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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83화 (97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83화

알타누스 (20)

먼 시간 동안 품 안에 간직해왔던 소중한 비밀, 이쪽에게 고백하기 직전의 김현성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손과 발이 조금씩 떨리고 정상적인 표정을 유지하기 힘들다.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을 입 밖으로 내뱉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사람이 나를 믿어줄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감, 혹시 미친 것처럼 보이지는 않을까에 대한 걱정, 표정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현성이 흉내 내면 되자너.’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느껴지는 표정. 3초 뒤에 불안발작을 일으킬 것 같은 얼굴.

침착한 척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긴장하고 있는 것만 같은 행동들을 그대로 옮긴다.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필수.

물론 그 모든 것보다 중요한 것은 눈빛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면서 받았던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눈빛이 가장 백미라고 할 수 있겠지.

경험을 통해 펼쳐지는 메소드 연기는 내가 봐도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터무니없는 개소리를 듣고 있는 베니고어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릴까.

외줄을 타고 있는 듯한 분위기는 개소리도 개소리 같지 않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래. 이기영이 회귀자였던 거야.’

지상의 사제로서 활동한 이기영 사제는 우연히 베니고어와 만나게 되고, 그녀와 깊은 서사를 쌓는다는 스토리텔링.

결국 그녀를 위해 지하에 남게 된 이기영. 그런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베니고어와의 행복한 사랑이야기가 아닌 비극적 운명의 허리케인이었다.

알타누스 성녀의 몰락을 막지 못하고, 그녀의 비참한 최후를 지키지 못한 채… 이기영은 숨을 거둔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회귀가 시작된 것은 초대장을 받기 며칠 전,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괴로워하는 것도 잠시, 다시 한번 사교회에 들어온 이기영은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그래. 베니고어를, 알타누스를 구하기 위한 계획을.

“지금 그게….”

“믿기지 않는다는 것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이 이런 말을 지껄인다고 한들, 터무니없게 들린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저를 믿어 달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에요. 저를 믿고… 따라와 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게 무슨 말인가요?”

“단지… 단지 제가 베니고어 님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해요. 일단은 이야기를…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회귀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첫 번째는 당연히 혼란스러워하는 얼굴, 현실을 부정하는 듯한 표정, 애초에 바로 믿어주기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나쁘지는 않은 반응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미친놈을 바라보는 눈빛은 아니었으니까. 베니고어는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실소를 터뜨리기보다는 경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저를 베니고어라고 부른 것은….”

“베니고어 님께서는 알타누스라고 불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저와 함께 있을 때만이라도 베니고어라고 불리고 싶어 하셨습니다.”

“도서관에서는!”

“도서관에서의 만남은 의도적이지 않았습니다. 베니고어 님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지만….”

마주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갓명의 킹레바퀴였으니까.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운명. 내가 그녀에게 베니고어라고 부른 것은 과거의 감정을 숨기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지만 애초에 이기영과 베니고어는 보이지 않는 영혼의 끈으로 묶인 사이였다.

“믿을 수가 없어요. 사제님. 죄송하지만 믿기지가….”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베니고어 님께서 믿어주길 바라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린 것이 아닙니다. 제가 알고 있는 걸 말씀드리자면….”

“…….”

“알타누스 성녀는 힘을 잃게 됩니다.”

“…….”

이건 럭키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알타누스 성녀의 권능은 점차 사라집니다.”

표정이 딱딱해진다.

“지금은 수면 아래에 잠겨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타누스 성녀가 힘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됩니다.”

알타누스는 지금 이 순간에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그녀가 그걸 인지하고 있다.

“대륙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

“루키페르 님은… 루키페르 님은 대륙을 버리실 겁니다.”

“그렇지 않아요! 루키페르 님께서 저희들을 저버리실 리가….”

“그녀는 성녀님의 목소리에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

“들은 적이 있으십니까?”

“…….”

“루키페르 님의 목소리를… 그녀를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그…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어떻게 믿으라는 거예요?”

“그녀를 느껴보신 적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없다. 이미 루키페르는 대륙을 손절하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니까. 한탕 땡긴 이후에 튈 생각밖에 없을 것이다.

“대륙은 붕괴하고, 상상하기 힘든 일들이 벌어질 겁니다. 알타누스 성녀님께서는… 알타누스 성녀님께서는 자신을 희생하기로 결심하십니다. 철의 처녀에 들어가 스스로를 가두고, 대륙을 지키기 위해, 기둥이 없어진 대륙의 기둥이 되기 위해….”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타이밍. 요새 하도 울어서 눈물샘이 고장 난 것만 같다.

“말도 안 돼….”

“…….”

“거짓말이야….”

“템플러들은 당신의 피를 탐하고, 지하와 지상 두 곳 모두에 혼란이 찾아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것 여기까지입니다.”

“거짓말….”

응 거짓말이야.

새빨간… 아니, 순백색의 하얀 거짓말.

“사제님께서는….”

“저는 철의 처녀에서 베니고어 님을 꺼내기 위해….”

발버둥 쳤지만 막을 수 없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세상은 그녀에게 희생하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베니고어가 철의 처녀에서 나오게 된다면 대륙은 멸망을 피하지 못한다. 그녀는 철의 처녀 안으로 들어가 받는 고행으로 신성력을 키우고 있었고, 그 신성력으로 대륙을 지켜내고 있었다.

