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30화
뒷정리 (13)
순수함에서 시작된 명예추기영의 질문.
당연히도 여기에 있는 여러분들은 폄하하기 위한 의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무척 기쁘다는 듯이 입을 열 수밖에 없는 상황이리라.
최소한 이기영의 심정은 그랬다. 힘든 연방의 상황을 위해 이토록 많은 분들이 직접 이곳을 찾아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연방의 상원의원을 비롯한 권력자들이 노동자들과 함께 땀을 흘리려고 하는 모습은 감수성이 풍부한 명예추기경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물론 그 감수성이 마르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무언가 민망해하는 것만 같은 턱수염 산적의 모습. 아니, 민망해한다기보다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리라.
연방의 안 좋은 면을 대놓고 보여주기 싫을 테니 무언가 말을 해야겠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지 적당한 변명을 생각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기… 상원의원님들은 물심양면으로….”
“…….”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시고… 그….”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게 겨우 이거야?
녀석 역시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나 보다.
“아니, 노동자들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으신 건 아닙니다. 아직 지원을 받지… 않았… 아니, 이제 곧 받을 예정….”
“…….”
“아. 여, 여러 가지 법적 절차를 도와주셨습니다.”
“아. 여러 가지 법적 절차를 말이군요. 이를 테면….”
상원의원 하나가 슬그머니 말에 끼어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하하하. 그레고리 길드마스터께서 자세히 알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연방의 작업원들이 교국으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비자 문제나 연방법상으로 문제가 되는 부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에 대해서 상원의원회에서 여러 가지 협의를 거치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그렇군요.”
“연방이 주마다 법이 조금씩 차이점이 있어… 행정절차가 조금 복잡한 편입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던전 정비 사업과 뒷정리에 의뢰를 받은 곳이 연방의 길드들인지라… 각 길드 역시 주마다 영향을 받고 있다 보니… 처리해야 할 사안이 조금 많습니다.”
“아….”
“연방중앙정부에… 의뢰를 직접 맡겨주셨다면….”
‘미친놈들이네. 이거.’
그걸 중앙정부에 왜 맡기겠어. 니들이 던전 공략에 참가한 것도 아닌데. 게다가 염치도 없어. 꼽주려고 던진 질문에 눈치도 없이 득달같이 달려드는 것 좀 봐.
교국이 의뢰를 맡긴 것은 연방정부가 아니라 연방에 속해 있는 길드들.
녀석의 말처럼 여러 가지 처리할 사안이 없었을 리가 없다.
연방의 거의 전 길드들이 던전 정비 사업에 투입되어 있는 상황이었고, 그마저도 인력이 부족해 길드에서 연방민들을 임시로 고용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법적으로 처리할 사안이 없었을 리 만무, 연방법들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주마다 처리해야 될 법안에 차이점이 있었다면 행정절차를 처리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작업장 상태가 왜 이랬는지 대충 알 것 같기도 해.’
타 길드나 업체들과 미팅을 하루 종일 가졌어도 모자랐을 것이다.
그 와중에 상원의원들과 미팅을 하며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나눠야 하다 보니 제대로 된 캠프를 꾸릴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사람들이 요령이 없어요. 요령이.’
시대가 바뀌고 기회가 오면 행정절차 싹 갈아엎는 한이 있더라도 빠르게 빠르게 준비를 해줘야지.
이거해야 되고 저거 해야 되고, 이건 여기 소관이고 저건 저기 소관이고. 이러면 언제 일할 수 있겠어?
어쩐지 시바 규모가 작다 했어. 시바. 연방 길드들이 얼마나 답답했겠냐구.
어째서 이 턱수염 산적이 보좌관도 없이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길드에서 보유하고 있는 행정직원들 역시 발등에 불똥이라도 떨어진 것마냥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겨우 5일 만에 처리될 리도 없으니, 몇몇 곳은 아직까지 쳇바퀴 돌리고 있을 수도 있겠네.’
