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18화
뒷정리 (1)
그 누가 보기에도 찬란하고 거룩한 광경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물론 갤러리들은 나와 베니고어의 대화를 들을 수 없었겠지만 어두운 공간을 꽉 메우던 빛과 그녀의 몸이 빛과 함께 바스러지는 모습을 눈에 담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색기영의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벗어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 것은 당연지사.
잠깐 동안 어둠에 물들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의 사랑을 받는 성자의 모습은 아직까지 교국의 명예추기경이 빛과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였다.
물론 원정대 보안 계약서에 의거해 색기영 사태가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어떻게 쌓아 올린 이미진데….’
어찌 됐든 간에 조만간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원정에 참여했던 간부들을 전부 의문사 처리할 수 없으니 크든 작든 이벤트를 벌여야 함이 옳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후우….’
아무튼 간에 원정은 성공적이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이벤트를 클리어했고, 사상자들이 다수 발생하기는 했지만 전략지원팀에서 예상하고 있었던 것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었다.
무엇보다 등급 외 던전이라는 명성에 걸맞을 정도의 보화와 아이템들이 쏟아져 내렸다.
모두가 환호성을 내지른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 썩 괜찮은 엔딩에 사제들은 눈물을 쏟았고 교황청은 지하던전을 성지로 발표했다.
동시에 베니고어와 알타누스에 대한 신화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신학자들을 파견, 물론 신학자들이 많은 것을 얻을 수는 없었겠지만 적당히 각색된 이후에 기존교리와 합쳐져 세상에 등장하게 될 것이다.
행복한 비명을 내지르는 것은 사제와 신학자들뿐만이 아니었다. 원정대에 참가했다는 명성과 명예는 모험가들의 자부심과 자존심을 드높였고 그 높아진 자부심을 추켜올리기라도 하듯 대륙의 각 지역에서는 이 원정에 대한 일로 떠들썩해졌다.
원정에 참여하지 못했던 모험가들은 빨리 원정일지가 공개되는 것을 기다렸고 음유시인들은 계속해서 노래를 불렀다.
아마 어디를 가도 원정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울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허름한 주점이나 고급 살롱, 모험가 길드, 마법사의 탑, 종교계, 대륙민이라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소재였고, 언론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듯 매번 다른 기사들을 쏟아냈다.
노을빛의 검사나 중요 네임드들의 대한 이야기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끌기는 했지만 주로 다뤘던 소재들은 전체적인 던전 공략의 타임라인과 보이지 않았던 영웅들의 대한 이야기였다.
과거로 갔던 명예추기경이나 색기영, 템플러 젠의 도움 같은 이야기들을 다룰 수는 없었으니 정보를 최대한 제한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의문을 품은 이들도 많았지만 새로움에 목말라 있었던 대중들은 영웅의 등장에 환호했다.
[원정에 숨은 영웅 스미스 대령. 결국에는 파란 길드로… 자세한 계약 내용은 보안 사항. -린델일보 김성경 기자]
[통칭 ‘스미스 대령’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에서 그가 맡은 역할과 활약에 대해서. -던전 칼럼니스트 김성경]
[스미스 대령을 둘러싼 영입 전쟁? 결국 승자는 파란 길드. 명예추기경의 설득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린델 정치부 기자 강유미]
가장 많은 수혜를 맞은 것은 파란 길드였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았던 스미스 대령에게는 고행길이나 다름없는 행보였겠지만 어차피 언론담당관으로 키우려고 했으니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인터뷰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일단 굴릴 수 있을 만큼 굴려야지. 사실 언론 관심이 얘한테만 가 있는 것도 아니고… 겨우 이 정도로 엄살 부리면 좀 그렇지.’
원정대의 숨은 주역들도 주역들이었지만 모든 이들이 관심을 가진 것은 원정에 대한 보상이었다.
금은보화와 재화, 종교적인 상징을 담은 유물들과 수많은 아이템, 원정대의 스펙 업을 위해 간부 재량으로 지급한 몇몇 아이템들을 제외하고도 창고를 꽉 채울 만한 아이템들이 즐비한 상태다.
고생이 끝났으니 보상을 받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원정대는 물론이거니와 원정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 역시 이 보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분배.