당시 지하신전에서 그녀가 철의 처녀에서 빠져나오길 바라고 있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철의 처녀에 못을 박은 건 그녀를 따르던 템플러들. 그녀를 꺼내려고 한 이기영 역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렇게… 돌아가셨군요.”

“…….”

“만약… 사제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면 말이에요.”

반은 넘어온 거 같은데?

“저와 사제님은 정확히 어떤 사이였나요?”

“연인… 이었습니다.”

그냥 아는 사인데 목숨까지 바쳤겠어?

“어떻게… 그, 그, 그런 사이가 된… 된 건가요?”

적당히 현실감 넘치는 소재들을 사용해 입을 연 것은 당연지사. 나는 괴롭지만 즐거운 듯이 입을 열었다.

추억을 떠올리는 것은 괴롭기는 했지만 그녀와 예전 이야기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는 건 그 어떤 것보다 기쁜 일이었으니까.

물론 그 와중에도 살을 붙이는 것은 필수.

‘그녀가 항상 밖으로 나오고 싶어 했다는 것.’

“항상…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평범해지기를 원했다는 것.’

“언제나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성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

아텐타로 변장을 하고 다니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뻔했으니까.

나는 살을 붙일 뿐이다. 그녀가 모르는 그녀의 이야기를 하고, 그녀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해준다.

함께 식사한 일, 함께 밤을 지새운 일, 기도드린 일부터, 사소한 이야기까지 전부 말이다.

‘시바. 시간을 너무 많이 쓰는데?’

점점 더 초조해지는 이쪽과는 반대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베니고어는 점점 즐거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꾸며낸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확인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이해는 간다. 이건 그녀가 바라왔던 이야기일 테니까. 듣고 있으면 재미있기야 하겠지.

“예상하기는 했지만 사제님은 사람 답답하게 하시는 데 일가견이 있으셨나 보네요.”

“…….”

“오죽 답답했으면 제가 그랬겠어요? 밀어붙일 때는 밀어붙이셨어야죠.”

“…….”

“어쩐지 처음에 만났을 때는 묘하게 적극적인 것 같으시더니… 이전의 삶이 후회돼서 그런 거였군요. 아! 아직 사제님의 말을 믿고 있는 건 아니에요.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걸 전제로 두고 말씀드리고 있는 거랍니다.”

알타누스에서 베니고어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정도였으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하하….”

하는 웃음소리도 한 번 내주고….

“네. 그렇습니다.”

하는 호응 소리 한 번. 그 와중에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한 번 더 도착했다.

10시간.

웃고 떠들다 보니 2시간이 지난 것이다.

‘제길….’

“그래서….”

“네.”

“그래서 만약에… 사제님의 말이 진실이라면 저는 뭘 하면 되는 건가요?”

“…….”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방금 말씀드린 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베니고어 님께서는 자신의 삶을 즐겨주시면 됩니다.”

“그, 그런 말이 어디 있나요?”

“그게 제가 여기에 온 이유니까요.”

“정확히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데요? 아… 물론 사제님의 말이 진실일 경우를 전제로 드리는 질문이지만….”

“베니고어 님이 희생하시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

내가 대신 희생할 거야.

희생 시바 내 거야.

누구한테도 못 줘.

네 입장에서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지.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날개를 살짝 펼쳤다.

내가 대신 대륙을 지탱할 수 있을 거라는 의미로 말이다.

당연히 베니고어의 눈동자가 커지기 시작한다.

“어?”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 신성한 날개와 회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실 그냥 뽑아본 것에 불과하지만 보는 이에 따라서 왠지 관련이 있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이런 날개 달고 있는 새끼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이렇게 신성한 빛을 내뿜고 있는 사람이 눈물까지 흘리면서 그짓말을 입 밖으로 꺼냈겠어?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끔 베니고어의 머리를 쓰다듬었던 버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눈앞에 있는 알타누스는 베니고어처럼 애매한 포즈를 취하지는 않았지만 방금의 모습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위화감을 느꼈던 것만 같았다.

1회 차에서 몇 번이나 했던 행동. 몸에 익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라는 것을 그녀도 느낀 것이다.

“…….”

“정말이었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것처럼 느껴지기는 했지만 베니고어는 뭔가에 홀린 것처럼 몸을 피하지 않는다.

“아….”

넌 조용히 꿀이나 빨아.

“짧은 만남이라 아쉽습니다만… 함께할 시간이 많지는 않은 것 같네요.”

“…….”

“아니….”

“…….”

“다시 만나면 꼭 드리고 싶은 말이었어요.”

“…….”

“사랑합니다.”

슬픈 미소 장착.

“저, 저는….”

“사랑해요.”

“저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꿈뻑꿈뻑 커다란 눈만 깜빡이는 녀석.

얘가 순진하기는 해.

이야기에 몰입했는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자너.

“이번에는 제가… 베니고어 님을 지키겠어요.”

전형적인 클리셰 대사 한번 내뱉어 줘야지.

그리고, 다시 한번 거대한 폭음 소리가 들려왔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남은 시간 10시간.

“씨이발… 남은 시간 10시간.”

콰아아아아아앙!

“남은 시간 10시간.”

아니, 어쩌면 더 짧을지도 모른다. 루트를 정확하게 선택한 이상….

‘내가 잊혀지고 있을 수도 있어.’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이기영은 사라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달리는 와중에 유리에 비친… 내 한쪽 눈이 빛을 잃어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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