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77화
알타누스 (14)
대놓고 희생과 부활의 신이니 뭐니 지껄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당연하지만 날개를 계속해서 펼치고 있을 수도 없다.
루키페르의 화신이니 내 입으로 떠들어 봐야 입만 아프고… 무엇보다 저쪽에서 정확히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령 겔크 같은 미친 짓을 보이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으니까.
마치 환상과도 같았던 그 찰나. 그 찰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혹시 자신이 잘못 본 것은 아닌지, 내가 정말로 현실을 본 것이 맞는지 스스로 의구심을 느낄 정도만.
그 정도만 되더라도 놈을 흔드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만약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의심은 사라지겠지.
특별한 신성력을 지닌 대륙의 방랑 사제, 혹은 신의 축복을 받은 성자.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거나, 루키페르의 사자라고 생각해도 상관은 없다.
중요한 것은 부정적인 의심을 날려버리는 것이었으니까. 기왕 의심을 한다면 긍정적인 쪽으로 해주면 좋겠다.
“제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템플러 바하무트.”
“…….”
“템플러 바하무트가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저는 그냥 평범한 방랑 사제입니다. 진심을 다해 루키페르 님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그분만을 위해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제 과거에 대해 의문을 느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만….”
“…….”
“예전의 삶이야 어찌 됐든 간에 지금의 저는 그분의 사제에 불과합니다.”
‘이 새끼 아직도 정신 못 차리네.’
“방금….”
“…….”
“방금은….”
“네?”
“방금은 무슨….”
“무슨 말씀이신지….”
“…….”
“…….”
이렇게 시치미 뚝 떼고 있으면 나는 선량한 사제가 된다 이 말이야.
‘기영이는 시바 아무것도 몰라요.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건지, 방금 뭔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결국에는….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제님. 그리고….”
“…….”
“아까 전 무례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래. 이렇게 나와야지.
“받아들이도록 하지요.”
그래도 분위기가 어색하기는 해.
명백히 녀석이 내 쪽에 실수를 저지른 상황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방금 본 환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남아 있을 테니 제대로 사고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분위기는 이미 이쪽으로 넘어온 거나 마찬가지. 아까까지가 녀석의 턴이었다면 지금부터는 이쪽의 턴이라 봐도 무방했다.
“그럼. 지금부터 좋은 시간을 가지면 되겠군요.”
“네?”
“네제스카 공국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여러 가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
본래 목적에 충실하자는 뜻이다. 어버버 정신 못차리고 있는 녀석을 몰아치는 것 정도야 일도 아닐 테니까.
네제스카 공국에 대한 이야기, 템플러에 대한 이야기, 사교회에서 나온 이야기들, 할 이야기는 많다.
애초 오늘 사교회에서는 조금 더 많은 사람을 만나보려고 하기는 했지만 대형 떡밥이 스스로 굴러들어 온 상황에 이걸 그냥 차 버릴 수 있을 리 만무.
내가 생각해도 이기영이라는 인간은 남의 환심을 사는 데 특화된 인간이다.
적당히 맞장구쳐 주면서 대화에 맞춰준다. 듣기 싫은 이야기는 자제하고 듣기 좋은 이야기로 환심을 사는 방법은 간단하지만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런 타입은.’
대놓고 아부하는 건 많이 겪어 봤을 테니까. 오히려 방금 전에 일어났던 사소한 사건이 도움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놈에게 빚을 하나 만들어 놓은 것과 다름이 없다.
‘애초에 손님 신분으로 온 거기도 하니까.’
“그렇군요.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네. 아시다시피 네제스카 공국은….”
“아.”
공국 띵 좀 주고받고, 중간에 와인도 한 잔 마시고 말이다.
물론 신학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는 없다.
녀석 역시 템플러로서 신학을 공부한 입장이기는 하지만 교국의 명예 추기경으로써 신학에 모든 걸 매진했던 이쪽과 수준이 같을 리 만무.