결국 조심스레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여러분. 이번 사업은 원정에 참여한 연방의 길드원 분들과 용병 여러분들께 드리는 성과인지라… 중앙정부에 직접적으로 전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하하. 아무튼 명예추기경님의 덕분에 오랜만에 연방민들이 활기를 되찾은 것 같았습니다. 대도시나 소도시 가리지 않고 말입니다. 민생경제가 활성화되고… 더불어 원정 관련 사업도 활발해지고 있으니… 하하하. 예전의 그 연방이 맞나 싶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느끼신다니 다행입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이 조금 더 힘을 써주셔야….”
“하하하. 당연히 그래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안식처의 던전화 사업을 연방의 국책사업이라 생각하고 임하고 있습니다.”
‘그럼 좀 잘 좀 해봐.’
“…….”
“일단 자리를 옮기시지요.”
‘피 빨러 온 놈들 진짜. 한꺼번에 싹 다 쓸어버리고 싶네.’
이런 놈들 때문에 순수한 명예추기경의 의도도 왜곡되는 거예요.
그저 노동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뿐이었지만 덩치가 커지기 시작하니 꼰대짓 하러 온 상관처럼 보이기 시작.
심지어 함께 온 의원들은 각자 보좌관들과 함께 그럴듯해 보이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더 체계적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 워프게이트는 몇 개나 설치되어 있습니까?”
“연방민들이 힘써주시는 모습을 보니 아주 든든합니다. 그레고리 길드마스터. 잠깐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정비 사업의 자제를 어디서 수급처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군요. 정확히 어떤 업체와 계약을 맺고 있는지….”
숟가락 한번 얹어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고나리질을 하고 싶은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을 정도.
물론 이놈들의 진짜 목표는 여기서 한가롭게 정비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닐 것이다.
연방경제 활성화에 이번 사업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지만 어디까지나 던전의 참여한 길드를 위주로 돌아가는 행사라고 보는 것이 맞다.
연방민들이라면 몰라도 저들에게 직접적으로 떨어질 콩고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너네도 이득 많이 볼 거 아니야.’
도시도 활성화되고, 이번 일 끝나면 원정도 활성화될 테니까. 큰 관점에서 바라보면 연방의 발전은 연방의 녹을 먹고 사는 놈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맞다.
‘냉정하게 말하면 니네 연봉이 오르는 것도 아니니까. 다른 걸 원하고 있기야 하겠지.’
그저 얼굴이나 비추려고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왠지 모르게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는 시점, 아니나 다를까 조심스레 말을 걸어오는 녀석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큼….”
“…….”
“크흠….”
“…….”
“사실… 많은 연방민들이 명예추기경님과 대륙 보호 관리 위원회가 해주고 계신 일에 감사하고 있을 겁니다. 연방은 대륙에서 일어나는 여러 행사에서 많이 소외되고 있었던 터라… 그동안 연방민들이 느끼고 있었을 소외감을 생각해 보면….”
그저 살짝 미소를 보일 수밖에 없는 대사.
“명예추기경님께서 자신들을 돌봐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많은 위안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저희 역시 그렇고요.”
‘빌드업 잘하고 있네.’
“그 연장선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연방민들을 위해 명예추기경님께서 관심을 가지실 만한 사업계획서… 몇 가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연방 내에서 자선단체를 운영하려고 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소외계층과 취약계층을 위해 파티를 할 예정이며… 큼큼… 자선 파티는 2주일 후에 열릴 예정입니다만… 아마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지 않을까 해서….”
‘자선 파티 같은 소리 하네.’
“자선 파티라 하시면….”
‘힘든 건 취약계층인데 파티는 왜 너희들이 하냐.’
“물품 경매라든가… 기금 모음이라든가… 여러 가지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명예추기경님께서 참석해 주신다면 아마 많은 연방민들이 감동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아. 그리고 방금 드린 사업계획서에 관해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만….”
단순 적폐라고 불러도 모자랄 정도의 악질.
연방 적폐들 싹 쳐내지 않았나? 백색의 도화지 이기영을 물들이려고 했던 놈들 싹 쳐낸 줄 알았는데.
그놈들은 저승 가면서 후임들한테 유언도 안 남기고 갔나.
‘진짜 적폐 총량의 법칙이라도 있는 거 아님? 적폐를 쳐내면 그 자리를 적폐들이 메우나 봐.’
이번 기회에 제대로 호구 한번 물어보겠다는 심산을 보니 기가 찰 지경이었다.
