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76화
알타누스 (13)
굳이 마음의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빌런 냄새가 코를 찌르자너.’
사이코패스 살인마 정진호, 떨거지 이설호, 악마 숭배자 이토 소우타, 악마 소환사 진청, 27군단 수장 벨리알,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세라핌 얼터, 언급할 가치도 없는 쓰레기 송수경.
워낙 많은 빌런들을 거쳐오다 보니 등장 씬만으로도 이 새끼가 빌런인지 아닌지 구분할 수 있을 지경에 이른 특유의 빌런 센서.
‘관상이 딱 빌런이야.’
이 새끼가 바로 빌런이었다.
멀쩡하게 생기기야 했다.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꽤 생긴 편, 김현성보다야 아니기는 했지만 제법 선이 굵다.
자연스럽게 놈을 훑어보게 된다. 차희라처럼 새빨간 붉은색 머리는 아니지만 붉은 기가 도는 머리 색.
밝은 갈색인지, 애매한 붉은색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머리카락을 흔히 말하는 예수 머리처럼 늘어뜨렸다.
무엇보다 커다란 몸이 눈에 띈다. 근육으로 꽉 차 있는 거구, 근육 돼지 박덕구와는 다르게 순수하게 사이즈가 커다랗다는 느낌이었다.
‘190 넘는 건가?’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신화 속에 등장하는 영웅, 반신과 같은 이미지.
터질 것 같은 팔뚝은 이 새끼가 힘캐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저 손으로 수백, 아니, 수천 명은 루키페르 곁으로 보냈을 거야. 시바 새끼.’
말하자면 녀석은 이 시대의 김현성이다.
영웅.
대륙의 영웅, 역사 속에서 잊혀진 영웅.
마음의 눈에 보이는 스탯과 능력들 역시 놈이 영웅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만 같다.
직업, 압도적인 스탯, 특수능력, 고유능력, 장비, 칭호, 뭐 하나 거를 타선이 없다.
김현성과의 차이점은 힘캐냐 민첩캐냐 정도의 차이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의 놈이 우리 현성이를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지금의 녀석과 현재의 김현성을 비교한다는 게 무리가 있다.
‘그래 시바 내가 얼마나 열심히 강화했는데.’
빵 현성, 1회 차 현성, 2회 차 현성, 둠현성, 둠둠현성, 유대감 잃은 현성, 노을빛 현성까지.
김현성을 강화시키기 위해 그간 얼마나 많이 노력했던가. 아무리 녀석이 과거의 영웅이라고 한들, 내가 공을 들여 만들어낸 최종 진화, 7성 김현성과 비슷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굳이 비교하자면….
‘둠현성… 아니, 둠둠현성이랑 비슷하려나.’
“안녕하십니까. 이기영이라고 합니다. 만나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바하무트 님.”
“이제야 인사를 드리게 되는군요. 기왕이면 조용한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만….”
“…….”
‘미친 빌런 새끼.’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세라핌 얼터에게 다소 허무하게 퇴장했던 둠둠현성이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성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김현성의 무력수치는 쓰로누스도 힘에 겨워할 정도였고, 스탯이나 파괴력 면에서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스펙업 되어 있었던 상태였다.
눈앞에 있는 녀석이 그 정도라는 게 어처구니없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알타누스 성녀가 내리는 권능은 단순히 곁가지에 불과하다.
‘이 새끼 지금… 인간은 맞는 건가?’
순수한 인간이 정말로 이 정도까지 강해질 수 있나.
있다. 기억나는 사람이 있기는 했으니까.
‘희라 누나.’
타고나길 강자로 태어난 사람, 위에 올라 남을 깔아뭉개기 위해 태어난 종류의 인간.
혹시나 종이 다른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인간들이 있다. 녀석은 그런 종류의 인간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김현성과 차희라의 장점을 합쳐 놓았다 판단해도 될 것 같았다.
희라 누나처럼 이성을 잃는 걸 즐기는 것도 아닐 테고, 본능에 따라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다.
