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1005화
뿌린 대로 거둔다 (12)
아.
그것은….
한여름 밤의 꿈.
아.
그것은,
한여름 날의 추억.
이 이야기는, 짧았지만 강렬했고 충동적이었지만 아름다웠던 희생의 천사와 일그러진 영웅의 유대감에 관한 이야기.
누군가에게는 평생 동안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
그들의 추억에 관한 이야기였다.
수만 년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던 희생의 천사에게는 짧은 순간이었지만 타락한 영웅에게는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던 영겁의 기다림이었을 것이다.
상처를 숨기려고 했던 영웅과 자신의 상처를 모두 보여줬었던 희생의 천사.
두 사람의 첫 만남은 다소 엇갈렸었지만… 평생을 서로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지만….
모든 이야기가 그러하듯 둘은 서로의 상처를 감싸 안아줄 수 있는 관계가 되어버렸다.
“바하무트 님….”
‘괜히 이 새끼가 그 긴 시간 동안 저 깃털 하나에 목매달고 있었던 게 아니야.’
얼마나 길게 관계를 유지해왔는지가 유대감의 깊이를 정의하지 않는다.
한여름 밤의 꿈처럼 눈을 감고 뜨면 잊혀질 것만 같은 추억이었지만, 정말로 짧은 순간이었지만 누군가는 그 짧은 순간을 평생 동안 잊지 못하고 있었다.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고, 지하 매미가 우는 소리를 들으며 산책을 하기도 하고, 심도 깊은 토론과 잔을 나누며 밤하늘을 벗 삼아 이야기를 꽃피웠었지.
‘기억나니?’
함께 땀을 흘린 검술 연습, 사교회에서의 첫 만남, 남몰래 테라스에서 만들었던 소중한 추억.
‘그리고….’
그리고….
후회밖에 남지 않았던 마지막까지 말이야.
얼마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지 모른다. 네 잘못이 아니었다고, 단순한 사고였고, 네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제는 전부 끝났다고, 이제는 그만… 쉬어도 된다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후회가 남았던 헤어짐이 있었기 때문에 짧은 만남이 의미가 있다.
아무런 미련이 없었다면 이런 상황이 찾아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만 기억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 설정이다.
녀석 역시 짧은 추억을 생각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작은 깃털에 의지하며,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입히고, 짐승과도 같은 모습으로 변해버렸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
이 짐승이 바하무트라는 것을 그동안 깨닫지 못했던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역겨운 괴물의 모습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지만 내면의 바하무트가 조용히 잠들어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고.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모습 말이야.
그 누구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은 녀석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이는 단 하나.
수만 년의 시간 동안 잠들어 있었던 희생의 천사일 것이 분명하리라.
어서 빨리 전해야 할 텐데.
그가 더 상처받기 전에. 진심을 담은 이 목소리를 전해야 할 텐데….
물론 녀석에게 목소리를 전하기 전에, 먼저 말을 전해야 하는 사람이 한 명 더 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게 달리는 와중에 곧바로 통신채널을 향해 목소리를 담을 수밖에 없었다.
‘너 이 새끼. 진짜. 이 트롤러 새끼.’
-아주 사고 한번 제대로 치셨네요.
-제길….
-설마 설마 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사고를 쳐? 이봐, 진 군사.
-내 탓이 아니다.
-아니, 책임자가 내 탓이 아니라고 하면 상황이 끝나요? 주인의식을 가지고 일을 했어야지. 기껏 꺼낸다는 말이 내 탓이 아니다? 세상 참 살기 편해졌어.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무슨 이유가 있었든 간에 작전에 오류가 생긴다면 그건 책임자 탓이에요.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작전에 변수는 없었다. 지면이 얼마만큼의 하중과 충격을 버틸 수 있었는지는 이미… 우리가… 수백 번도 넘게 검토한….
-그럼 군사님이 시바 작전에 변수를 만드신 거겠네. 작전에 변수가 없었으면 답은 뭐라고요? 책임자가 변수를 창출한 거예요, 책임자가. 어디 내가 틀린 말 했어요? 어디 내가 틀린 말 했나?
-오빠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죠.
-…….
-봐요. 누나도 그렇게 이야기하잖아.
-솔직히 군사님 책임이 아닐 수도 있어요.
-아니, 누나. 지금 진 군사 실드 치는 건….
-근데 그걸 당사자가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죠.
-그렇지. 그래야지.
-우리 진 군사님 유능하기도 하고 경력도 좋고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잖아요. 아무리 생각할 수 없는 변수가 나왔다고 해도, 책임자의 입장에서 내 탓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는 건 조금 유익한 발언은 아니라고 봐요. 이유야 대충 이해가 가기는 하지만 진 군사님 답지 않네요.
-제기랄….
-내가 이래서 눈을 못 떼요. 눈을 못 떼. 그거 잠깐 맡겼다가 이 사달 난 거 봐. 진 군사님. 레이드가 장난이에요? 던전 공략이 게임이야? 진짜 게임을 하고 싶으면 보드게임을 하러 카지노에 가든가. 블랙마켓에 가서 어둠의 듀얼을 시작하든가 하면 되는데… 왜 여기 와서 게임을 하려고 하다가 일을 망치고 그래?
-…….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내가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고. 진짜 정신 똑바로 안 차려요? 네? 군사님. 그냥 입 꾹 다물고 있으면 이야기가 끝나요? 변명을 하든 사과를 하든지 간에 군사님이 책임질 부분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애초에 혼자 맡을 자신이 없었으면 도와달라고 이야기를 하던가. 피곤하면 피곤하다고 이야기를 하지. 자존심 세우다가 이게 뭐 하는 겁니까? 도대체.
-…….
-당신 말이야.
-사과하지. 내… 내 불찰이다.
-…….
