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93화
사교회의 끝 (4)
‘이 새끼는 여기 왜 있어?’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고가 정지된 것 같다. 순간적으로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눈을 비비고 다시 한번 녀석을 바라봤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김 뭐시기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장착한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중, 만신창이가 된 희생의 천사의 모습이 그리 가슴 아팠던 것일까.
뭐라고 말을 내뱉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극장에 난입한 취객의 등장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누구세요… 라고 하면….’
별로 분위기가 좋아질 것 같지는 않다. 언젠가 써먹을 수 있는 카드겠지만 지금은 적절하지 않다.
이건….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김현성의 난입은 상정해 놓았던 여러 변수 중에서도 가장 가능성이 희박하다 판단한 변수였다.
‘초대장이 한 장 더 있었던 건가?’
어떻게 찾은 거지? 아니….
중간에 한 번 연결이 끊겼던 건 뭐였지? 어떻게 기억을 되찾은 거였지? 어째서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야.
미래는 한 번 바뀌었었다. 물론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였기 때문에 시스템에 균열이 생겼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가 한 번 바뀐 적이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내 눈이 바뀌었을 리가 없었을 테니까.
‘전령 겔크가 가지고 있는 초대장을 사용한 건가?’
바뀐 미래에 이기영은 없는 사람이다. 고로 내가 사용한 초대장은 전령 겔크가 가지고 있는 가방에 그대로 들어가 있었을 확률도 높다.
겔크에 대한 작업은 철의 처녀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 진행할 예정이었으니 내가 전부 파악하지 못한 부분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하나가 의심스러워지면 모든 게 의심스러워진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빠른 타이밍에 미래가 바뀌었다는 것도 신경 쓰인다.
철의 처녀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미래가 바뀌었다. 오차가 있었던 건 겨우 몇 시간 차이였지만….
‘솔직히 김현성이 나를 그렇게 빨리 잊는다는 것도 말이 안 돼.’
미래에서 일어난 일들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근거 있는 가설을 내세울 순 없지만 그럴듯한 가설을 내세워 볼 수는 있다.
‘일부러 잊은 거라면….’
이기영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을 때, 원정대 쪽에서도 결단을 내린 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방법은 모르겠지만 원정대 쪽에서 의도적으로 미래가 바뀌는 쪽을 선택했을 여지가 있다.
머릿속으로 일어날 법한 타임라인을 정리해 본다.
1. 빛의 성자가 점차 기억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걸 인지한 원정대가 혼란을 느낀다.
당연히 잊지 않으려고 발악하는 쪽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김현성이나 정하얀은 말 그대로 원정대에 재앙을 불러왔을 확률이 높다. 아마 이때 즈음이 개변이 일어나는 전조가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 때.
진 군사가 내게 모스부호를 보냈을 타이밍.
2.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수를 사용해 예정되어 있는 것보다 조금 더 일찍 개변을 받아들인다.
현재로서는 방법을 알 수 없다. 아마 물어보면 알겠지만… 답은 그림자의 영웅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파란 길드를 위시한 원정대가 바뀐 미래를 받아들이자고 말했을 리는 없었을 테니….
이건 진 군사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확실하겠지. 진 군사는 이기영을 잊지 말자고 발악하며 파도가 오는 걸 기다리기보다는 먼저 파도에 다가가는 쪽을 선택했다.
왜.
그래야 겔크의 초대장을 사용해서 이쪽에 오는 시간을 맞출 수 있었을 테니까?
내가 이타누스가 된 이후라면 시간에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미 완전히 뒤바뀐 미래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개변의 여지가 있는 미래라면 저항할 수 있을 일말의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느꼈을지도… 게다가….
‘던전 안에서만… 그러니까 당시 원정대에 속해 있었던 인원들만 개변을 먼저 받아들이도록 조치한 거일 수도 있어.’
던전 안에서의 미래는 변했지만 던전 바깥의 미래는 변하지 않았다.
