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98화
뿌린 대로 거둔다 (5)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계속해서 빛이 떨어져 내린다.
“그만… 그마아안!!”
드락타리스를 필두로 한 망령의 사제들과 성기사들이 쉴 새 없이 신성력을 뽑아낸다.
그들이 한 발자국씩 발을 움직일 때마다 놈은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1열이 신성주문을 떨어뜨리면 2열은 주문을 외우고 3열은 그다음을 대비한다.
궁수들이 열을 맞추며 활을 쏘는 것처럼 저들은 신성력의 비를 쏟아낸다.
전위는 적의 습격에 대비하며 방패를 들고 한 발자국 한 발자국씩 전진한다.
호위기사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판 템플러를 멸하기 위해 검을 들어 올린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악한 이에게 신의 철퇴를!
‘한이 맺혔을 거야.’
-악마에게 영혼을 판 사악한 이에게 신의 철퇴를!
-저 악마를 벌하리라!
가슴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이다. 연출 전문가인 내가 보기에도 제법 잘 짜여진 판처럼 보였으니까.
상황을 의도한 것은 이 감독의 재능이었지만 그림을 그린 것은 내가 아니다.
거대한 거미 악마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제들. 선과 악의 대결, 빛과 어둠의 격돌 같은 소재들을 언제나 잘 먹히는 소재들 중 하나가 아니었던가.
언제나 그렇듯 지금 보여지고 있는 광경도 다르지 않다. 거미가 다리를 휘두르자 망령의 사제들 몇몇이 휩쓸려 흩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려워하지도 물러서지도 않는다. 얼굴에는 영겁의 시간 동안 참아온 한이 서려 있다.
드디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기쁨 역시 뒤섞여 있다.
-철퇴를! 철퇴를!!!
가장 중요한 것은 이들의 가운데 내가 있었다는 것.
‘누가 봐도 내가 한 것 같자너.’
“그에게 편안하고… 영원한 안식을….”
하고 중얼거린다. 미로에서 빠져나온 레인저들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이 모든 것들을 눈에 담고 있었다.
“명예추기경님….”
“이게 어떻게….”
“도대체….”
선망의 눈으로 이 기적을 만든 명예추기경을 바라보는 것은 당연한 수순, 이 기적과도 같은 광경에서 나를 어떻게 우러러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생각해도 대단하기는 해.’
“형님 거기 위험하다니까! 이쪽으로 오쇼!”
“위험해요. 형.”
“자기! 거기서 뭐 해!”
노심초사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희라 누나와 박덕구, 라파엘 때문에 슬그머니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기는 했지만 이미 이 명장면은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만! 그마아아안!”
‘뭘 그만해. 이 새끼야.’
“아아아아아악! 바하무트… 니임! 바하무트 님!!!”
‘걔 좀 그만 불러대. 진짜.’
“살려… 줘! 살려줘!!”
‘살리긴 뭘 살려.’
“당신은 정화될 것입니다.”
‘죽는 게 아니야. 정화되는 거라고. 그러니까 받아들여.’
“아아아아아아악!!!”
문제는 발버둥 치는 거미의 내구력이 생각보다 높다는 것. 당연하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시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박연주의 보고를 통해 대충이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벽화를 보면 결국 바하무트가 가지고 있는 악마의 씨앗이 개화해 버렸다는 상황으로 추측할 수 있으리라.
드락타리스가 말했던 악마 발언이라든지, 망령의 사제들이 가지고 있었던 특유의 분위기를 통해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걸 실제로 목도하는 것과는 또 다른 경우다.
‘멍청한 바하무트 새끼.’
내가 그렇게 힘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했는데.
‘김현성 이 새끼도 문제야.’
그만큼 4성 바하무트가 7성 김현성에게 두려움을 느꼈다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그게 녀석이 힘에 다시금 집착하게 된 계기가 됐을 것이다.