루키페르의 교리야 이미 머릿속에 있었고 명망 높은 신학자가 휘갈긴 지식들도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교리에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개인적인 해석을 덧붙이고, 부족해 보인다 싶으면 선문답 같이 애매한 발언으로 혼을 쏙 빼놓는다.
“모든 것이 루키페르 님의 뜻일 겁니다. 땅은 푸르고 강은 어둡지 않습니까?”
나도 뭔 말인지 알 수 없는 개소리. 땅이 푸른데 왜 강이 어두운지는 나도 모른다.
애초에 설득력 없는 개소리이기는 하지만 이 말이 나오기 전에 깊이 있는 성서에 대해 3시간이나 토론을 주고받다 보면 뭔가 다른 해석이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녀석의 머릿속에서 이기영 사제는 흔히 말하는 배운 놈이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즐겁고, 차갑고 성스럽게 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사제님… 제가 정확히 이해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지 조금 풀어서 설명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풀어 설명해 드리는 것 자체가 성스럽지 않습니다. 템플러 바하무트. 이 문제란 그런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만….”
“…….”
이 새끼 입장에서는 머리 아플 수밖에 없는 상황.
“부끄럽습니다. 저 역시 루키페르 님을 진실되게 모시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제가 책을 읽고 기도를 드릴 때, 템플러 바하무트는 그분의 검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너무 쪽 주면 안 되니 적당히 치켜세워주는 것도 잊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누구나 이쯤 되면 느끼는 것이 있다.
‘생각보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해 줘도 괜찮다. 가까워지는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하니까.
발코니에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교회장 안으로 들어서고, 자연스럽게 발걸음을 옮기며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다.
템플러 시몬을 비롯해, 사교회장에 초대된 떨거지들이 대화에 편승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는 하지만 술자리 맨 마지막에 남아 있는 사람들처럼 언제나 마지막에는 놈과 내가 남아서 대화를 나눈다.
산책을 핑계로 잠깐 자리를 벗어나고 다시 한번 뜻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당연한 수순, 생각보다 대화가 통하는 상대의 등장에 놈도 제법 말이 길어지고 표정에는 호의가 들어서고 있다.
날개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빛과도 같은 이기영의 성품에 영향을 받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사교회장에서 어느 정도 멀리 떨어졌을 때 다시 한번 말을 이었다.
마침 딱 타이밍도 좋다. 걷다 보니 어느덧 훈련장처럼 보이는 공간에 들어서고 있었고, 신탁의 사제 이기영의 인간적인 모습도 보여줄 때가 왔으니까.
“예전에는 저도 검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
“…….”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시군요.”
“죄송합니다. 단지 상상이 가지 않아서….”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누구나 유년 시절에는 기사나 용병을 동경하기도 하니까요. 당시에는 루키페르 님의 뜻을 알기 전이었고… 제 숙명이 뭔지 깨닫기도 전이었지만… 다들 그렇듯 괴수들이나 몬스터를 쓰러뜨리는 상상을 하기도 했답니다. 용사가 되고 싶어 하는 꼬마들처럼 말입니다.”
누구한테나 하는 말은 아니야. 와인은 분위기에 맞춰주느라 딱 한 잔밖에 안 마셨지만 살짝 취기가 올라오고 있는 컨셉이거든.
그래서 괜히 말도 많아지고 예전 이야기도 하고 그러는 거야. 물론 네가 생각보다 편해서 입이 길어졌을 수도 있어.
“소도시에 상주하고 계신 기사님께 배운 적이 있는데… 템플러 바하무트가 보기에는 우스울 수도 있었지만 당시에는 제법 진지했었습니다.”
‘이 새끼 보고 싶다는 표정이자너.’
무례가 되지는 않을까 걱정돼 말하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보고 싶다는 표정이다. 명분을 쥐여주는 게 옳겠지.
“지금은 호신용으로 익히고 있는 수준이지만… 방랑 사제로 지내다 보면 생각보다 험한 일에 휘말리기도 하니….”
“그렇군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가 한번 봐 드려도 되겠습니까? 아까의 사과도 겸해서….”
