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36화
뒷정리 (19)
이성보다는 공포가 몸을 지배하고 있다. 턱이 딱딱 부딪혀지는 것은 물론 손발이 떨려 제대로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미쳤어. 미쳤다고. 제기랄… 미쳤어.’
“나쁜 사람이 도망간다! 도망간다구! 소라야!”
‘제기랄… 소라는 또 뭐야. 제길… 제길… 한소라가 어디 있어.’
“저기 있다! 저기! 저기 있어! 저기 있다구!”
‘완전히 돌아버렸어. 저게….’
“저기 있다아!”
발견된 것은 자신이 아니다.
“으아아아아!! 살려줘! 살려줘어!! 아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달려가는 로빈우드가 눈에 보인다. 활도, 근접무기도 가지고 있지만 저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뒤로 하얀색 모자를 푹 눌러쓴 살인마가 단검을 들고 녀석에게 따라붙는 중, 도대체 왜 단검을 사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마법사가 붙으려고 하는 이유도 알 수 없거니와 허공을 향해 단검을 휘두르며 우는 모습도 이해할 수 없었다.
손맛이라도 느끼고 싶은 모양인지 느린 발걸음으로 몸을 웅크린 채로 달려가고 있다. 누가 봐도 기괴하게 보이는 모습이었다. 공포영화에 나오는 살인마들의 모습이 저러할까.
눈물을 훌쩍거리면서 단검을 휘두르며 달려가는 하얀 살인마는 결코 빠르지 않다.
심지어 너무 급하게 달려가다 넘어진다거나 제자리에서 허공에 단검을 휘두르며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탓에 시간을 많이 끌리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얀색 살인마는 점점 더 로빈우드에게 가까워진다.
‘어째서 저항하지 않는 거야.’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
‘어째서 창을 휘두르지 않는 거냐고.’
말 그대로, 어째서 자신은 무방비 상태에 있는 하얀 마법사의 목을 꿰뚫지 않은 것인가.
‘승산이 없어.’
두려움 때문이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공포에 질린 로빈우드는 저곳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하얀색 살인마의 단검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몸을 웅크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보였다.
다른 쪽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선희영.
한때 버림받은 자들의 성녀라고 불렸던 성인.
앞선 하얀색 살인마와는 확연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지만 저쪽 역시 소름이 돋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슬픈 눈으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로자리오를 쥐고 기도문을 외우는 행위를 반복한다.
이제 곧 피해자가 될 이를 위한 기도.
도망치던 한 녀석에게 손을 뻗자 그녀의 뒤로 사제복을 입은 유령들이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이단.
이단을….
이단이다! 이단이다!
고결하게 등장한 유령사제들이 살인귀로 변한 것은 부지불식간.
죽이자! 이단의 심장을 신께 바치자.
예언의 사제를 모욕한 죄인에게 고통의 철퇴를!
“아아아아아아악!”
귀가 찢어질 것만 같은 기분 나쁜 소음으로 만들어진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살인귀로 변한 유령들은 도망가던 남자를 덮치듯이 둘러싼다.
붉은색 무언가가 튀고 무언가가 삐져나온다. 혹시 좀비나 아귀들에게 둘러싸인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이 연상된다.
찌직. 찌이익. 쩌어억.
수녀복을 입은 수녀는….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제발….”
“그대의 죄를 벌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조용히 눈물을 뚝뚝 떨어뜨린다.
“부디 이 죄인을 용서하지 마시옵소서. 영원히 지옥의 겁화에 불타 고통받게 하소서.”
“저기 간다! 저기 간다!! 도망간다! 소라야!”
“아아아. 부디 저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리지 마시옵소서.”
“죽어! 죽어! 죽어어어!!”
“흑… 흐윽… 영원한 안식을.”
‘미쳤어.’
“찾았다! 소라야! 여기야!”
‘제기랄! 제길… 제길!’
분명히 자신을 쫓아오고 있다.
“소라야! 아악!”
꽈당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는 하얀색 살인마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지만 무기를 뻗을 용기는 없다.
무조건 멀어져야 한다. 저 하얀 살인귀에게서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그 와중에도 계속해서 명예추기경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와 꽂혔다.
-이제 일이 좀 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제길….’
-아! 뭐야. 저리 비켜요. 군사님. 뭘 자꾸 보여달라고 해요?
‘뭐?’
-아니, 군사님. 이거 게임 아니라고요. 왜요? 재미있어 보여? 하얀이가 만든 거라서 상용화는 불가능하다니까.
‘진청? 공화국의 진청? 지금 둘이 같이 있는 건가?’