김현성이 주황빛의 악마로 묘사되기까지 한 걸 보면 공포를 느껴도 제대로 느낀 모양, 녀석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도 인정할 수도 없었겠지.
바하무트는 결국 예언의 사제를 잃어버렸고, 모든 것을 자신의 무능으로 되돌렸다.
실제로 녀석은 당시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혹여나 악마의 씨앗이 개화할까 움직이지도 못했고, 김현성이 등장한 후에는 다리가 얼어붙었다. 공포를 딛고 움직였지만 손짓 한 번에 날아가 버렸다.
당시 대륙의 영웅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굴욕이었을 테고, 김현성을 자신이 넘어야 할 산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PTSD 같은 정신병에 시달렸을지도 모르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주황빛의 악마가 자신의 모든 걸 앗아가는 악몽에 꿨다가 일어났을 테고… 주황빛 비슷한 것만 보면 경기를 일으켰을지도 몰라.
‘결국 견디지 못해서 스스로 악마가 되기를 선택한 거야.’
드락타리스와는 다른 길을 걸은 것이리라.
언젠가 되돌아올 예언의 사제를 다시 지키기 위해, 지하신전과 대륙을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
언뜻 생각해 보면 위험한 이야기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실제로 나에게는 이로운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어둠 진화가 효율이 나오지 않는다는 걸 나는 이미 둠둠현성으로 인해 알고 있었으니까.
스컬 그레이 현성은 강하기는 했지만 한계가 정해져 있다. 녀석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근데 왜 이렇게 안 뒤져.”
“이 더러운 개들… 이 더러운 사제들!!”
‘너 시바. 왜 이렇게. 세.’
“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내가 너희들을 벌하리라!”
‘완전히 인간을 탈피한 건가?’
그래서 능력치가 더 올라간 건가?
어둠 진화 쪽도 진화 루트가 하나 더 뚫려 있나?
둠둠현성이 저렇게 진화한다는 걸 상상만 해도 끔찍했지만 어쩌면 둠둠둠현성의 진화 루트까지 열려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현성이는 거미처럼 변하지는 않을거야.’
아마 늑대같은 종류일까. 그리폰에 환장하니 그리폰처럼 변하려나. 어쩌면 둠둠현성보다 더 흉측한 모습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중요한 건 김현성의 비주얼이 어떻게 변하는가가 아니다.
‘큰일 났는데….’
어둠 진화를 거친 바하무트가 어느 정도로 강해졌는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거지.
템플러 시몬 거미는 바하무트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명백하게 바하무트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녀석에게 학대당했는지는 내 알 바 아니지만 아마 많은 일들이 있었겠지.
녀석은 모든 걸 지켜봐왔다. 바하무트가 어떻게 변하는지, 녀석이 얼마나 잔혹하고 어두워 질 수 있는지, 지능이 퇴화한 것 같은 말을 내뱉는 것은 악마화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근본적으로 바하무트에 대한 두려움이 컸기 때문이 아닐까.
“거, 지독한 것 같다니까. 저 거미도… 사람이 무슨 거미로 변하는지….”
“…….”
“템플러 시몬은 사냥꾼이에요. 형.”
‘나도 알고 있어.’
“레이드는 원활하게 진행되고 있고… 망령들 때문에… 아군 측 전력 손실이 거의 없다는 것도 기뻐할 만한 일이지만… 마냥 기뻐할 수가 없네요.”
라파엘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같은 파티의 사냥개가 입을 열어온다.
“그게 무슨 소리지?”
“템플러 시몬은 사냥꾼이야. 미로가 녀석의 사냥터고 그쪽에서 가장 큰 효율을 발휘하는 보스 몬스터라고 생각하는 게 맞아. 이렇게 넓은 공간에서 포위된 상태로 할 수 있는 일이 적을 거라고 판단해야 돼. 내구는 낮아야 되고, 지하신전의 망령들의 신성력이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야 해. 그게 이치에 맞아. 녀석은 그런 식으로 진화했을 거야.”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군.”
