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20화
뒷정리 (3)
깜깜한 도시에 불이 켜지는 것은 순식간, 애초 린델을 비롯한 몇몇 자유 지구들은 잠들지 않는 도시라고 불릴 정도로 새벽에도 왕성한 활동을 자랑하는 도시였다.
물론 이른 아침부터 움직이는 모험가들이 많은 이상 지구와 상황이 완전히 같을 수는 없었지만 누가 봐도 평소의 밤과는 다른 린델의 거리는 누구나 의아함을 느낄 거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교국의 수도 같은 경우에는 상황이 더 극단적이다.
교황청을 끼고 있다는 특수성과 높은 사제 비율, 교국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공직자들이 자리 잡은 수도는… 사실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통행금지령이 떨어지지 않았나 싶을 정도의 적막함이 흐른다.
물론 주점이나 야시장 같은 장소에서도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 누가 느끼기에도 도시가 분주해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리라.
대륙에 내로라하는 인원들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내 움직이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일 터, 슬그머니 망원경으로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연히 시선이 닿은 곳은 수도를 기점으로 활동하고 있는 길드였다. 제법 체계적인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고 했었는데….
“제길… 이제야 일이 해결된다니 기쁘기는 하다만 이 시간에 도대체 무슨 짓거리인지… 새벽 3시까지 파란 길드로 찾아오라는 게 말이야 똥이야?”
‘너 이 새끼. 얼굴이랑 이름 기억했나.’
“어이. 김 실장 이리로 불러.”
“네.”
“김 실장. 자료들은 전부 준비했어?”
“죄, 죄송합니다. 현재 준비하는 중입니다.”
“뭐?”
“죄… 죄송….”
“제기랄.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거야? 언제 시작될지 모르니 똑바로 준비하라는 소리 못 들었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다고 하면 길드 생활 끝나나? 어? 제기랄! 빨리 갈아입을 옷이나 가져오라고 해. 3시까지니까. 시간 못 맞추면 시말서 쓰고 징계받을 각오하라고. 응? 아니, 그 정도로 끝나는 게 다행인 줄 알아. 이번 일 망치면 진짜 가만히 안 둘 테니까.”
“…….”
“내 말 들었어? 못 들었어? 이 새끼야!”
“알겠습니다. 확실하게 책임지겠습니다.”
김 실장이라는 인물은 후다닥 방에서 뛰쳐나온 이후에 험한 말을 내뱉는다.
“정 부장이랑 곽 과장 이리로 오라고 해.”
“…….”
“너희 새끼들은 도대체 일 처리를 제기랄! 어떤 식으로 하는 거야! 업무 끝나면 회사 일이 끝나는 건가? 시간 됐다고 퇴근하고 술 퍼마시고 자러 가면 끝이야? 언제부터 길드가 이딴 식으로 돌아갔어? 야근을 하든지, 잠을 처자지 말든지. 최대한 빨리 끝내 놔야 할 거 아니야!”
“죄… 송합니다. 김 실장님.”
“사원들 전부 깨워서 준비하라고 해. 제길. 제기랄!”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이야 뻔하지 않은가.
“이 대리! 박 대리! 이 새끼들 이거 어디 있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리라.
설마….
설마하니….
‘내가 민폐 끼친 건가 봐.’
아니 저 길드 같은 경우가 좀 특별한 거지. 누가 봐도 블랙길드잖아. 다른 곳도 한번 봐야지.
“후우… 빨리 준비합시다. 그분은 워낙 종잡을 수 없는 분이시라… 하지만 이런 경우는 조금 당황스럽군요.”
“정식으로 항의해야 합니다. 길드 마스터. 저희 길드나, 다른 집단들이 모두 파란 길드의 하청 길드가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명백히 우리들을 무시하는 처사입니다. 새벽에 갑작스레 전화 한 통으로 소집하다니… 아무리 파란 길드의 위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한들….”
“거기까지 하세요. 명예추기경님께서도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으셨을 겁니다.”
‘얘는 좀 생각이 제대로 박힌 것 같네.’
밑에 있는 놈들은 교육을 좀 받아야겠지만 말이야. 다시 한번 시선을 돌리자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안개 소환사 천관위. 자유도시 다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녀석도 수도에 체류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천관위 님. 이건….”
