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14화
뿌린 대로 거둔다 (21)
커다란 환호성이 들려왔다.
감겨 있었던 눈도 천천히 떠지기 시작했다.
‘바하무트 이 새끼… 드디어 뒈졌나 보네.’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충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환호성이 들려올 리가 없었으니까.
“형님… 형님 괜찮은 거요?”
“이기영 님.”
“기영 씨… 기영 씨….”
그 이후, 여러 명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가듯 한꺼번에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나 아직 눈 안 떴나 보네.’
왜 이렇게 앞이 깜깜해.
“저리 비키세요. 상태를 한번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뭔가 꿈속에 있는 듯한 느낌.
‘기절한 건가.’
우리 바하무트 송별회 해준 직후에는 조금 쌩쌩했었던 것 같은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쓰러져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당연하지. 오래도 버텼자너.’
갑작스레 긴장이 풀렸으니 그럴 만하다고 느껴진다. 이미 몸도 한계에 가까워져 있는 상태였고, 생각해 보면 카스가노 유노의 예언을 본 이후로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대미지도 많았을 테고….’
신성력으로 상처들을 치료하기는 했지만, 다치고 회복하는 걸 반복하다 보면 몸이 망가지게 마련.
그 와중에 색기영으로 각성까지 마쳤으니 지금 이런 상태에 빠진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지르고 있고, 파란 길드를 비롯한 원정대의 간부진들은 뒷정리를 하고 있겠지.
아마 내 몸을 캠프로 데리고 가고 있을 확률이 높다. 몸이 이동되는 감각은 없었지만 소란스러운 목소리와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데려가세요. 제길. 빨리!”
“한, 한데… 명예추기경님을… 이, 이대로 놔둬도 괜찮은 겁니까? 방금 전에는 분명히….”
“뭐?”
“파란 길드마스터도 직접 보지 않았습니까. 명, 명예추기경님이… 악… 악마로….”
“입 다물어.”
“네?”
“그… 입 으깨버리기 전에. 다물라고 말했다.”
김현성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나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모양이다.
‘근데 그렇게 사람한테 윽박지르고 그러면 안 되지.’
“…….”
이후에는 조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상하고 계시겠지만 오늘 보셨던 것들은 전부 보안사항입니다. 여기서 있었던 일들은 전부 잊어주세요. 원정 계약서에서도 명시되어 있는 내용이니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그렇게 해야지. 시바. 울 혜지니 잘한다. 현성아. 시바. 사람 입을 으깨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해?’
“하… 하지만….”
“여러분들이 우려하고 계시는 내용에 대해서는 파란 길드와 교황청에서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아직 어떤 판단도 성급하게 내리기 힘든 상태입니다.”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래. 저렇게 살살 달래야지.’
조혜진의 목소리도 점점 멀어져간다. 우당탕탕 하는 소리와 함께 들려온 것은 선희영과 엘레나의 목소리.
“몸에는… 다른 이상이 없으십니다.”
“그… 다른 기영 씨는….”
“지금으로서는 그것 역시 느껴지지 않습니다.”
“엘레나 님께서는 어떻게 보이십니까?”
“선희영님의 말씀이 맞아요. 그… 그건… 느껴지지 않아요. 피로가 누적된 것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길드마스터.”
“후우… 다… 행… 이군요.”
이후에는 다시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았지만 목소리가 흐릿하고 느릿느릿하게 들려온다.
다시 한번 깊은 수마로 빠져들기 전에는 괜스레 아까 전에 일어났던 작은 소란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너무 멍한 상태여서 그냥 넘겼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색기영… 때문이구나.’
그게 문제가 될 줄은 알고 있었는데.
‘시바. 왜 이렇게 오버했었지?’
조금 감정 컨트롤이 안 됐었던 것 같기는 해. 너무 긴박한 상태이기도 했고, 너무 흥분한 상태여서….
아마 타인의 입장에서는 내가 미친 줄 알았을 것이다. 울고불고 웃고 개 사이코 짓거리를 한 것처럼 비쳤을 확률이 높다.