그림자의 영웅이 모든 원정대원들에게 개변을 조금 더 빨리 받아들이는 것을 종용했던 것은 던전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의존하기 위해서 일지도 모른다.
나도 가끔 잊고 지낼 때가 있지만….
‘지혜 누나는 서큐버스를 다루니까.’
파란 길드에게 이기영을 떠올리게 하기에는 적절한 방법이다.
3. 이지혜가 김현성의 꿈속에 들어가 녀석을 깨웠고, 전령 겔크의 초대장을 이용해 왔다는 것이 당장 떠오르는 가설.
‘얘네들….’
“…….”
‘돌아버렸나 봐.’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과거에 의해 현재가 개변되는 현상을 겪은 것은 처음이었을 테고 연구할 시간도, 인력도, 턱없이 부족했다.
더미월드를 사용해 가상실험을 했다면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겠지만, 더미월드와 현실이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는 보장은 없다.
중간에 자그마한 변수가 있었더라면… 과거에 의해 현재가 개변되는 공간에 갇혀 평생을 떠돌아다니는 차원의 미아가 됐을지도 모른다.
‘미친놈들.’
이걸 제안한 진청은 그럴 만도 하지만 받아들인 놈들도 제정신은 아니야.
진청의 가설을 토대로 실질적으로 작업을 진행했어야 했을 정하얀은… 몸이 찢겨서 죽었을 수도 있었어.
“김현성. 너….”
“저는… 저는… 회귀자이고 싶습니다.”
“…….”
“저는 회귀자이고 싶어요. 회귀자가 아닌 미래는 싫습니다.”
“…….”
“저는 회귀자여야만 해요.”
‘그래? 그럼 회귀하는 것도 계획에 넣어주면 되겠네.’
“모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영 씨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어요.”
미래에서 어떻게 메시지가 도착했는지도 알겠네. 미래에서 온 게 아니라 여기로 초대된 이후로 계속 메시지 보냈던 거야.
“기영 씨… 이제는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나도 동의해.’
굳이 이럴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해. 카스가노 유노를 통해 본 미래가 아니었다면… 솔직히 오지도 않았을 거야.
‘지금 돌아간다면 준비는 다 되어 있는 건가?’
같은 미래를 마주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있나?
단순히 빛의 성자를 되찾고야 말겠다는 집념의 파란은 칭찬해 줄 만하지만… 얘네가 그 미래를 피할 수 있을까?
나는 전부 준비했나?
예언의 사제로서 필요한 걸 전부 만든 게 맞나?
솔직히 불안하다. 애초에 이타누스를 계획한 것도 이 불안함을 날려버리기 위해서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컨트롤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미쳐 버린 컨트롤 프릭이 아니라면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었겠지.
근데 어쩌겠어.
은근슬쩍 발걸음을 옮기려고 했지만 당연히 꿈쩍도 하지 않는다.
‘벨리알?’
[…….]
‘뭐 해요?’
[바쁜 일이 생각났군.]
‘무슨 개소리야. 이 양반아.’
[정말로 바쁜 일이다.]
‘너….’
조금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뭐야. 이거 모야… 이거 모야….’
안락함과 편안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나뿐이다.
다른 곳은 으적으적 거리는 소리를 내며 일그러지고 있다. 김현성의 마력이 온 공간을 좀먹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검은색 가상그래픽마저 짓누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완전하게 소환되지 못한 벨리알은 이미 몸을 내뺄 준비를 하고 있었고… 갑작스레 제삼자의 포지션으로 돌아가게 된 바하무트는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압력에 눈을 크게 뜨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성장하게 되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먼 미래의 이야기.
기껏해야 4성으로 추정되는 바하무트가 우리 완전체 7성 김현성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있기까지 하다.
“넌… 넌 누구냐….”
방금 전에 일어난 4D 그래픽 전투가 무색해질 정도의 반응. 녀석의 온몸은 금세 땀으로 범벅이 된다.