놈의 칭호와 특성에 검사 관련 항목이 빼곡히 적혀 있는 것을 보면, 희라 누나처럼 숨만 쉬어도 레벨 업 같은 종류의 주인공은 아니라는 판단이 선다.
녀석은 자신을 단련시키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향상심을 추구하며, 발전하고 싶어 하는 인간이었다.
템플러 육성 실험 보고서를 작성한 것 역시 녀석이겠지. 놈에게 세월은 무기다.
만약 이 빌런이 정말로 영생을 산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이 추악한 괴물 새끼.’
재해나 다름없는 괴물이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옆에서 이인자마냥 무게를 잡고 있는 템플러 시몬은 보이지도 않을 정도의 존재감. 나도 모르게 이 새끼한테 빌붙고 싶어지는 분위기.
처음 튜토리얼에 떨어졌을 때 이놈 옆으로 떨어졌더라면 무조건 이 코인을 매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빌런일 뿐이죠.’
놈에게서 풍기는 빌런의 악취는 저절로 신성한 영혼을 떨리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기회가 생기지 않더군요. 드락타리스 대주교님께서 얼마나 꽁꽁 숨기고 싶어 하시는지… 이제라도 뵙게 되니 다행이로군요.”
그래.
‘드락타리스가 막았겠지. 너네 정적이잖아.’
“제가 그간 너무 바빴던 터라….”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까워지고 싶어 던진 농이었는데… 부담스러우셨다면 죄송합니다.”
“…….”
“기도실에서 일어났던 기적에 대해서는 전해 들었습니다. 물론 그것 외에도 개인적으로 이기영 사제님께 관심이 있어서 말입니다. 네제스카 공국에서 방랑 사제로 계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바하무트 님.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만 공국의 분쟁지역에서 활동했었습니다.”
“저 역시 네제스카 공국에서 활동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전시상황이었지만 말입니다. 아. 당시에 저는 민간인들의 보호하는….”
“그렇군요.”
하지만 일단은 미소를 보이는 것이 옳다. 저쪽도 내게 호의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템플러들이 지상으로 파견을 나가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니지만… 당시 네제스카 공국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끝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닿는군요. 만약 괜찮으시다면… 잠깐 말 상대가 되어주시겠습니까?”
당연히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바하무트 님.”
‘화술도 좋고. 매너도 좋네.’
검만 휘두르는 타입이 아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예상한 것보다 훨씬 능숙하다.
네제스카 공국으로 공통점을 만드는 것도 그렇고, 자연스럽게 대화하기 편한 주제로 바꾸는 것 역시 말이다.
얼굴에는 순수한 호의가 가득 차 있다. 연기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기적의 사제, 신탁의 사제라고 불리는 이기영을 알고 싶다는 열망이 보인다.
저런 모습이 정말로 놈의 성격인지는 알 수 없다. 속을 숨기고 있을 거라는 의심이 생기기야 했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녀석이 순수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세월과 환경은 인간을 변하게 만든다. 녀석 역시 그런 종류일지도 모르지.
“대주교님. 잠깐… 괜찮겠습니까?”
“그거야 이기영 사제님의 뜻이 아닙니까. 제게 물을 것이 아닙니다. 템플러 바하무트.”
“그렇다면 잠깐 둘이서 이야기 좀 나누고 오겠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익숙한 듯 몸을 움직인다. 발코니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보니 방해받기 싫다는 의지가 보이기야 했다.
나 역시 놈을 따라나서자 자연스럽게 불어오는 바람이 느껴진다. 계속해서 들려오던 음악 소리와 소음들이 일순간 줄어든다.
“그래서… 네제스카는… 지금은 좀 어떻습니까?”
“솔직히 말해 상황이 나아졌다고는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만… 공국민들 스스로가 이겨내고자 하는 의지가 큽니다. 방랑 사제들 때문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돕고, 힘겨운 상황을 함께 헤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더군요.”
“…….”
“정확히 공국의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전부 설명해 드릴 수는 없지만 최소한 제가 위치한 마을은 그런 분위기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간혹 마주친 다른 방랑 사제들도….”