사실을 아는 건 일부 지휘관들뿐이겠지만, 색욕과 영면의 군주라는 초월적인 존재의 등장을 웃어넘길 수 있는 이가 어디 있을까.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거라 장담할 수 있다.
왠지 모르게 징그러운 비쥬얼도, 세계관 최강자 김현성을 노예로 부린 것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난리 날 상황이자너.’
진청 이 새끼 일부로 채널 안 끊은거 보면. 무조건 엿 먹으라고 그런 거야.
무조건.
“형님… 거… 괜찮은 거요?”
어. 돼지 새끼 왔다.
“괜찮은 거… 맞는 거요?”
괜찮아.
“내가 유난 떠는 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다시는 이런 상황이 오지 않을 것 같다가 닥쳐오니까. 갑자기 너무 불안하다니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빨리 일어나서 이것 좀 수습해 주쇼.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고….”
뭘 들으려고.
“아. 그리고 현성이 형씨 너무 미워하지 마쇼. 이야기 들어보니까 모두 합의한 사항인 것 같았으니까. 매번 그렇듯 혼자 힘든 일 도맡으려고 하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형님이 홀라당 사라져 버리면 우리들이 가만히 있기는 좀 그렇지.”
계속 듣고 싶은데 졸리네.
이후에 들려온 것은 조혜진의 목소리다.
“다시는 그러지 마.”
뭘.
“다시는… 다시는 그런 짓 하려고 하지 마. 이 나쁜 새끼야.”
뭐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 갑자기 너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는 게…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일인지… 흑… 흐윽….”
얘 왜 울어.
“혜진 씨….”
“흐윽… 흐으으윽….”
뭐야. 너. 엘리오스 그 새끼랑 같이 왔어? 혹시 걔한테 지금 위로받고 있는 건 아니지?
“흐으윽… 이 나쁜 새끼. 천하의 나쁜 새끼.”
“괜찮을 겁니다.”
엘리오스 너 이 개새끼. 혜지니 한테 손 하나 까딱 해봐. 이 쓰레기 같은 새끼. 사람이 약해진 틈을 타서….
“…….”
“…….”
아… 졸려….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저씨… 일어나….”
다음은 예리인가 보네.
“다시… 죽는 거 아니지?”
한번 죽어봐서 그런지 얘들이 트라우마가 생겼나 봐.
“끄으윽… 흐윽… 아니지? 이번에는… 아니지?”
딱 봐도 숨쉬고 있구만 얘는 왜 이래. 뭐 하루 종일 누워 있는 것도 아닌데 진짜 왜들 그런담. 딱 봐도 일주일도 안 지난 것 같구만.
‘일주일이 뭐야. 사흘도 안 지났겠다.’
계속해서 찾아오는 손님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아직 원정대가 철수하지 못한 모양.
바하무트는 죽었지만 던전 공략은 끝난 것은 아니다. 파란 길드를 비롯한 원정대 전력이 이곳을 떠날 수 없었으니 당장 나를 위로 올리기보다는 캠프를 만들어 휴식을 취하게 하는 모양.
물론 옳은 판단이었다. 색기영의 건도 있으니 계속해서 지켜봐야 했고, 혹시 모르는 상황에 계속해서 대응하기 위해서라면 멀리 두는 것보다 가까이 두는 게 나을 거라 판단했을 테니까.
“혹시 궁금해하실까 봐 바깥의 상황을 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이기영 님.”
그래. 희영아, 역시 너밖에 없어.
“오후에는 희영 씨가 일이 있어서 제가 대신 왔습니다. 부길드마스터.”
기모도 왔네.
“사실 다른 것보다 먼저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만… 최근 조혜진 님과 엘리오스 님이 부쩍 가까워진 모양이더군요.”
뭐?
“아직 교제를 하거나 하는 건 아닌 것 같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류가 느껴지기는 했습니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조혜진 님이 묘하게 엘리오스 님을 의식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탐색 임무도 함께 나가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부길드마스터가 우려하는 최악의 상황이 온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바.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 양아치 같은 놈.
다음은… 창렬이네.
“부길드마스터. 말씀하신 대로 스미스 대령의 영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계약 사항은 아직 논의 중이며. 아무래도 부길드마스터께서 직접… 요구조건을 들어보시는 게….”