“지금 파란 길드로 향한다. 이번 소집에 관련해 행여나 말실수하는 길드원들이 생기는 일 없게 똑바로 관리하도록.”
짧고 굵게 끝.
대충 이쪽에 대해 알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런 노선을 취하는 자세는 마음에 든다.
어디에나 눈과 귀가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
나는 1984 빅 브라더도, 독재자도 아니기 때문에 저 정도로 조심하는 게 이해가 가지는 않지만 군말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보니 아이템 하나라도 더 집어주고 싶지 않은가.
‘넌 내가 조금 더 챙겨 줄게.’
물론 몇몇 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첫 번째 길드와 다르지 않다.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을 무시한다고 발끈하는 이들도 있고, 군말 없이 따르는 이들은 보이지만 사실 책임자보다 더 고통받는 것은 그 밑에 있는 직원들이나 길드원들 쪽.
소집용 의복을 가지고 오지 않았는지 워프게이트를 이용하는 이들은 보통이다.
단순한 소집 회의였지만 명예추기경이 몸을 회복 중이라는 소식을 모를 리가 없으니 병문안 선물을 사기 위해 뛰어다니는 이들도 있고, 문을 연 상점이 없으니 결국 상점 주인에게까지 연락이 갔는지 주섬주섬 일어나는 이들도 보인다.
안 그래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언론사들은 동시에 바깥으로 뛰쳐나왔고 원정 보고서를 미처 작성하지 못한 길드들은 책상과 한 몸이 되다시피 했다.
도시 전체가 이른 아침이라도 맞은 것마냥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왜 편하게 자고 있는 얘들까지 깨워서 이 난리를 만들어.’
참 블랙길드들 많아요. 진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부길드마스터. 김미영 팀장입니다.”
“아. 네. 지금 나가겠습니다.”
“회의실로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문제는 파란 길드 역시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는 것. 움직이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손님을 맞을 준비로 한참인 이들도 보이고 업무실을 지나치자 빽빽하게 앉아 있는 직원들이 시야에 비쳤다.
잠깐 동안 할 말을 잃기가 무섭게 김미영 팀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실….”
“네.”
“사실은 박중기 팀장님과 조용히 해결하려고 했지만….”
“네. 팀장님.”
“박중기 팀장이 그만 몇몇 직원들에게 말을 전한 것 같습니다.”
“아…. 그래요? 아, 그러면 안 되는데….”
“어느새 소문이 퍼졌는지 직원들이 스스로 돕고 싶다고 하더군요. 늦게 회식을 하던 인원들부터, 숙소에서 잠을 자고 있었던 이들까지… 모두가 자의적으로 길드에 나와 업무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꽤 멀리서 출퇴근하는 인원들에게도 소식이 닿았는지… 연락할 새도 없이 출근을… 심지어 잔업수당도 받지 않겠다고 말하는 이들이….”
“어허! 그러면 안 되죠. 팀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출근한 것도 미안한데….”
“네. 안 그래도 그리 말씀하실 것 같아. 모든 직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려고 했었습니다.”
“역시 우리 팀장님이시네요.”
뿌듯함이 생겨난다.
‘이게 가족 같은 회사고 가족 같은 길드지. 진짜.’
다들 부길드마스터를 돕고 싶대자너.
아니나 다를까 업무를 진행하고 있는 직원들의 눈빛에 열의가 깃들어 있다.
일을 하는 것이 즐거운지 미소를 짓고 있는 이들도 눈에 보인다.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아름다운 광경, 실로 가족 같은 회사의 전형이라 할 만하지 않은가.
사실 김미영 팀장과 둘이 해결해도 별로 상관은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분배 문제야 조금씩 다듬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고, 이 많은 인원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나하나가 모두 능력 있는 행정인원들인 만큼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리 만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빠르게 늦은 시간에 출근을 하는 것을 보니 없던 애정도 샘솟을 지경이었다.
키 작은 사원 하나가 눈치를 보며 김미영 팀장에게 말을 건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김미영 팀장님. 이지혜 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미리 말씀드렸던 것처럼 응대해 주세요.”
“네.”
