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09화
뿌린 대로 거둔다 (16)
‘이거 큰일 났는데.’
시바 이거 진짜 큰일 났는데.
둠둠진화를 선택한 것은 다소 충동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계산되어 있는 행동이었다.
사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리라.
템플러 젠이 숨을 거두며 아군 전력은 약화되어 있는 시점이었고, 혹여나 바하무트가 템플러 엑스트라 때처럼 제니의 힘을 흡수하면 최악의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신 것은 한 모금 이었지만 그 안에 담겨져 있었던 근원과 부정의 힘은 모두 이쪽으로 넘어온 상태.
앞서 말했던 것처럼 바하무트가 김현성에 대한 내성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해 보면 더욱더 활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빛과 어둠은 합쳐지기 힘들지만….
‘나는 회귀자 사용설명서라는 연결통로를 가지고 있으니까.’
김현성이 부정의 힘을 사용하도록 조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오랜만에 재회한 역병군주가 김현성에게 힘을 빌려주는 개연성 없는 시나리오 한 편도 준비해 놨었는데.
‘힘을 빌려주는 것은 이번뿐이다.’
라든가.
‘너를 죽이는 것은 나다.’
라든가.
‘겨우 이 정도였나?’
같은 대사 날리면서 말이야.
근데 그 계획이 무위로 돌아갔다.
‘캐릭터가 너무 달라졌자너.’
달라져도 너무 달라져 버렸다. 설마 이런 식으로 변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주변을 한번 스윽 둘러보자 얼어버린 이들이 눈에 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상황에 공기가 얼어붙은 것마냥 전투가 멈춰 버렸다.
바하무트도 움직임을 멈춘 채 이쪽을 바라보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어쩌면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레 신화급의 격을 지난 존재가 강림했으니 놈의 입장에서 경계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갈기가 삐쭉삐쭉 설 정도로 이쪽을 경계하고 있는 모습, 색기영이 얼마나 강한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격을 지닌 존재의 등장은 녀석을 긴장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차라리 다행이야.’
아직 상황 판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니까.
뭔가 액션을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굳이 발걸음을 옮기지는 않는다. 대신 몸이 약 1미터 정도 공중으로 떠올랐다.
‘공중부양할 수 있구나 이거.’
느리기도 하고 빠르게 이동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 잡는 데에는 탁월할 것 같은 느낌.
괜히 뱀 날개를 파닥파닥거릴 필요도 없다.
폼 잡기 딱 좋을 정도의 속도로, 뭔가 묵직한 분위기가 흘러나올 정도의 속도로 천천히 몸이 앞으로 이동되기 시작한다.
이질적이고 기괴하게 느껴지는 무빙, 천천히 손을 올려 벌린다. 의미는 없다. 그냥 폼 잡기 용이지.
김현성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안… 안 돼….”
“…….”
“안 돼… 안 돼….”
녀석은 절규하는 쪽.
“안 돼… 흐윽… 이건….”
역병군주 때의 PTSD의 재발. 그때만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김현성에게는 충분히 자극적인 장면.
이제는 됐어. 이제는 지쳤어. 따위의 말을 내뱉었던 그 감성 그대로 삶의 의지가 꺾이지 직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 아아… 아….”
정하얀은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뭔가 눈알이 흔들리는 모양이 심상치 않다. 얼굴은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져 있다.
코피가 떨어진 것을 확인한 것은 바로 그때. 뚝 뚝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 코피를 쏟는 것을 보니 색욕과 영면의 군주답게 기본 패시브로 정신계열의 특수능력이 달려 있는 것 같았다.
“아…앗… 앗… 어? 어….”
자기 자신이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한 것은 조금 더 나중에 일어난 일이다.
정하얀은 황급히 두 손을 얼굴로 가져다 댔지만 계속해서 피가 떨어져 내린다.
손과 얼굴이 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모습, 점점 더 눈알이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다.
몸은 바들바들 떨고 당장에라도 이쪽을 위협할 것 같은 느낌.
정하얀이 지금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어 조금은 떨리기도 했다.
“오, 오… 오빠… 오빠….”
‘세긴 센가 봐.’
그래도 같은 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 정돈 거 보면.
