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89화
꿈 (1)
비상식적인 광경이다. 이곳에 당도하게 된 것도 비상식적이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광경은 더욱더 비상식적이다.
인공적인 빛들이 교차하고 서로를 반사하며 그림을 만드는 것만 같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눈 같기도 했고, 텅 빈 공간 같기도 했다.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모든 것이 굉장히 성스러워 보였다는 것.
양식은 달랐지만 마치 신전과도 같은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제단이나 종교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처럼 느껴지는 소품, 텅 빈 공간 안에 있는 것들은 이게 전부였지만 단출하기보다는 경건하게 느껴진다.
신화 속의 이야기를 담은 벽화나, 조각상 따위는 없다. 대신이라고 하기에는 뭣하지만 내리쬐는 빛들이 이 공간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이 되어 있는 것만 같다.
정 가운데, 철의 처녀가 우뚝 서 있는 모습은 그중에서도 가장 이질적이다.
어째서 고문 기구가 이런 곳 정 가운데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게 되는 상황.
주변을 감싸고 있는 인공적인 빛과는 확연하게 다르게 느껴졌으니까. 이상하리만큼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이 공간은 무척이나….
‘불안하고 두려워.’
생소한 풍경이기 때문이리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자.
찰팍.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전쟁터에서 여러 번 느껴본 감각. 기분 나쁘고 구역질 나오는 감각.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니 붉은색으로 물든 바닥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 넓은 공간이 모두 피범벅이 되어 있다.
마치 얕은 호수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붉은색으로 꽉 차 있다.
신기하게도 혈향은 느껴지지 않는다. 어째서 이걸 눈치채지 못했는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비릿한 피냄새 대신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달콤한 향이 감돌고 있다.
찰팍.
찰팍.
찰팍거리는 소리 외에는 들려오는 소리가 없다.
차분하게…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동요하지 말고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을 떠올려 봐야 한다.
알타누스 님의 조언이었으니까. 한 번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계속해서 생각한 이후에 행동하라고 하셨으니까.
“여긴 도대체… 어디지?”
자신은 갑작스럽게 이곳에 떨어진 것뿐이다. 아마 던전의 함정, 이스터에그 쪽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면 원정대의 다른 인원들도 이곳에 당도할 확률이 높다.
‘히든 보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저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은 히든 보스일 것이다.
두더지 성자의 포근한 안식처에서 마주쳤던 다른 보스들과는 유형이나 성격이 다른 것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원정대 스스로가 봉인을 푸는 기믹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저 철문을 열면 높은 확률로 히든 보스가 튀어나오고 그대로 레이드가 진행될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다른 대원들을 기다리거나 이 방으로 다른 이들을 불러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합리적이다.
아무리 자신이라고 해도 아무 정보도, 동료도 없이 레이드를 진행하는 건 무리가 있을 테니까.
분명히 그게 합리적인 방법이다.
알타누스 님께서도 그리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서 계속해서 걷게 된다.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꿈에서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것뿐만이 아니다. 철의 처녀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연기처럼 흩어졌다 천천히 모이며 형태를 만든다.
신기한 광경이다. 빛이 움직이고 스스로 형태를 만들고 움직이고 있다.
마치 연극이라도 하는 것처럼 행동하고 목소리를 내뱉는다. 서로 대화를 나누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빛의 형태들은 어느 순간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씨.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습니까.’
‘아니요.’
‘네?’
‘너무 오랜만에 봐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
‘농담입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아니요. 전혀 죄송할 필요 없습니다. 바쁘시다는 건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그 무엇보다 수련이 중요하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굳이 여기서 이러고 계실 필요 없습니다. 연락할 시간도 없었는데… 다시 수련하셔야 할 시간이 아닙니까.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어서 들어가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현성 씨.’
대화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이다. 한쪽은 기분이 상한 듯 말을 쏘아 보내고 있었고 한쪽은 쩔쩔매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빛의 형태는 이쪽을 굉장히 닮아 있다. 아니, 틀림없이 현성 씨라고 불렀으니 자신의 모습이 확실할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한 인형이 얼굴이 없는 인형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저, …씨. 오늘 경매장에서 굉장히 희귀한 물건을 구해왔습니다. …씨가 기다리시던 샤넬리아 에르메스는 아니지만 루이구찌라는 가죽세공 장인이 만든….’
‘……’
‘죄송합니다. 요즘에는 매물이 통 나오지 않는 모양이라….’
‘후우….’
‘…….’
‘…….’
‘현성 씨. 길드에서 논 지 얼마나 되셨습니까? 이 가방은 또 무슨 돈으로 사 오신 건데요?’
‘…….’
‘너무 하신 거 아니에요!?’
‘…….’
‘지긋지긋해.’
말하자면 평범한 일상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서로 선물을 주고받거나….
‘샤넬리아 에르메스입니다.’
‘괜찮네요. 진열장이 꽉 차는 걸 볼 수 있겠는데요?’
‘기뻐하시니 다행입니다.’
식사를 한다거나.
‘괜찮으십니까?’
‘나쁘지는 않네요.’
그냥 평범하게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그리폰을 선물로 받았을 때는 조금 깜짝 놀랐지 뭡니까.’
‘아, 막 수도에서 돌아왔을 때였죠. 저도 좋아할지 걱정했었는데. 그때는 현성 씨가 이렇게 그리폰을 좋아할 줄은 몰랐습니다. 관련 용품이나 축제 같은 걸 즐기실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요. 솔직히 조금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당시에는 혜진 씨 때문에 조금….’
