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94화
뿌린 대로 거둔다 (1)
감았던 눈을 뜨자. 이쪽을 반기는 몇몇 인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명예추기경님이다.”
“명예추기경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작전 성공했습니다. 하하핫. 성공입니다!”
“본대에 연락해. 계획대로 진행됐다고 군사님께 보고드린다.”
“괜찮으십니까? 잠깐 몸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주변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사제들은 대부분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드리고 있다. 환호성을 지르며 서로를 얼싸안고 있는 용병들, 박수를 치고 있는 원정대원들이 눈에 보인다.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이 섞인 탓에 정신이 없었지만 파란 길드원들은 자리에 없다는 것은 확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지어 김현성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고 맨 처음 초대장을 사용했었을 때의 장소 그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깨닫는다.
김현성이 초대장을 사용한 장소는 다른 곳일 테니… 없는 건 이해가 가고….
내가 다시 돌아올 걸 대비해 이쪽에 예비병력을 대기 시켜놨다고 생각하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뭔가 얼떨떨한 와중에 조금 이상했던 것은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눈에서는 자꾸 꾸역꾸역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잠깐이지만 내가 공포에 질려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꾸만 스멀스멀 올라온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인 것 같았지만….
‘안심하고 있는 건가 봐.’
최종적으로 이타누스 계획은 실패했다. 하지만….
이렇게 돼서 다행이라고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나 봐. 묘하게 기분 나쁜 안도감이 느껴지는 상황,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자너.’
이건 분노야 시바. 분노가 아니라면 부작용일 확률이 높다. 시공간을 뛰어넘는다는 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도 부담되는 일이었으니까.
오랜 시간 동안 과거에 체류했었으니 정신적으로 대미지를 입는 것은 당연한 일.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던 것 역시 그 연장선일 것이다.
“명예추기경님. 괜찮으십니까?”
“여기는… 제가 왜 여기에….”
“진 군사님의 작전이 성공한 것 같습니다.”
“작전이라는 건 도대체….”
“자세히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저희 임무는 여기에서 대기하라는 지령을 받은 것뿐이라….”
‘그래 시바. 너네가 알 리가 없지.’
“아무튼 안전한 곳으로….”
“아니요. 지금 당장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네? 하지만.”
“지금 원정대가….”
‘시바. 이 사기꾼 새끼 시바.’
중간에 보냈던 모스부호 역시 블러핑일 확률이 높지. 이번 자신이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생각하는 게 편할 것이다.
“진청 이 개새….”
‘아니야. 흥분하면 안 돼.’
흥분하면 그 새끼만 좋아하자너. 사실상 내가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니 아마 놀리기 위해서라도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다.
조금 더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타이밍에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메시지가 도착한다.
[돌아왔나 보군.]
[…….]
[결국에는… 이렇게 돌아왔나 보군. 이기영. 네놈 생각대로 될 거라고 생각했나? 하핫. 네놈이 정말로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이 미친 새끼.’
난 시바 이타누스 헛짓거리까지 하면서 동료들을 위해 희생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새끼 눈에는 그게 게임에서 이기려고 발악하는 것처럼 보였나 봐.
내가 시바 아무리 게임에서 이기고 싶었어도 그 짓거리를 해서 이기고 싶겠어? 그런 미친놈이 세상 어디에 있어?
[이거… 어떻게 한 거예요?]
[글쎄… 어떻게 했을까?]
이 새끼 진짜.
[궁금한가 보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정말로 없나?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힌트라도 말해주는 것이 좋을까….]
대충 예상은 간다. 이미 방법에 대해서는 한번 생각을 해봤었으니까.
하지만 그걸 물어보는 게 자존심 상해. 잘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다가 정답이 아닐 것 같아서 무서워.
만약에 내 추리가 정답이 아니라면 이 새끼가 얼마나 이죽거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추후에 던전공략 기록을 뒤져본다면 알 수 있겠지. 요즘은 영상기록을 전부 남기는 시대니 네놈의 궁금증을 해결하기에는 좋은 수단이 되겠군.]
