이랑 내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상황실에서 현장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을 테니 엘리오스가 그녀의 신경을 긁는 발언을 한 것이 분명.

굳이 한소라를 데리고 온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아니, 굳이 이유가 필요 없었을 수도 있고… 아마….

‘주변에 있는 거 그냥 붙잡아 왔나 보네.’

정하얀의 근처에서 배회하고 있던 한소라를 붙잡아 왔다는 것이 가장 가능성 높은 가설이었다.

문제는 굳이 한소라였어야 했냐는 것. 이지혜와 한소라가 자리에 등장했을 때부터 입술을 꽉 깨물고 있는 정하얀의 얼굴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다.

바들바들 떨고 있는 손, 마치 배신당한 것만 같은 표정.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냐는 듯이 한소라를 흘겨보고 있는 정하얀의 모습은 당장에라도 울음을 터뜨리며 테이블을 부숴 버릴 것처럼 보였다.

마치 죄라도 지은 것처럼 정하얀을 바라보는 한소라의 표정도 좌불안석이기는 마찬가지.

예전에 한 번 있었던 박미진 사건의 재림이 오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으리라.

대외적으로 한소라는 정하얀 이외의 인간관계가 전무한 상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한소라에게 정하얀 외에 다른 친구가 없어야 했다.

서로에게 친구는 둘밖에 없었고, 다른 친구와 함께 나가거나 여가생활을 즐기는 것은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분명히 한소라는 정하얀에게 근처에 있겠다고 이야기를 꺼냈을진대. 갑작스레 이지혜와 함께 등장한 그녀를 보고 기분이 다운될 수밖에 없으리라.

“정, 정하얀 님. 제가 설명드릴 수 있어요.”

“…….”

“제가. 전부 설명드릴게요. 정하얀 님. 그러니까.”

“놔, 놔… 이익! 놔….”

“정하얀 님. 그러니까. 잠깐 이야기 좀.”

한쪽에서는 이러고 있었고.

“지혜 씨? 그러니까… 이렇게 갑자기….”

“마침 소라 씨랑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거든요. 오랜만에 쇼핑이나 할까 싶어서요. 근데 웬걸. 혜진 씨와 명예추기경님께서 보이지 뭐예요? 마침 함께하고 계신 것 같아서… 염치 불구하고 이렇게 끼어들게 됐네요. 괜찮죠?”

“네? 그러니까 저는….”

“제가 두 분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걸 방해한 것은 아닌가 걱정되네요. 엘리오스 님.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한쪽에서는 저러고 있다.

‘하나도 안 죄송한 표정이자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 말 그대로 염치없는 사람의 전형, 눈치 없이 끼어드는 사람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이지혜 역시 자신이 그렇게 보인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행해도 상관없다고 판단하는 이유는 하나.

“아… 네. 괜찮습니다. 이지혜 님.”

왜냐.

‘엘리오스는 절대로 거절 못 할 거야.’

여기서 거절하는 건 말이 안 되자너.

이지혜와 내가 조혜진과 가까운 사이라는 사실을 엘리오스가 모르고 있을 리가 없다.

우리 혜지니와 시간을 꽤 보냈다면 당연히 우리에 대한 이야기도 한두 번은 나왔겠지.

가장 친한 친구는 이기영이고, 그다음이 이지혜라고.

어떤 곳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빠지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까.

아무튼 간에 잘해 보고 싶은 이성의 친구에게 잘 보여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오늘이 아니면 안 돼’라는 정신으로 이지혜와 이기영을 쳐내는 것보다는 받아들이는 게 합리적이고….

무엇보다 사적으로 만날 기회가 없었으니 한번 마주쳐 보는 게 좋다 여길 수도 있다.

저번 회의 때도 점수를 따려고 아등바등거리는 모습을 보였으니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된 점수를 따겠다고 다짐하고 있겠지, 뭐.