“마을이 어디 즈음에 있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마 말씀드려도 모르실 겁니다.’
라는 말은 안 통하겠네.
“소도시 아르페 근처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템플러 바하무트.”
“아르페라….”
“혹시 활동하셨던 지역이….”
“아닙니다. 사제님. 제가 활동한 지역은 더 전선에 가까운 지역이었던 터라… 중간에 잠시 거쳐간 것이 전부였습니다. 분명히… 도시 중앙에 있는 분수가 아름다웠던 것 같군요. 묵었던 숙소도 상당히 인상적이었습니다.”
“…….”
“지금은 정확히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사제님은 잘 알고 계시겠군요.”
이 새끼 지금 보니까.
‘떠보려고 이러는 건가.’
이해가 되는 반응이기는 했다. 어딘가에서부터 뚝 떨어진 방랑 사제가 사교회 중심이 된 것도 모자라 신탁까지 받았으니….
사실 여기까지는 그럴 만도 했지만 템플러 제니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분명히 템플러들 내에서도 기도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물었을 테고, 루키페르 님을 걸고 맹세까지 한 템플러 제니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무언가 의심스러웠을지도 모르지.
특히나 드락타리스 쪽의 인사였으니 더욱더 의구심이 생겼을 것이다.
템플러 내에서 이런저런 뒷조사를 했다면 그 의심은 더욱더 증폭될 수밖에 없다.
본래 방랑 사제라는 게 정확한 신분을 찾기 어렵지만….
‘나는 정말로 나오는 게 없었을 테니까.’
초대장을 어떻게 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찾아봤을지도 몰라.
“지금은 예전과 같은 모습은 찾으실 수 없으실 겁니다.”
“…….”
“그래도 여전히 아르페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템플러 바하무트.”
라는 말로 대충 얼버무리는 게 최선이다. 나는 아르페라는 소도시에 가 본 적이 없었으니까.
물론 네제스카 공국에 대해서는 질릴 정도로 공부했다. 녀석이 말하는 분수가 뭔지도 알고 있고,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공국민보다 내가 더 공국에 대해 잘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을 애매모호하게 하는 게 최선이다.
‘이 새끼도 조심하고 있는 거야.’
더 직접적으로, 혹은 멍청하게 떠보려고 했다면 없는 것 가지고 입을 털었겠지. 소도시 아르페에 있는 호수가 어쩌고 말했을 거야.
이쪽에서 네. 그 호수 참 아름다웠어요. 라고 말하면 아르페에는 호수가 없습니다. 라고 태세전환 했을 거라고….
녀석도 반신반의하고 있을 것이다. 드락타리스 대주교가 수작을 부린다고 하기에는 당시 기도실에서 일어난 기적을 목도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퍼져 나갔을 것이고… 목격자의 생생한 간증을 들어봤다면 녀석도 내게 무례하게 대할 수는 없다.
“정확히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
먼저 선수를 치는 게 좋겠지.
“아무래도 템플러 바하무트는 다른 것에 관심이 있으신 것 같군요.”
나는 멍청이가 아니야.
라고 한번 으름장 놓는 게 중요하지.
덩치에 비해 놈은 이성적이다. 당장에라도 때려죽일 수 있는 드락타리스 대주교를 데리고 정치싸움을 하고 있는 걸 보면 규율과 규칙을 중요시할 것이다.
“저는 바보가 아닙니다. 템플러 바하무트. 용건이 있다면, 정말로 궁금한 것이 있다면 가감 없이 물어주셨으면 합니다.”
“…….”
“…….”
“죄송합니다. 사제님.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지.”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
“…….”
침묵이 드리운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지만… 망설이던 녀석은 결국 말을 이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
“…….”
“템플러 바하무트의 눈에는….”
“…….”
“제가 어떻게 보이십니까.”
말을 끝으로.
나는 날개를 펼쳤다.
환한 빛이 떨어지고, 놈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한쪽 눈이 빛나고 다시 모든 것이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찰나.
마치 환상과도 같았던 그 찰나.
놈은 숨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