소규모 파티에서 사용되는 방식인 주사위 굴리기나 기여도에 따라 차등 분배되는 시스템을 차용할 수 없었다는 것이 갈등의 시발점이었다.
원정대에 참가한 인원들은 모두가 각 지역에서 내놓으라 하는 권력자 및 강자들이었고 심지어 여러 가지 이권 다툼에 이골이 난 정치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기본적인 기여도 시스템은 존재했지만 그게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원정대에서 마련한 정산 프로그램이 유능하다고 한들 만능은 아니었으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여러 집단이 협의와 회의를 진행한다거나, 정치적인 거래나 암투, 언론플레이를 통해 기여도를 조금이라도 더 올리려는 길드도 생긴 것은 당연하거니와….
모르긴 몰라도 색기영 사건에 입을 다무는 조건을 빌미로 아이템을 요구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에는 아이템 하나 때문에 회의실에서 칼부림이 일어날 뻔했다고 하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상황이 더 격해지기 전에 이들을 관리할 수 있는 중재자가 필요한 시점.
물론 그 중재자는 대륙의 유일한 빛이자 희망인 명예추기경. 베니고어의 아들이며 희생과 부활의 성자로 이름을 드높이고 있는 빛기영 이었다.
-그래요. 오빠가 필요한 시점이라구요. 요즘 왜 이렇게 조용해요? 이제 정신 좀 차려요.
“나도 몰라 누나. 그냥 조금 지쳤나 보네. 뭐라도 딱 꼬집어서 이야기를 못 하겠는데. 살짝 허무하다고 해야 하나.”
-베니고어랑은 이야기 잘 됐다면서요.
“아니, 허무하기보다는 싱숭생숭하다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기분이 좀 싱숭생숭해.”
-알타누스 때문이에요?
“뭐 그것도 없지 않아 영향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밖에 상황은 좀 어떤데?”
-다들 오빠 기다리고 있죠, 뭐. 대외적으로 오빠는 안식을 취하고 있는 시점이라서 아무도 말 안 하는 거지. 다들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파란 길드야 전설 등급의 아이템이 창고에 쌓여 썩고 있어서 이 사람들 심정을 모르는 거지. 평생을 칼 밥 먹고 살아도 보기 힘들다는 게 전설 등급의 아이템인데 오죽하겠어요? 괜히 원정대가 아직도 수도에 짱 박혀 있는 게 아니에요. 말은 안 해도 다들 분배 문제 때문에 날카로워져 있다고요.
“…….”
-칼싸움 날 뻔했다는 건 들었죠?
“들었지.”
-일을 안 할 거면 아예 하지를 말든가. 스미스 대령 쪽 애들한테만 선분배하면 어떻게 해요?
“그게 계약 조건이었으니까 그렇지. 그리고 스미스 대령이야 뭐 이견이 있나. 원정대의 숨은 영웅이신데….”
-다른 사람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생각을 했어야죠. 이 오빠 이거 번아웃 왔나 봐.
“아니야. 번아웃 같은 건….”
‘그건 아니야.’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걸 겪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템플러 젠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알타누스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과거에 다녀온 부작용일지도 모르지.
생각이 조금 많아졌다고 하는 게 어울리는 표현이리라. 평소였으면 귀찮은 생각 따위는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왠지 그럴 수가 없었다.
‘알타누스….’
그녀와의 이야기는 끝났다.
이곳에 들어온 이후 베니고어 와도 잠깐 시간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이 많아진다.
뭐라 정의할 수 없는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랬으면 어땠을까. 저랬으면 어땠을까 가정하게 된다.
딱.
‘그냥 싱숭생숭 한 거지 뭐.’
이 표현이 어울린다.
아니면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알타누스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까.’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다. 애초에 알타누스는 내 사람이 아니고… 나는 그녀보다 베니고어가 소중했으니까.
그녀를 위해서 움직이지도 않았고,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 어차피 현재의 미래를 위해서는 나 혹은 그녀가 희생했어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남는 건 결과야.’
하지만 베니고어의 저 한마디는 괜스레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했다.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뭐, 푹 쉬는 김에 계속 쉬어도 되고요. 어차피 오빠 성격에 한 삼사일 지나면 나쁜 기억은 억지로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것 같기는 한데… 계속 그런 식으로 살다가 오빠가 진짜 정신병자 될까 봐 걱정되더라구요. 그래서 연락해 봤어요.