[도대체 무슨 뜬구름 잡는 말씀을 하시는지는 모르겠는데… 뭐… 대충 예상은 갑니다. 솔직히 그렇게 궁금하지도 않고… 구태여 물어보는 건 밟아봐야 하는 절차가 있어서 말씀드린 거고요. 혹시나 군사님이 실수했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해결해 보려다가 망하는 거 그거 군사님 특기잖아.]
[말은 잘하는군. 아무것도 보지 못한 네놈이 뭘 알 수 있을까. 시공간이 뒤틀리는 현상에 대해서? 그 현상을 컨트롤 하는 법에 대해서? 언제나 그렇듯 겉핥기식으로 때려 맞힌다고 한들, 네놈이 본질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아. 결국 네놈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다. 이 말이다.]
[생각보다 여유로우신가 봐. 내 방식은 마음에 안 든다면서 아주 잘 써먹기도 하시고 말이야.]
[하… 하하하하하하하핫. 아아… 암호 말이로군. 글쎄… 어떨까. 블러핑이었을까? 설명하자면 길다. 위기상황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흐음… 어떨까? 하하하하하핫! 궁금한가? 정말로… 궁금한가 보군! 네놈이 이렇게 궁금증이 많았을 줄은 누가 알았을까.]
“이 씨바 개새끼!”
[하하하하하하핫!]
진짜 죽이고 싶다. 이 새끼. 죽이고 싶다.
곧바로 이지혜와의 통신 채널로 들어간 것은 당연지사.
[누나. 잠깐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진청이랑… 같이 작업 친 거 나한테도 공유….]
[저는 지금 오빠랑 할 말 없어요. 나중에 다시 연락해.]
[누나가 나한테 어떻게 이….]
[닥쳐요.]
시바.
[조금 더 나를 즐겁게 해줬으면 좋겠는데. 이기영. 하하핫. 하하하하핫!]
“이 야비한 새끼!”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핫!]
“이 개새끼! 이 나쁜 새끼! 이 치졸한 카피캣 새끼!!”
“명예… 추기경님?”
“시바! 꺼져!”
화풀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곧바로 몸을 일으킨 이후에는 검을 들어 아무거나 내려치기 시작.
쾅쾅 소리 대신에 깡깡 소리가 들리고, 손아귀가 찢어지듯이 아프기는 했지만 진정이 되기야 한다.
[엄한 곳에 화풀이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하핫. 하하하핫]
“후우… 후우… 이 새끼. 이번에 망하면 진짜….”
[분한가? 아무래도 분한 것 같은데….]
[아니요… 그게….]
[하하하핫!]
[그러니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는데….]
[…….]
[고맙습니다. 군사님. 솔직히 전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
메시지는 곧바로 날아오지 않는다.
[뭐?]
[고마워요. 정말로… 고맙습니다.]
[또 무슨 개 같은 짓거리를 꾸미….]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감사해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
[…….]
[바쁘니… 나중에 다시 연락하지.]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사람이 친절하게 대해주면 당황하나 봐.
“저… 명예… 추기경님?”
환하게 웃어주자.
“네? 무슨 일이라도….”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현재 공략 진행 상황에 대해 보고해 주시겠어요?”
“네… 네.”
‘결국 베타누스 루트를 탄 거라고 생각하면 되는 건가.’
원정대만큼 내 쪽에서도 정리해야 할 것이 많다. 아니, 걱정해야 할 것이 많다.
‘결국 어떻게 되는 거지?’
결과적으로 이타누스는 실패했다. 시기가 조금 빨랐던 거일 수도 있겠지만 알타누스는 철의 처녀로 들어가 모든 걸 지켜봤을 것이다.
내가 아는 베니고어도 남아 있고 카스가노 유노가 본 미래도 아직까지는 실현되지 않았다.