-사전에 대비하지 못한 내…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하지.
-그러니까. 평소에 잘했어야지 쯧. 아무튼 간에 김현성 여기로 못 오게 해요. 중요한 작전인 것처럼 꾸며서 여기저기 뺑뺑이 돌리라구.
뚝.
-오빠. 진 군사 삐졌나 봐. 통신채널 끊었는데요?
아니야. 삐지기는. 지금 내가 보니까. 일어나서 앉아 있던 의자 집어 던지고 있네.
-누나는 병력들 재정비 좀 부탁해.
-확인했어요. 조금 쉬려고 했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되네. 오빠도 너무 위험하다 싶으면 몸 빼는 거 잊지 마요.
-희라 누나가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안심은 되네.
희라 누나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기는 했지만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스토리 텔링에 몸을 맡기는 중.
아니, 이 누나는 오히려 바하무트와 직접 대면할 수 있다는 게 기뻐 보이는 것만 같다.
내가 옆에 있으니 대놓고 드잡이질을 할 수는 없겠지만 압도적인 폭력을 담고 있는 거대한 괴물과 싸울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만으로도 좋을 테니 말이다.
“자기. 내가 안아주는 게 좋을까?”
고개를 도리도리.
직접 달려야 의미가 있다. 단순한 뜀박질이기는 했지만 이 뜀박질은 여러 가지 감정을 담은 뜀박질.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중요한 순간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여름 감성, 꾸밈없는 눈물을 만들어낼 수 있는 중요한 시간, 과거를 회상하며, 수만 년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추억을 다시금 떠올리며 눈물을 떨어뜨린다.
[우으어아아아아아아아아어아아아아!!]
괴물이 되어버린 바하무트의 굉음이 들려왔다. 깃털을 잃어버린 녀석이 미쳐 날뛰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목소리는 닿지 않을 것이다. 지금 이 거리라면 목소리가 닿을 리가 없다.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행동이었지만 다시 한번 녀석의 이름을 입에 담게 된다.
“바하… 바하무트 님!!!”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이 터지라 그의 이름을 부른다.
너의 이름은.
“바하무트 님!!”
‘시바. 진짜 안 들리는 거 아니지? 안 들리는 거 아니지?’
광폭화?
붉어진 눈이 보인다. 상처 입은 등 뒤에서 커다란 뿔들이 돋아난다. 녀석이 괴성을 지르자 주변의 것들이 펑펑 소리를 내며 터져 나가기 시작한다.
입에서는 더럽고 역겨운, 아니, 그의 상처 입은 영혼을 대변하는 것만 같은 타액이 흘러내린다.
누가 보더라도 놈이 현재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보물이 사라진 것에 대한 분노, 그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는 너무나도 뻔했다. 녀석은 시선을 돌리고.
“바하무트… 니임….”
나는 들릴 리가 없는 이름을 목이 터지라 외친다.
[우으아….]
분노의 대상을 찾고 있었던 상처 입은 괴물이 멈칫거린 것은 바로 그 때였다.
“바하무트 님!”
당장에라도 모든 것을 파괴할 것 같은 짐승이 조용히 주변을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기억하고 있었던 것일까.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간 녀석에게 희생의 천사의 목소리가 닿은 것일까.
내 등에서 자연스럽게 날개가 돋아나기 시작한다. 금안의 눈은 빛을 내며 아주 긴 시간 동안 상처 입었던 짐승을 올려다본다.
“위험합니다! 명예추기경님.”
“제길… 대기한다.”
“가까이 다가가지 마. 명령이다.”
‘나 기억하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 그대로.
몇만 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을 잃어버리지 않은 희생의 천사의 모습 그대로.
여름날의 추억을 떠오르게 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거친 숨을 몰아쉰다. 이제는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 한번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감정의 파도가 너무나도 거칠었던 탓일까.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는다.
[우으… 어어….]
괴물이 된 녀석은 빛나는 날개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잠깐 멈칫하기는 했지만….
“바하무트 님. 흐윽… 바하무트 님….”
녀석은 내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해 줘. 우리의 추억.’
“돌아오세요.”
‘제발. 돌아와 줘.’
“악마의 씨앗에 지지 마세요.”
‘당신은 패배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언제나 이겨내는 사람이었잖아요.’
[우으어어어어어어어!!]
“흐윽… 돌아와 주세요! 바하무트 님!”
흉측한 모습이었지만 상처 입은 모습이었다. 역겨운 악취가 풍겨왔지만 전혀 더럽지 않다.
악마의 힘에 저항하며 대항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여름날 느꼈던 영웅으로서의 모습이었다.
누가 이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누가 그의 모습을 보고 더럽다 욕할 수 있을까.
[우으아아….]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바하무트 님.”
[으어아아아아아아아!!]
녀석은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것이 머리를 아프게 하는 벌레를 짓이기려는 건지, 아니면 희생의 천사를 환영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조용히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것이 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리라.
내 죽음으로 그가 괴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어떤 고통과 죽음이라도 받아들이리라.
‘시바. 죽이는 거 아니지?’
콰드드드득!
하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
‘김현성?’
걔는 안 되는데.
김현성이 온 것은 아닌지 순간적으로 숨을 삼키기는 했지만….
“늦어서 죄송합니다. 사제님.”
두 발로 선 거대한 늑대가… 바하무트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템플러… 젠? 아니….”
‘너도… 어둠 진화… 한 거니?’
“템플러 제니?”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앙!!
너 왜 이렇게 강해졌니?
콰드드드드득!!
이게 어떻게 된 일이니.
“모든 것이 기억났습니다. 사제님.”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모르겠지만.
“템플러 제니! 위험합니다!”
일단 이쪽을 응원하자.
그게 저 구역질 나는 바하무트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저 악마를 정화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