“이미 사과는 받아들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템플러 바하무트.”
“…….”
“그래도 좋은 기회이니… 짧게나마 부탁드리겠습니다.”
어색하게나마 검을 들어 올린다.
‘현성이한테 배운 살인검술을 펼치고 싶지만….’
이쪽의 정보를 유출할 수는 없는 노릇, 라파엘한테도 짧게 검을 배웠으니 놈의 것을 선보여도 될 것 같았다.
나름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벤트, 대화하는 내내 끌려다녔던 녀석을 위한 자리였다.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동등한 우정을 위한 발걸음.
“후우….”
제법 진지하게 기초 검술을 펼친 것은 당연지사. 녀석도 제법 진지하게 검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검이 생각보다 무거워 팔이 살짝 후들거리기는 했지만 검은 검로를 벗어나지 않는다. 약 30분 여 동안이나 검무는 계속된다.
마침내 검을 내려놨을 때. 녀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검을 배우셨습니다.”
‘그래?’
“기본체력이 조금 부족하신 것 같기는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 차마 코멘트를 내리기 힘들다는 표정이 괜스레 이쪽을 비참하게 만들기야 했다.
“뻔한 말이지만 검을 휘두르실 때는 좀 더.”
심지어 시범을 보이는 녀석.
살짝 휘두른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후웅 소리가 들려온다.
“중심을 잘 잡아줘야 하는 검술이라 맞지 않으셨을 수도 있습니다. 지나친 기교나 개인이 가지고 있는 마력에 의지하는 검술처럼 보여 더욱더… 간단한 검술이지만….”
‘말문 트였네. 이 새끼. 신났네.’
신학토론 타임 때 입 꾹 다물 고 있었던 것을 만회하려는 듯 적극적이다.
“제가 한번 잡아드리겠습니다.”
“…….”
“네. 그렇게….”
“…….”
“하체에 조금 더 힘을 실으셔야 합니다. 팔을 이쪽으로… 네. 잘하고 계십니다.”
‘시바 더럽게 힘드네.’
“…….”
커다란 팔이 몸을 이리로 저리로 움직이니 마치 인형이 된 것 같은 느낌.
물론 너무 오랜 시간을 쓸 수는 없다.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었으니까.
녀석도 만족하고 이쪽도 대충은 만족한 시간. 연무장에서 빠져나온 이후에는 조금 더 편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기 전에 한마디는 더 하고 가야지.
“여기서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군요.”
“네.”
“네제스카 공국에서는 항상 일이 끝난 이후에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했습니다. 새까만 하늘에 별이 수놓아져 있는 모습은 하루의 피곤을 날려주는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했거든요. 그게 마치 습관처럼 되어버려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위를 올려다보고는 했답니다.”
“여기에 온 이후로는….”
“네. 같은 하늘을 본 적은 없지만. 오늘은 저 새까만 천장이 예전에 보던 것과 같은 모습처럼 보이는군요.”
내가 무슨 이야기하고 있는 건지 알거야.
“…….”
“이렇게 오랫동안 누군가와 이야기를 한 것도 정말로 오랜만인지라… 오늘 어울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템플러 바하무트.”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사제님.”
나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숙소까지 안내해 주겠다는 템플러 바하무트의 제안을 애써 거절한 채로 말이다.
예상했던 것처럼 얼마 되지 않아 템플러 제니가 이쪽을 반기는 중, 물론 매번 보이던 활기찬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진 내 표정을 보았기 때문일까.
“사제님…?”
이라고 말을 내뱉은 이후에는 내 상태를 보고 있었다. 목 빠지게 기다렸던 드락타리스 역시 마찬가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쉰다.
눈에 눈물을 일발 장전하고 계속해서 숨을 가다듬는다.
참으려고 했지만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무슨 일입니까. 이기영 사제님… 대체 무슨….”
템플러 제니도 잘 보고 있지? 나중에 템플러 선배님 팔 한 짝 정도는 날려줄 거라고 믿을게.
“그는… 하아… 하아… 그는….”
분탕 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