그래. 분명히 둘이 만난다고 했었지.
쓰레기 같은 놈들. 모두 한통속이었구나.
대륙의 영웅이니 기적의 성자니 그림자의 영웅이니… 전부 다 똑같은 놈들이었다고.
“허억… 허억… 허억….”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도망간다… 도망간다!”
“허억….”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검붉은 무언가로 가득 찬 공간을 헤집고 다니자 갈고리에 매달려 있는 고깃덩이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간다.
‘시간을 벌 수 있을까….’
매달려 발버둥 치는 이들을 내린 이후에는 다시 한번 정신없이 뛰어간다.
아니나 다를까 하얀색 살인귀는 탈출한 이를 향해 단검을 내리찍는 중, 조금 시간은 벌었지만 아마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출구… 출구는 어디지?”
“…….”
“제기랄. 출구는 도대체 어디야.”
-글쎄 출구가 어딜까. 속는 셈 치고 한번 믿어볼래? 이대로 끝나면 너무 재미없는 것 같자너. 그러니까 좀 도와줄게.
‘함정?’
-함정은 아니에요. 내 눈에는 지금 네가 뭘 하고 있는지 다 보이는데. 설마 이깟 함정 같지도 않은 속임수를 들이밀까. 너 지금 바짝 엎드려 있자너. 기어서 이동하려고? 아! 거기서는 잠깐 숨 멈추는 게 좋겠다.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신 이후에 멈췄을 때였다.
“여… 여, 여기 있는 줄 알았는데.”
“…….”
“여, 여, 여기가 아닌가 봐. 다른 곳에 있나 봐. 다른 곳으로 도망갔나 봐. 소, 소라야. 어떻게 하지? 아! 소, 소, 소라는 없지.”
가까이에 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려온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진다. 혹시라도 소리가 새어 나가지는 않을까. 입으로 숨을 틀어막는다.
호흡이 점점 가빠짐에도 불구하고 숨을 토할 수 없다는 것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고통스러웠다.
‘후우… 후우….’
직후에는 심장이 멈출 것만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이 꽂혔다.
“찾… 찾았다.”
‘제발… 제발….’
-너 아니야.
타닥타닥 소리와 함께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귓가에서 계속해서 울리는 명예추기경의 목소리에 반응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은 당연지사.
이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 무조건 저기서 멀어져야 한다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되겠다. 아! 거기는 안 되는데. 희영 씨가 순찰 중인 것 같은데.
‘도대체 목적이 뭐야.’
-조금만 더 열심히 달려 봐요. 소리는 좀 죽이고. 하얀이 온다. 하얀이 올 것 같은데?
‘제길. 제길…제길!’
-하얀이다! 하얀이다! 하얀이 온다!!
“으아아아아아아!”
-농담이야. 농담. 농담이라구. 그러니까 그렇게 놀라지 마. 푸흐…푸흐흡. 꼬라지 좀 봐. 푸흡.
“제길… 어쩌다가….”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고? 난 잘 알겠는데. 원래 있잖아요. 사람은 분수에 맞게 살아야 되는 법이에요. 자기 능력 이상의 것을 얻으려고 하면 화를 당하는 법이라니까. 악취미로 보이지? 내가 이러는 게 악취미로 보이기는 할 거야. 응 맞아.
“제기랄….”
-네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맞아. 나도 좀 스트레스가 쌓였나 보다. 왜 내가 탈출구를 알려주는지 궁금하지? 그냥 네가 발버둥 치는 게 보고 싶어서 그래요. 얼마나 발버둥 칠 수 있나. 네가 욕심에 걸맞은 근성을 가지고 있나. 그게 보고 싶다 이거야. 잘하면 용서해 줄 수도 있고.
“…….”
-망둥아. 사실 너한테만 해주는 이야기인데 말야. 연방이 꽤 개편될 것 같거든. 그레고리 같은 경우에는 앞으로 개편될 연방의 상징적인 존재로 쓰려고 준비 중이었고… 네가 알게 모르게 공을 들인 것도 제법 많아. 근데 아쉽게도… 그레고리가 죽고 나서 그 자리가 붕 떠 버렸지 뭐야. 그래서 화도 나고… 이성도 잠깐 잃고… 그랬던 것 같아.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렸으니까. 화나는 게 당연하잖아… 근데 혹시 알아요? 네가 자격이 있다는 것만 증명하면 그 자리에 너를 쓰지 못할 이유도 없잖아. 조건이야 조금 걸리겠지만 교국의 성자는 인재를 가장 소중히 여기거든.