‘변수를 줄 일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이었는데.’
카스가노가 본 미래에 직면하지 않을 가장 확실한 방법이 날아갔다.
빌어먹을 야비한 악마 소환사가 스스로 대륙의 위기를 불러온 것이라고 해도 무방한 상황이었지만 녀석을 원망하거나 과거를 뒤돌아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실패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한 건 아니야.”
불완전하지만 전체적인 그림은 만들어 놨어. 성공한다면 이타누스 루트보다는 상황이 나을 거야. 최소한 내 새끼들이 나를 잊어버리는 그림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나도 모르게 거울을 들여다본다. 금안의 눈은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김현성한테 전해요. 여기로 오지 말라고.”
“네? 하지만….”
“전해요.”
“네… 일… 일단 알겠습니다.”
발걸음을 옮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아니야.’
“명예추기경님!”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오래전에 뿌려놓은 씨앗을 수확하면 돼.
나를 붙잡으려는 이들을 뿌리치며 달리기 시작한다.
“명예추기경님! 제길! 명예추기경님을 잡아!”
이라는 목소리가 들려오기는 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목적지는 멀지 않았으니까.
“네? 하지만….”
“제기랄! 명예추기경님을 보호하며 이동한다.”
‘이제는 보상을 받을 시간이야.’
“도대체 어쩌자고… 제길… 끝났군….”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명예추기경님. 제발….”
‘이대로 창 없는 방에 들어가면 말짱 도루묵이야.’
자신들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혹여나 명예추기경이 상처 입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기는 하는 모양.
놈들은 나를 막지 못한다.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무작정 달리고 있는 이쪽을 보호하기 바쁜 모양새.
이걸 어떻게 보고해야 할지 수심에 빠진 이들의 얼굴이 보이기는 했지만 징계를 받는 건 내가 아니다.
‘너희들한테도 좋은 일일 거야.’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하지만 반가운 뒷모습이 보일수록 힘이 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형님?”
“자기….”
“하아… 하아… 예언의 사제가 찾아왔습니다. 흐윽… 드락타리스님…!”
-…….
“예언의 사제가 돌아왔습니다… 흐으으윽….”
그리고….
-아아아아아아… 예언의 사제여… 흐윽… 예언의 사제여어어어어… 흐윽… 흐으으윽…
스쳐 지나가는 회상 씬.
‘제가! 드락타리스 님의 죽음이 두렵습니다.’
-예언의 사제여어어어… 흐으윽… 흐으으윽…
‘제가 두렵단 말입니다!’
소중했던… 너무나도 소중했던….
‘드락타리스님이 이곳에서 사라지실 분이 아니라는 걸 그 누구보다도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먼 미래에… 먼 미래에 대주교님께서는 더욱더 큰일을 하실 겁니다. 자세하게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드락타리스 님께서는… 이 지하신전을… 알타누스 성녀님을 구하시게 될 겁니다. 지금 이곳을 안정시키는 것보다도 더 커다란 일을 하시게 될 겁니다.’
우리의 추억.
‘약속해 주실 거라고, 어둠 속에서 피어나는 한 줄기 빛이 되어주실 거라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참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견뎌주실 거라고… 지금은… 지금은 때가 아닐 뿐입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언젠가 드락타리스 님을 찾아갈 때까지. 제가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루키페르 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이 지하신전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이들이! 진정으로 신에게 축복받은 이들이… 빛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 드락타리스 님 앞에 나타날 때까지… 살아남겠다고… 기다리겠다고… 그때가 오기를 참고 기다리며 인내하겠다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희망을 위해… 그날을 위해… 그날만을 위해서 살아가겠다고!’
짧았지만 아름다웠던… 소중한 교감.
‘약조해 주십시오!’
던전의 망령은 허물어지며. 내 발에 입을 맞춘 이후 말을 이었다.
-당신을…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오실 날을 위해. 인내하며… 또 인내하고… 살아왔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