그래. 잘하고 있네. 하나하나 짚어주지 않아도 혼자서도 눈치 잘 봐가면서 척척 잘한다니까.
약간 원정이 소강상태로 되면서 여기저기서 영입 전쟁이나 트레이드가 벌어지고 있을 거라고.
대륙 최상위 모험가들이 모인 자리니까. 마음에 드는 인재가 있을 거고, 방향성이 맞는 집단을 봐뒀을 테지.
딱히 우리도 그 유행에 합류할 필요는 없지만 스미스 대령 정도는 빼 와야지. 아, 소피아 대위 걔도 나쁘지는 않더라.
이처럼 종종 바깥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게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었다.
“기영 씨…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흐윽….”
매번 와서 눈물을 한 바가지 흘리고 가는 김현성. 심지어 이 새끼는 원정대장이라는 놈이 너무 오래 붙어 있어.
“형님… 오늘이 사흘째요. 여기저기 들쑤시고 있기는 한데… 뭐 도통 나오는 게 없다니까. 이거 공략할 수는 있는 거요?”
“덕구 씨. 교대 시간이에요.”
여러 가지 불만을 토해내는 돼지 새끼와 황정연.
“오, 오, 오빠가… 나쁜 거예요. 이건… 오, 오빠가… 오빠가 나쁜 거니까. 저… 저는 잘못 없어요. 오빠가… 나쁜 거야.”
“…….”
“나, 나쁜 오빠는 벌을 받… 받아야죠. 으응… 벌을 받아야지. 소, 소라야. 밖에 아무도 안 오지?”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서 벌을 준다는 둥, 내가 나쁜 거라는 둥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 정하얀.
“자기. 언제 일어나? 여기 너무 지루하다니까. 빨리 올라가서. 변신 한 번 꼭 더 해주기야. 알았어?”
“…….”
“어우… 미치겠네. 이거 빨리 나가야겠다.”
희라 누나는 한 번 찾아온 이후에는 찾아오지 않았다.
“부길드마스터 들리세요? 들리시나요? 보이세요? 느껴지시나요?”
메디컬 체크에 여념이 없는 엘레나. 심지어 신입 길드원들도 자주 나를 찾아와 쓸데없는 말을 건넬 정도였다.
뭐 길드 단위로 명령이라도 떨어진 것인지. 신입들이 와서 재잘거리는 걸 듣는 건 꽤나 재미있었다.
“왕!”
“아! 벨리에 양!”
“알프스 선배님. 와… 와 계셨네요.”
“네. 다른 분들이 전부 밖에 나가있어서요. 저밖에 근무 설 사람이 없다고… 벨리에 양은… 임무… 안 받으셨어요?”
재미없을 수가 없었다.
“좀… 그렇죠? 아직 선희영 님은… 조금 무서워서….”
“김예리 선배님도… 매번…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나 때는 안 그랬는데… 라고 하신다니까요. 이해는 가지만… 조금 섭섭해요.”
“유아영 선배님은 어떻고요.”
원래 남들 뒷담 까는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잖아.
굳이 길드원들만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언제까지 자고 있을 생각이냐. 멍청한 놈. 일을 벌려놨으면 네 손으로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 아닌가?”
진 군사도 한 번 왔다 갔고.
“주인님… 흐윽… 주인님.”
카스가노 유노도 한 번 왔다 갔다.
출입의 제한이 꽤나 엄격했기 때문에 파란 길드원들이 아닌 인원들은 출입이 불가능한 것 같았다.
진청, 카스가노 유노, 차희라 같은 경우에는 어디까지나 특별 케이스였고, 그 외에도 통신채널로 지혜 누나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는 했다.
눈을 뜬 것은 정확히 5일이 지난 시점.
“오, 오늘도 벌을… 오, 오… 오빠?”
당황한 얼굴로 와락 안기는 정하얀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
“숨 막혀. 하얀아.”
“흐윽… 끄으으윽… 오, 오, 오빠… 끄으윽….”
“숨 막힌다니까.”
얼마 안 있어 길드원 전부가 안으로 들이닥친 것은 당연지사.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