너무 퍼주는 것처럼 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명예추기경이 연방 재건 사업을 펼치겠다는 소문이라도 들은 모양.
이왕 재건 사업을 지켜보는 김에 자신들이 관리하고 있는 사업을 조금 더 밀어보겠다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현재 흘러가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밖에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이 던전 뒷정리도 그렇고, 또 모험가지원기금으로 스퀴어트를 비롯한 중소규모 클랜에게 들어가는 돈을 보고 있으니….
평생에 한 번뿐인 기회가 온 것처럼 행동하는 것일 수도 있다. 기왕 투자하는 김에 더 하라고, 더 괜찮은 곳에 하라고 말하고 있는 거지 뭐.
“더불어 파란 길드에서 운영하고 있는 포션 사업에 대해 말입니다만….”
“명예추기경님. 이것 어떻습니까?”
“조금 더 좋은 연방을 만들 방안이….”
“로렌 님의 신전에 관해 드릴 말씀이….”
“아마 깜짝 놀라실 만한 제안일 겁니다. 드렸던 제안서 중에서 관심이 가실 만한 내용이 있었는지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
“명예추기경님.”
“명예추기경님… 여기도.”
“명예추기경님!”
“하하하하. 명예추기경님. 이 건 또 어떻습니까.”
“명예추기경님!!!! 하하!!”
억지웃음을 보일 수밖에 없는 시점.
“…….”
좋은 뜻으로 시작한 명예추기경의 연방 지원 사업이 왜곡되고 변질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는 시점.
악의 있는 행동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모기 짓에 대륙의 성자는 곤란을 겪고 있었다.
원치 않은 정치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그저 미소 짓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성자의 모습은 가련해 보이기까지 하다.
분명히 미소를 보이고 있었지만 눈에는 실망과 혐오라는 감정이 들어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괴로울 수밖에 없다.
대륙 위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만 하는 가슴 아픈 운명을 가지고 있는 명예추기경의 입장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것은 익숙한 감정이 아니었으니까.
‘너무 힘들어.’
기영이는 지치고 있어.
‘너무… 너무 괴로워.’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는데….
‘너무 힘들어.’
시야가 잘 보이지 않을 정도, 어느새 성자를 둘러싼 이들의 모습은 욕망의 괴물로 화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숨이 가빠지기 시작함에도 불구하고… 장내에 떠도는 욕망과 탐욕을 견딜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자는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누군가… 누군가 도와줬으면….’
누군가… 누군가가….
조용히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스퀴어트가 입을 연 것은 바로 그때.
“여러분. 이제 그만… 하시는 게….”
하지만 녀석은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스퀴어트보다 한발 더 빠르게.
우리 턱수염 산적이 내 앞을 가로막아 주고 있었으니까.
거대한 태산처럼 보이는 턱수염 산적. 녀석의 등은 무척이나 믿음직스럽다.
“명예추기경님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 그레고리 님. 저기….”
“명예추기경님께서 피곤해 보이십니다.”
“하하… 그레고리 길드마스터 지금 뭐 하는….”
“명예. 추기경. 님께서. 피곤해. 보이십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빛의 성자라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구원해 준 턱수염 산적의 소매를 꽉 잡는 것 정도가 전부.
“실례지만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만남이기도 하고… 여기도 중요한 작업이 남아 있는 터라… 명예추기경님과 제가 개인적으로 긴히 나누어야 할 이야기도 있으니… 죄송합니다만 오늘은 모두 돌아가 주셨으면 합니다.”
“그레고리 길드마스터.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지금 명예추기경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도중이지 않습니까! 갑자기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 뒤로 들려오는 묵직한 저음.
“제가. 긴히 나누어야 할. 이야기가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살기를 뿜어낸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정도의 살벌한 목소리.
턱수염 용사의 등 뒤에 숨은 빛의 성자는 다시 한번 녀석의 소매를 꽉 잡았고.
스퀴어트는 NTR이라도 당한 것마냥 충혈된 눈으로 절망을 내보내고 있었다.
‘미안해. 스퀴어트. 이제는 안정적이고 믿음직스러운 대표 없이는 살 수 없는 투자자가 되어버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