상황을 지켜보던 조혜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커플이라니… 엘리오스 님과 저는 아직 그런 사이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런 식으로 무작정… 두 분 모두 이게 엘리오스 님께 실례라는 건 생각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어머. 저랑 소라 씨도 찐한 사이는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더욱더 같이 놀자고 하는 거죠. 그리고 엘리오스 님도 괜찮다고 하시는 것 같은데요. 뭐. 그렇죠? 엘리오스 님?”

“저는 괜찮지만 파란 부길드마스터께서는….”

당연히 긍정의 표현을 보내주는 게 옳지.

“저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함께 이렇게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지혜 씨와 소라 씨도 함께 드시죠.”

“파란 부길드마스터님의 말씀인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겠어요? 그럼 염치 불구하고 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할게요. 소라 씨. 이쪽에 앉아요.”

“네? 네? 네. 저 잠깐….”

‘오늘 아침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거야.’

“여기는 뭐가 맛있을까요? 어머. 이거 지혜 씨가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네?”

“왜 다른 걸 드시고 계실까. 저랑 같이 쉐어해요.”

“아… 네.”

‘진짜 오늘 일어났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거라고.’

“오, 오빠는 뭐 드시려고요?”

“하얀이는 뭐가 먹고 싶은데?”

“저, 저, 저는 다 괜찮아요. 배, 배, 배신자가 만든 도시락만 아니면 전부 다 좋아요.”

‘나도 시바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

“정하얀 님… 그러니까.”

한소라는 정하얀 쪽으로 의자를 슬그머니 옮기고, 이지혜는 조혜진 쪽으로 바짝 다가선다. 둘 둘 둘이 아니라 삼 대 삼이 되어버린 테이블은 혼란스럽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일단 교통정리 좀 해야겠다.’

“소라 씨가 하얀이랑 같이 놀고 싶었나 봐. 하얀아. 굳이 지혜 씨까지 데리고 온 걸 보면.”

“네… 소, 소라가요?”

“맞… 맞아요. 정하얀 님. 저는 그냥 정하얀 님이 걱정돼서.”

“그, 그, 그래?”

“이지혜 님과는 그다지 친하지도 않고… 한 번도 따로 만난 적이 없어요. 같이 쇼핑 나갔다는 것도 거짓말이구요. 쇼… 핑은 정하얀 님이랑 같이 하기로 했는데… 제가 잊어버릴 리가 없죠. 그렇죠?”

“아… 그… 그렇구나.”

“그리고… 제가 다른 친구가 어디 있겠어요. 정하얀 님뿐인걸요.”

‘너 인맥 넓잖아. 사교계에서 날아다닌다는데?’

“정하얀 님이랑 같이 놀 시간도 부족한데….”

“그… 그렇지? 소라가 그럴 리가 없지….”

다시 한번 기분이 밑바닥 치던 정하얀을 더욱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에는 성공, 화기애애하게 서로 금방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기야 했다.

“이것도 같이 드셔보세요. 정하얀 님.”

“으응… 오, 오빠. 이거 나눠 먹어요. 소, 소라도 이거 내가 나눠줄게.”

“정말요?”

“응.”

‘하얀이 진짜 행복해 보이네.’

양 볼 가득히 음식을 씹으면서도 연신 웃음이 흘러나오고 있는 것만 같다.

“오, 오, 오빠. 우리 결혼하고도 이렇게 살면 정말 좋겠다. 그죠?”

“그러게.”

“소, 소, 소라도 옆 방에 같이 살고 그러면 될 것 같아.”

‘얼마 전까지는 옆집이었는데. 그새 옆 방까지 왔네. 이러다가 안방까지 들이겠어.’

“저야 좋죠. 세라 봐줄 사람도 필요하니까….”

“아! 맞, 맞다. 세라도 있었지? 오빠. 세라도 내일 여기 오는 거 맞죠?”

“응. 아마 디아루기아와 함께 올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세라 본 지가 오래된 것 같은데….”

“맞… 맞다! 세, 세라 못 보셨겠구나. 우리 세라가요. 요즘 진짜 열심히 하고 있는 것 같, 같더라고요. 가르쳐 주는 것… 것도 잘 배우고.”

“그래?”

“네. 바, 바보는 아니었나 봐요. 다… 다행이죠.”