“남이사.”
-나는 오빠보다 강하잖아.
“우리 누나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
-해답이 안 나와도 받아들이는 거랑 옆으로 치우는 거랑은 엄연히 다르다니까. 나는 받아들이는 쪽이고 오빠는 밀어내는 쪽이지. 그런 뜻에서 말한 거예요. 내가 오빠한테 좀 보여줄 게 있는데. 아마 이게 도움이 될걸요. 어차피 좀 있으면 김현성 들이닥칠 시간이죠? 그거 끝나고 한번 봐요. 좋은 영상 하나 보내놓을 테니까.
“응. 뭐 알겠어.”
지혜 누나가 통신을 멈추자 거짓말처럼 문이 드르륵 열리기 시작했다.
“기영 씨.”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누가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밥 처먹을 시간이 될 때마다 밥 들고 오는 놈이 하나 있었으니까.
고개를 돌려 김현성을 환영하고 싶었지만 컨셉에 사로잡힌 지금의 내가 그럴 수 있을 리 만무.
템플러 젠을 잃은 슬픔을 연기해야 했기 때문에 일단은 창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방에는 창문이 없다. 대신 여신의 거울이 비치고 있는 배경이 보인다.
“기영 씨?”
“…….”
“기영 씨.”
“아….”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매번 현성 씨가 오실 필요 없는데… 업무 하실 시간 아닌가요?”
“길드 직원들이 바빠서 제가 대신 오게 됐습니다.”
‘길드 직원들이 바쁘긴 개뿔.’
파란 길드 내에서 이기영이 칩거한 이유는 템플러 젠을 잃은 슬픔 때문이라는 내용이 힘을 얻고 있는 상태.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길드원들의 표정은 항상 애매했다.
가만히 아무것도 안 하고 알아서 방에만 있어 주는 건 좋은데… 너무 우울해하고 있으니 걱정하는 것이다.
녀석은 그중에서도 정도가 조금 심했다.
‘걱정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해.’
“오늘 기분은 조금 어떠십니까.”
“덕분에 조금 괜찮네요.”
‘시바. 무슨 하루에 꽃을 몇 번이나 가는 거야.’
자연스럽게 침대 테이블 위에 음식을 내려놓은 녀석은 유리병에 있는 꽃을 갈아 끼우기 시작했다.
‘어. 거울연어다.’
솔직히 먹고 싶기는 한데. 지금 먹으면 좀 그래.
“입맛이 없네요.”
“이제는 조금 기운을 차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그래야 하는데….”
“물론 여러 가지로 생각하실 일이 많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기영 씨. 마음의 정리가 끝나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셔도 됩니다. 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말입니다.”
근데 너무 배고프다. 몇 입만 먹어야지.
슬그머니 젓가락을 들자 의자를 들고 가까이 앉는 김현성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래도 이쪽이 젓가락을 드는 게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지금까지는 계속 돌려보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어쩌면 대화가 될 준비가 됐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뒷정리는 잘 되고 있나요?”
“네. 잘 되고 있습니다.”
‘잘 되기는 개뿔.’
“여러 가지 마찰이 있는 것 같지만… 모두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며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럼 다행이군요.”
“…….”
“…….”
“저. 기영 씨.”
“네.”
“템플러 젠 일은….”
“네?”
“그의 일은… 유감입니다.”
갑자기 그런 무거운 전개를 확 끌고 오지 마. 그것도 밥 먹는 중에. 시바. 얘는 화술이라는 게 없어.
“하지만 기영 씨. 아시다시피 그는….”
“저도 알고 있어요.”
“네?”
“그가 옳은 행동을 한 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제가 템플러 젠에 관해서는 이성적이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네… 기영 씨.”
“자꾸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네요.”
“…….”
“아마… 아마도….”
“네.”
“그가 제 친구와 닮아서인 것 같아요.”
김현성이 표정이 변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친구… 말입니까?”
“네. 지구에서의….”
“그… 렇군요… 지구에… 친구분이… 계셨군요.”
“…….”
“친구분이….”
여기저기 통틀어 친구란 게 있어 본 적이 없었던 김현성에게는 놀라운 사실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