“이거… 힘들 것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차희라 역시 중얼거린다.
“아니… 힘들어질 것 같아.”
정하얀 같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꽉 깨문 입술에서 흘러내리는 피는 차희라가 얼마나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 것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체력적으로… 정신적으로도 지친 상황이라서….”
아니야. 한계 아니야. 누나. 버텨.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나는… 빠지는 게 좋겠는데?”
그래. 누나 빠져.
이 누나는 자기가 정신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이성에게 우선적으로 패시브 효과가 퍼져 나가는 모양, 물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아 알 수 없었지만 아마 격이 낮은 이들을 상대로는 성별, 아니, 심지어는 동물이나 몬스터도 가리지 않을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저항력의 문제겠지 뭐. 기본적으로 정신계 능력을 얼마나 저항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니까.
‘이거 어떻게 하지. 이걸 어떻게 풀어나가지.’
“김현성. 우리 자기… 지금 어떤 상태야?”
“…….”
“정신 차려. 이 새끼야. 정말로 여기서 끝장나고 싶어?”
“아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활활 타오르는 분노는 이미 집어넣었다. 대신 이기영 안에 자리 잡은 것은 무감정이다.
둠기영 때와 마찬가지로 각성한 이후에 새로운 인격이 나타났다는 설정.
그렇기 때문에 첫 운을 어떻게 떼느냐가 중요했다. 당장 눈앞에 있는 이들도 바하무트를 경계하면서도 이쪽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나를 더욱더 경계하고 있는 듯한 느낌.
[일반 등급의 강제 퀘스트를 생성합니다.]
[누나 하얀이 데리고 잠깐 떨어져 있어야겠는데?(0/1)]
[차희라에게 일반 등급의 퀘스트를 전달합니다.]
답변은 곧바로 온다.
[영웅 등급의 강제 퀘스트가 생성됩니다.]
[시발… 뭔가 했는데… 다행이네. 근데 다음부터는 내 머릿속에 목소리 울리는 거 하지 마. 자기. 위험해지기 싫으면.(0/1)]
라는 말을 끝으로 차희라는 곧바로 정하얀을 붙잡은 채로 시야 속에서 사라진다.
끌려가는 와중에도 시선은 계속 고정되어 있는 정하얀이 살짝 무섭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따로 다른 액션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고. 천천히 입을 열어야 할 것만 같은 타이밍.
때마침 중얼거리는 김현성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기… 기영 씨.”
“…….”
“괜찮… 으십니까?”
[이쪽으로 와주세요.]
뭔가 목소리가 변한 것처럼 느껴진다. 내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요사스러워진 듯하다. 조금 지나칠 정도로 말이다.
조금 느릿느릿하지만 공간 전체를 울리는 목소리는 순식간에 공동 안을 가득 메웠다.
“지금….”
[당신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 것 같아요. 저는 당신이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이랍니다. 어서… 이쪽으로 와주세요.]
“…….”
[두려워하지 말고… 아… 어서요. 어서… 어서 와주세요~ 현성 씨.]
마치 세이렌이 바닷속으로 선원들을 부르는 듯한 느낌으로. 노래 부르면서 이쪽으로 오라고 하는 거 있잖아.
녀석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쪽이 위협할 의사가 없다는 걸 회귀자 사용설명서를 통해 녀석에게 알린다. 이전의 그 이기영이 맞다는 것도 말이다.
김현성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조금 더 도움을 주는 것도 좋겠지. 성격은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만 이 화신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계속해서 예전에 있었던 추억들을 떠올린다. 아마 김현성에게도 전해지고 있을 것이다.
내가 모두 기억하고 있다는 걸 말이다. 명장면 명대사 하나하나 떠올리기.
‘정신공격!’
모양새가 왠지 모르게 정신공격을 감행하는 것 같은 느낌이기는 하다.
실제로 그걸 노리고 있기도 했고 말이다. 지금의 김현성은 싸울 수 있는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차라리 다른 감정들은 배제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김현성 역시 위화감을 느끼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이상하지 않은가.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분노를 보냈던 이가 자신에게 다가오라고 하고 있으니 위화감을 느끼지 못하면 병신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현성은 이쪽에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까 미움받은 것도 있고, 얘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없거든.