“…….”
-대화는 여기서 끝이야. 이제 슬슬 하얀이 오겠다. 탈출 루트는 지금 보내줄 테니까. 알아서 한번 해봐.
바로… 바로 근처잖아.
허겁지겁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는 시점. 믿을 수 있냐. 믿을 수 없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 중요했다.
‘제발… 제발….’
“허억… 허억… 허억….”
‘제발….’
출구처럼 보이는 곳이 시야에 비친다.
“허억… 허억….”
정신없이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
[탈출 불가.]
[대마법사 정하얀의 고유영역, 검붉은 놀이터의 탈출 조건을 완수하지 못하셨습니다. 탈출이 불가능합니다.]
“어….”
-푸흐… 푸하헤헤하헤하헤헤헷.
“어어….”
-푸흐허하헤하하하하하하핫! 기대했지? 너 기대했지? 그렇지? 아닌 척하면서 은근히 기대했지. 기대했잖아. 콜록! 참 멍청해요. 차암 또 속았네. 또 속으셨네요. 군사… 아니, 스퀴어트 님.
하얀색 살인귀가 일그러진 미소를 띠며 천진난만하게 달려오는 것이 보인다.
“살… 살려줘….”
-글세….
“살려주세요. 제발….”
-그을쎄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명예추기경님. 제발….”
-푸흐하헤헤헤헷. 나는 너를 용서하지만 희영 씨랑 하얀이가 너를 용서할까?
“제발….”
-푸흐하헤하하하하하핫!
“이… 이 더러운 개자식…. 이 개자식!
-하하하흐하허하하하하하하핫!
“할 줄 아는 게 이런 것뿐이야?”
자신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도 알 수 없다. 창을 쥔 손은 부들부들 떨리고 목이 터지라 소리를 지른다. 단순히 눈앞에 있는 살인귀를 피하기 위해서 말이다.
‘다가오지 마.’
“넌… 넌 결국 성공하지 못했어. 결국에는 합법적으로 나를 처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 거야. 이런 방식으로밖에….”
-뭐?
‘제발 다가오지 마. 제기랄.’
“결국 지는 게 두려워서!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할 수 없어서. 이런 방식으로밖에 일을 해결할 수 없었던 거야. 결국… 결국 그게 네 한계야. 이기영. 이게 네 한계라고! 넌 패배자고 실패자야! 네가 나와 다른 점은 나보다 이곳에 먼저 떨어졌다는 것뿐이야! 제기랄!”
‘제발 오지 마. 제발….’
-참나… 무슨 개소리를… 씨알도 안 먹히니까 발악하지 마세요. 나를 도발해서 우리 사랑스러운 하얀이를 피하겠다는 심산인가 본데. 그래 봤자. 분노만 키울 뿐이에요.
“증거를 찾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
“합법적으로 일을 처리할 자신이 없어서… 이런 식으로… 나를… 우리들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고 있지 못했던 것 아닌가? 그래서 분노한 것이 아닌가! 명예추기경! 나는 너 같은 놈들을 잘 알아! 너는 실패하는 게 두려운 거야! 제길! 실패하는 게 싫은 거라고! 누구보다도 많이 실패했기 때문이야. 성자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지. 너는 너 자신을 숨기고 싶은 거야.”
-…….
“어째서 명예추기경의 가면 뒤에서 네가 살고 있는지 알아? 인간 이기영이 실패했다는 걸 누구보다도 너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누구보다도 그걸 너 자신이 가장 잘 인지하고 있어서… 그렇기 때문에 네가 가면을 벗지 못하고 있는 거야. 결국… 결국 진짜 널 봐줄 수 있는 건 없다는 걸 누구보다도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지? 그래서 숨고 있는 거지? 그렇지? 이 추악한 자식. 이 역겨운 자식. 이 괴물 자식.”
-…….
“이 게임에 명예추기경이 응하지 않고 선을 넘어버린 건. 결국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제기랄! 넌 결국 진 거야. 이기영! 내가 널 이긴 거라고! 결국에는 네 가면을 벗긴 내가 승리자야! 내가… 내가 승리한 거라고! 가면을 벗을 수밖에 없게 만든 내가… 내가 승리자야!”
-…….
“…….”
-…….
“…….”
-그러니까 뭐.
“…….”
-네 말은 지금… 법대로… 해결하자고?
“…….”
-하고 싶은 말이 그거야? 법대로 하자고? 명예추기경의 모습으로… 해결하자고?
“…….”
-그러니까… 종교재판을… 받고 싶다는 말씀이시죠? 스퀴어트 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