악마의 씨앗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 찼던 것과는 다르다. 지금 녀석은 순수하게 김현성을 두려워하고 있다.
온 공간을 뒤덮은 살기, 자신을 짓누르는 듯한 압박감. 몸이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목이 달아나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언제나 포식자의 입장에 서 있었던 녀석은 지금 피식자의 입장에 서 있다.
노을빛의 악마.
최소한 바하무트 에게는 김현성이 그렇게 비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넌 도대체… 뭐야….”
“…….”
“넌… 넌 도대체 뭐냔 말이다!”
“…….”
“예… 예언의 사제를… 놔… 놔라… 노을빛의… 악마여….”
“기영 씨….”
“괴물… 괴물 자식….”
시바 빨리 말해야겠다.
“죽여서는 안 돼요.”
바하무트를 죽여서는 안 된다. 놈은 이 시대의 영웅이고, 이 시대가 안정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을 때까지 대륙을 지켜야 하는 방패다.
[난 이만 물러가지.]
‘아니, 벨리알. 그러면….’
[계약 위반은 그쪽이 먼저다. 저건… 저건… 계약에 들어가 있지 않아. 아무튼… 즐거웠다.]
‘너….’
[마지막 선물로 저 흉흉한 검은 연기는 남겨두고 가도록 하겠다. 어차피 곧 사라질 테지만 말이야.]
“미래가… 미래가 변할 거예요. 그를 죽이면….”
“…….”
“사제님을 놓지 못해!”
결국에는 몸을 일으키는 바하무트.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벽에 쳐박힌다.
‘시바. 이거 어떻게 하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돌아갑시다.”
죄송합니다 봇에서 돌아갑시다 봇으로 변한 김현성.
“넌… 도대체… 뭐냔 말이다!! 이 괴물 자식!!”
흙먼지와 함께 몸을 일으키며 김현성을 노려보는 바하무트.
[이건 어떻게 될까.]
구경꾼으로 전락한 거짓과 선동과 군주.
“그는 적이 아닙니다. 템플러… 바하무트.”
한 발자국을 내디디며 뭔지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알타누스.
“……?”
의외의 목소리에….
천천히 김현성을 올려다본다.
알타누스가 이곳으로 들어오자 묘하게 안심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눈에 띈다.
초조함은 사라져 있다.
마치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같이 느껴진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둘이….’
“…….”
‘둘이… 만났었구나. 여기 오기 전에… 알타누스부터 만나고 왔었구나.’
김현성이 이곳에 온 이후부터 내게는 선택권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여러분들께서 누추한 곳에 와주셔 해주신 일… 그리고 해주시려고 하신 일에는 감사함을 표하고 싶습니다.”
분위기가 다르다.
“특히나 사제님께서 더욱더 감사함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 모릅니다. 짧은 말로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담담한 목소리가 이상하게 귀에 크게, 또렷또렷하게 박힌다.
“하지만 이 지하신전은 제가 있어야 할 장소이며… 책임져야 할… 제가 지켜야 할 장소입니다. 대륙의 몰락을 견뎌야 하는 것은 외부인이 아니라 제가 견뎌야 하는 일입니다. 대륙을 위해 희생하는 것 역시 저의 책무입니다.”
“베니고어?”
베니고어와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뭐라고 형용하지 못할 감정이 느껴진다.
“…….”
“…….”
“짧은 사교회는 끝났습니다. 그러니….”
“…….”
“하아… 흡.”
“…….”
“아무쪼록 조심히 들어가시길….”
그녀는 손을 배에 가져다 대고 천천히 고개를 숙인다.
손을 뻗고 싶었지만… 그녀의 모습은 내가 항상 머릿속으로 그리던… 숭고하고 신성한 신처럼 보여… 멍하니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먼 미래에. 다시 만나요. 사제님.”
나는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