김현성의 머릿속은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솔직히 제대로 읽을 수도 없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찾아오게 됐는지부터, 죄책감, 분노, 좌절, 혼란, 여러 가지 감정들이 소용돌이친다.
조금은 단단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천천히 쌓아왔던 성벽은 너무나도 빠르게 허물어진다.
마치 도미노처럼 말이다. 남은 유일한 성벽은 위안. 이 사람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위안이었다.
‘그건 최소한 둠기영 때보다는 낫게 느껴질 거야.’
“기영 씨….”
[네… 제가 그 이기영이랍니다.]
물론 회귀자 사용설명서로 녀석의 정신에 개입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경계, 위화감, 같이 도움 안 되는 감정들의 벽을 조금씩 조금씩 허문다.
유대감은 건드리지 말아야지. 이건 유대감을 바탕으로 한 작업이니까.
김현성은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더 맹목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근데 생각보다 쳐낼 게 별로 없네….’
아마 새로 생긴 특성의 영향일지도 모른다. 별다른 작업을 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김현성은 마치 잠에 취한 것처럼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긴다.
아마 타인이 보기에는 녀석이 스스로 함정으로 기어들어 가는 것처럼 보일지도.
아니, 실제로 함정으로 기어들어 오고 있다.
“기영 씨… 괜찮… 괜찮으십니까?”
최면에 걸린 것 같은 모습. 잠에 덜 깬 상태로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실제로 녀석은 최면에 걸려 있다. 물론 그런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고 체계적이고 복잡하지만 말이다.
[네. 저는… 괜찮답니다.]
“다행… 다행이다. 다행입니다.”
눈이 반쯤 풀린 채로 안도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다행입니다. 이제는…. 이제는… 정말… 흐윽… 괜찮으시다니 다행입니다.”
왜 또 울어. 맨날 울어. 울보야. 아주.
[현성 씨.]
그리고….
‘무슨 정신력이 이렇게 약해.’
아무리 회사설이 있다고 해도 뭔 30초 만에 끝난 것 같아. 너 관련 아이템이랑 아티팩트 같은 거 세팅 좀 해야겠다. 정신계 능력자 튀어나오면 이거 홀라당 넘어가겠네.
[저 있잖아요.]
“네….”
[저… 저게… 너무 두려워요.]
“네? 네? 두… 뭐가….”
[저기 저 짐승 말이에요. 너무… 너무 두렵고 무서워요.]
“아… 네. 제가…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그건….”
[저도 도움을 드리고 싶답니다.]
“네… 네. 기영 씨가 원하신다면… 하지만 안전하게….”
일단 체급부터 맞춰주면 돼.
김현성은 신성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고 있다. 어떻게 깨달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내게 퀘스트를 보낸 적이 있으니까.
부정의 힘을 천천히 엮어 나가기 시작한다. 하얀색 어둠이 조금씩 조금씩 형태를 만들어낸다.
마치 붉은 전신과도 같은 거인의 뼈대.
내 힘으로는 부족했지만 현성이가 있다면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제가 이끄는 대로 따라와 주시겠어요?]
“네… 네….”
내가 뭘 원하는지 알고 있는 녀석은 열정적으로 내게 호응한다. 내가 길을 가리키면 녀석은 그 길을 자신의 것으로 덮는다.
[잘하고… 계세요. 네. 그래요. 그렇게.]
“감… 감사합니다.”
‘좀 힘드네.’
물론 상생하기 힘든 힘이기는 했지만 영혼이 연결된 영향으로 인해 부딪침은 없다.
김현성은 천천히 몸을 돌린 순간,
신성과 부정의 힘으로 엮인 거대한 형태의 거인이 몸을 돌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쿵.
[치워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기영 씨의… 뜻대로.”
[나를 위해서.]
“네… 위해서….”
하얀 어둠을 밝히는 노을빛의 거인은 검을 휘둘렀고,
친절한 빌런 바하무트의
팔이
떨어져 내리는 것이
시야에 비쳤다.
“…….”
[…….]
‘…….’
[우어아아아어어어어어어어어!!]
‘이거 왜 이렇게 세.’
이해할 수 없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