‘하하하. 그게 정말입니까?’
‘갑자기 비서실장으로 임명한다고 했을 때는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를 겁니다.’
‘그, 그건 죄송합니다.’
그리폰을 타고 라이딩을 한다거나 쇼핑을 한다거나, 하는 일상을 그린 이야기들.
차를 마시고, 축제를 열고, 웃음이 끊이질 않는 이야기들.
빛이 형태를 만든 것은 자신뿐만이 아니다. 착각이라면 좋겠지만 성기사단 전원이 자리해 있는 것 같다.
‘오, 오, 오랜만에 데이트네요.’
‘그동안 나갈 기회가 없었으니까. 오늘은 하얀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할까?’
‘정, 정말요?’
‘응.’
정하얀.
‘오, 오, 오빠.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 하얀아.’
박덕구.
‘거 운동 좀 하쇼. 운동 좀. 내 걱정하기 전에 형님 몸이나 좀 걱정하라니까. 어제도 밤샌 거 아니요? 사람이 좀 자야지.’
‘……’
‘이러지 말고 빨리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오늘은 혼자 먹는다고 말하지 마쇼. 일이 바쁜 건 알고 있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지.’
조혜진.
‘혜진 씨는 그런 말 할 자격 없죠.’
‘네?’
‘가장 마지막에 뒀던 체스가 기억 안 나시나 봅니다. 아무것도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던 걸로 기억하는데.’
‘248승 246패. 전적으로 따지면 단연코 제가….’
‘뭐 그런 걸 다 기억하고 그러십니까. 최근 전적만 기억하고 있으면 되지. 내리 세 판을 깨지고 그대로 침몰한 게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그 뒤로 하자고 했지만 꽁지 빠지게 도망친 게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시나 보군요.’
‘수준이 너무 낮은 사람과 하려고 하니 구미가 당길 턱이 있나요. 조금 더 발전하고 오라는 의미에서 쳐낸 거지 도망친 게 아닙니다. 초보자랑 두기 싫은 건 당연한 것 아닙니까. 푸… 푸흐흣.’
선희영.
‘티타임은 좋네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저도 감사합니다….’
‘평소에 너무 떠들썩하다 보니 가끔은 이런 조용한 시간이 필요하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네. …님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잘 알 것 같네요. 매번 그런 건 아니지만… 가끔은 너무….’
‘같은 생각이라니 다행입니다. 하핫. 이건 애플티인가요?’
‘네. 다른 차도 있는데. 한번 마셔보시겠어요?’
여기저기에서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거대한 테이블에 모여 잔을 들고 별것 아닌 잡담을 나누고, 노래를 부른다. 예리가 춤을 추고 있는 덕분인지 모두가 조금 더 떠들썩해진다.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것만 같다. 박수를 치며 웃고, 잔을 부딪치고 언제나 나누었던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차를 홀짝거리는 엘레나 님과 유아영은 엘프 왕국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걸음을 더 내딛자. 풍경이 바뀌었다.
얼굴이 없는 인형은 테라스에 나와 커피를 마시며 훈련하는 모습을 구경한다. 아마 저것 역시 일상이었을 것이다.
살짝 손을 들어 올려 인사를 하거나 커다란 목소리로 부르거나 함께 식사를 하러 가고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나눈다.
한 걸음을 더 내딛자. 풍경이 다시 한번 바뀌었다.
노을이 보인다. 정확히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천천히 지는 노을을 두 사람이 바라보고 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얼굴이 없는 인형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걸음을 더 내딛자. 풍경이 또다시 바뀌었다.
‘넌… 넌… 영웅이 될 거야.’
‘…….’
‘모두를 구하고, 대륙을 구하고, 나를 구할 거야.’
‘…….’
한 걸음을 더 내딛자. 풍경이 다시 바뀌었다.
‘넌 타인을 위해 희생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거고 결국에는 구원받게 될 거야.’
한 걸음을 더 내딛자. 철의 처녀가 시야에 들어온다.
철의 처녀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이 만든 빛의 형태를 바라보며 끊임없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열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확실한 모험이라는 것 역시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손을 뻗게 된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천천히 손을 뻗는다. 무의식적인 반응일 것이다.
살짝 힘을 주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문이 열린다.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자동으로 벌어진다.
“누구야….”
온몸이 붉은색으로 변한, 얼굴과 몸, 가릴 것 없이 전부 붉은색으로 뒤덥혀 있는 인형이 하나.
크고 작은 구멍이 뚫려 있고 그 곳에서는 끊임없이 핏물이 흘러나온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광경이었다. 대륙에 살아가면서 온갖 참상을 다 봐왔다고 생각했지만 그것들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잔인하게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광경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머리가 어지러워진다.
“도대체… 넌 누구… 야….”
쩌억… 쩌억…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살과 가시가 분리되는 소리가 들려온다.
철의 가시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몸에 박혀 있었는지를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말이다.
힘을 잃은 시신은 그대로 기울어진다. 팔로 시신을 안으려다 괜스레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시신은 땅바닥에 처박혔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아무 힘 없는 시신은 그렇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넌… 넌… 내 회귀자가 될 거야.’
그리고.
‘좋은 결말이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아아아….”
‘내가 네게 그런 미래를 선물할 거야.’
“아아아아아아아….”
‘…….’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넌 행복해질 거야. 나의 회귀자.’
“…….”
‘김현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