‘칭찬하는 거야. 먹이는 거야.’

“그리고 오빠랑 같이 라이오스 쪽으로 놀러 갔었던 것도… 세라가 진짜 좋아했었거든요. 다음에도 같이 갔으면 좋겠어요.”

“또 가면 되지. 이제 시간은 많은데. 내일 애들 오면 또 같이 놀러 갈 거야.”

“푸흐흣. 매일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다. 그죠.”

사실 정말로 평범한 건데….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까 가슴이 찡하기는 하다.

같이 아침 먹고 수다 떨고 예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같이 이야기하고, 앞으로 해야 할 일, 맞이할 일들에 대해서 고민하고 웃고 즐기는 거.

너무 평범해서 매일매일이 오늘 같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냥 너무 바쁘게만 지냈나. 너무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려온 것 같은데.’

지구에서부터 계속해서 이런 상황을 기다려왔던 정하얀에게는 더 의미가 크게 다가왔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도 우리의 모습이 이상적인 가족에 가까워 보였으니 말이다.

‘그에 비하면 저긴 지옥이자너.’

붙어 있지만 극단적으로 달라 보이는 두 테이블의 분위기.

마치 면접이라도 보는 것만 같았다.

귀를 기울이기가 무섭게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혜진 씨에게 엘리오스 님의 이야기는 가끔 전해 들어요. 많이는 아니고… 그냥 가끔이요.”

‘나한테는 이야기 안 하던데. 시바.’

“네. 저도 지혜 씨의 이야기는 많이 전해 들었습니다. 순수하고 올곧고 강한 분이시라고….”

“아. 그래요?”

“네.”

“저는 엘리오스 님이 어떤 분이신 줄 잘 모르겠는데… 그냥 가끔 만나고 있다는 것만 전해 들었거든요. 그리고… 우리 혜진이한테 열렬하게 구애하시는 분이라는 것도….”

“하하… 하….”

“혜진 씨의 제일 친한 친구로서 여러 가지 걱정되는 게 사실이거든요. 엘리오스 님이야 대륙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지만 아시다시피 우리 혜진이가 좀….”

“지혜 씨… 이제 그만… 하셔도….”

“짧은 연애라도 하면서 가볍게 만나보는 것도 괜찮아 보이기는 했는데. 알고 보니까 엘프 왕국의 여왕으로 모셔지게 생겼지 뭐예요. 그리고… 종족 차별 발언을 하는 건 아니지만 엘프들이랑 인간이 워낙 다르잖아요. 대표적으로 수명 문제도 있고… 생활양식도 너무 다르고… 이런 차이점을 인지하고 계신 건지… 생각을 하시고 구혼을 하시는 건지….”

‘누나 온도 너무 올라갔어. 온도 좀 내려. 벌써부터 그렇게 화끈하게 달리면 어떻게 해.’

“진지하게 미래를 머릿속으로 그리고 계시면서 구혼을 하시는 거라면… 생각할 게 조금 많지 않나요? 물론 두 분 이렇게 같이 다니는 거 보기 좋기는 한데….”

“…….”

“그리고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하지만 두 분 나이 차이가.”

조금 높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만 하세요. 지혜 씨.”

라는 조혜진의 목소리.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어. 온도 너무 올라갔다고 했지. 아무리 그래도 그런 식으로 하면 얘가… 화를 안 낼 수가 없자너.’

“말씀이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지혜 씨? 후우… 죄송합니다. 엘리오스 님. 제가 대신 사과를….”

“아… 아닙니다. 혜진 씨.”

이지혜의 눈에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악어의 눈물.’

“어… 지혜 씨…?”

“저… 저는 그냥… 흐윽….”

“죄송합니다. 지혜 씨….”

저 거짓 눈물 보라고….

“괜찮으십니까? 제가 말이 너무….”

“그냥… 혜진 씨가… 걱정돼서… 흐윽… 그래서… 그것뿐이었는데….”

순식간에 터지기 시작한 눈물샘.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순식간에 달라질 수 있는지 의구심이 들 지경.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엘리오스만이 마른침을 집어삼킬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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