‘이 누나는 왜 벌써 와?’
“바로 회의실로 불러주세요.”
“네. 부길드마스터.”
그 와중에 누나가 이렇게 발 빠르게 움직인 게 신경 쓰였다.
갑작스레 얼굴이 확 달아오른 것은 당연지사.
‘시바.’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회의실 문을 박차고 들어온 누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누나는 여기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긴? 우리 오빠 보러 왔죠.”
“아니, 그게 아니라. 누나 관리위원회 소속이잖아. 애초에 누나한테는 연락하지도 않았는데….”
“관리위원회 소속이니까 참관해야죠. 공정하고 평등하게 분배가 진행되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
“라는 건 대외적인 이유고 다른 이유는 또 있어요. 우리 연주 언니가 부탁하더라구요. 검은백조의 기여도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조금 더 챙겨 주십사 하고 찾아왔어요. 여기 정리한 아이템 목록이요. 검은백조에서 원하고 있는 건 총 3가지로… 해당 아이템의 소유권을 주장할 근거와 임무, 전투로그도 가지고 왔어요. 꽤 열심히 정리했으니까 이견은 나오지 않을 거예요. 추가로 같은 아이템을 주장할 다른 길드에 대한 반박자료도 있으니까. 잘 확인해 주세요. 살펴보는 데 몇 분 안 걸리죠?”
“누나 이거 불법인 거 알지?”
“오빠랑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불법 아닌데요?”
‘이 누나 봐.’
아주 당당한 거 보라고. 이게 적폐지 다른 게 적폐가 아니야.
제법 확실하게 정리한 것이 눈에 띈다. 누나 말처럼 검은백조의 기여도야 두말할 것이 없지만 이 정도로 잘 준비해 왔다면 딱히 반박할 여지도 없다.
아예 태클 걸릴 만한 여지를 없앨 정도로 완벽한 보고서.
타 길드와 집단들이 지금까지 마무리하지 못하고 탁상공론만 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이 누나 이거….’
오늘 새벽에 소집령이 있을 거라고 예상한 거 아니야?
‘내가 영상보고 곧바로 소집할 거라고 확신했었나 봐.’
이미 준비를 끝내놓고 나한테 연락을 한 거라는 판단이 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억측이기는 하지만 이 누나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서 부탁하는 것보다는 이런 방식으로 들이대는 게 더 확실하다고 판단했겠지.
자료 전부 준비해 놓고. 이쪽에 영상 보내면서. 언제 소집령 떨어지나 기다리고 있었을 거야.
다시 한번 얼굴이 붉어지기야 했다.
“흠… 괜찮네. 참고해 볼게. 누나.”
“그래 주면 고맙고요.”
옆에 앉은 이후에 턱을 괴고 빤히 이쪽을 바라보는 이지혜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무튼 참 효과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진짜로 있었나 보네요. 난 내일 아침 정도로 예상했는데… 아무리 그래도 새벽에 이렇게 호출하고 그러면 어떻게 해요? 뭐 별말이 나오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너무 갑작스럽잖아.”
“…….”
“그렇게 좋았어요? 막 힘이 나고 그랬나 봐.”
“뭐가.”
“영상이요. 내가 보내준 거 봤으니까 이렇게 소집령 내린 거잖아요. 오빠 살리겠다고 파란 애들이 생난리 치는 영상. 균열 보고 세계가 멸망해도 상관없다느니, 이대로 잊을 수는 없다느니… 막 울고불고하면서 모두의 마음이 하나가 돼서 정하얀 걔가 마법까지 캐스팅하는 거였잖아요. 혹시 내가 다른 걸 보냈나?”
“…….”
“조혜진이랑 엘리오스랑 커피 마시는 영상을 보냈나….”
“응. 내가 본 건 그거였던 것 같네.”
“…….”
“…….”
“이 오빠 귀여운 거 봐.”
“뭐. 그냥저냥. 안 그래도 슬슬 일어나려고 했었어. 좀 바빠야지. 딱히 누나가 보낸 영상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아무튼 자료 잘 봤어.”
“…….”
“근데. 둘이 진짜 커피 마셨어?”
누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진짜?”
“네. 진짜요. 진짜로 커피 마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