“녀석이 말하는 바하무트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강하다는 건가?”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인다. 슬그머니 나를 바라보는 것을 보니 본인의 판단이 만족스러운 것 같았다.
은근히 칭찬을 바라고 있는 것 같았지만 굳이 한마디 얹어줄 필요는 없다.
‘얘도 많이 크기는 했어.’
키만 큰 게 아니라 머리도 많이 컸어.
“바하무트 님! 바하무트 니임!!”
드락타리스와 싸워봤기 때문에 더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한없이 두들겨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항이 너무 세자너.’
템플러 시몬은 애초에 겁이 많다. 물론 녀석이 약하다는 것은 아니다. 녀석은 신중하고 때를 기다리고 싶어 하고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고 싶어 한다.
저 형태가 자신이 원하는 형태는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가장 효율적인 형태라고 생각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상황.
녀석은 거대한 팔보다 날카로운 다리를 선택했고, 단단한 내구보다는 소리 없이 움직일 수 있는 민첩함을 선택했다.
라파엘의 말대로 미로는 녀석의 집이었고 그곳에서 레이드가 시작했다면 겉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까지 번졌을지도 모른다.
유리한 전장을 선점한 것은 우리였고, 상성상 우위에 있는 것도 아군 파티였지만….
‘지금 그게 이거야.’
“살려줘… 죽고 싶지 않아… 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악!”
‘영악한 새끼.’
다리로 몸을 웅크린 녀석은 긴 다리로 벽을 쿵쿵 찧으며 벽을 타고 천장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입을 한껏 웅크린 이후에 푸확 하는 소리와 함께 거미줄을 쏘아내기 시작.
신성한 보호막이 원정대를 감싸지만 치이이익 소리와 함께 보호막을 뚫고 들어온다.
끈적거리고 탄력 있는 거미줄이 산성 효과까지 가지고 있는 것은 이쪽에게는 불공평하다. 미로가 아니라도 자신이 사냥터를 만들 수 있는 것이리라.
‘2페이즈.’
“분석하시고 계신 건가요? 형?”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라파엘의 말대로 분석 중이었으니까.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 하지만 슬그머니 위쪽을 바라본다.
“네!”
‘눈치 참 빨라요.’
곧바로 회색 날개를 펼치고 위로 올라가는 녀석이 보인다.
사방으로 퍼져 있던 거미줄들이 순간적으로 형태를 만든다.
공중으로 치솟은 라파엘을 막기 위해 촘촘한 그물이 녀석을 조여오지만 탈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순간적으로 라파엘에게 탈출구를 전송하자 그대로 길을 따라가는 녀석의 모습이 보였다.
‘꽤 하네.’
종이 한 장 차이로 산성거미줄을 피하고, 공중에서 휘리릭 돌기까지 하는 모습, 불필요한 화려함이었지만 제법 멋지기야 하다.
피하지 못하는 것은 베어낸다. 꽤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미션이었다. 거미줄에 몸이 닿으면 대미지를 입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거미줄에 꽁꽁 묶여 순식간에 리타이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심지어 한 번에 베어내지 못해도….
‘휩쓸릴 가능성이 있어.’
그래도….
‘꽤 성능이 좋아졌네.’
우당탕탕하는 승차감을 보였던 과거와는 다르다.
라파엘 대 템플러 시몬의 구도를 김현성과 바하무트에 대입하는 것은 애초에 넌센스지만….
‘얻어갈 수 있는 건 얻어가야 돼.’
샘플이 있어서 나쁘지는 않다. 아니,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마침 진 군사도….
다른 놈이랑 만난 것 같구….
망원경으로 녀석을 바라보자. 의자에 앉은 채로 손가락을 까닥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 * *
“바하무트 님께서… 오고 계신다….”
“…….”
“…….”
“할 줄 아는 말이 그것밖에 없나 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