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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73화 (964/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73화

알타누스 (10)

“그럼 받아들인 것으로 알고 있을게요. 메텔 수호자님.”

‘얘 정신 못 차리네.’

“…….”

“…….”

“일단 프로그램에 기초가 되는 공식들은 정리해서 알려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는 않을 거예요. 제가 메텔 수호자님과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지는 않을 것 같거든요.”

“네? 그런… 이걸 어떻게 혼자….”

“제 역할은 기초를 닦아 드리는 게 전부일 것 같네요.”

“분명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체적인 방향을 잡아준다는 거지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붙어 있겠다는 뜻이 아니었어요.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여기서 할 일이 있다니까요. 메텔 수호자님께 손과 발이 되어달라고 말한 건 그냥 뱉은 말이 아닙니다.”

“…….”

“…….”

“제가… 정확히 뭘 하면 되는 겁니까.”

해야 할 일은 많다. 대표적으로는 그녀가 가지고 있는 인맥과 이쪽을 연결해 주는 일, 집단과 집단 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보고서를 제출하는 일, 이쪽을 대신해서 지하신전을 탐색해 주는 일 말이다.

‘시간이 너무 부족해.’

처음에는 이곳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는 상황을 걱정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일을 하기에 시간이 한정적인 게 걱정거리로 다가온다.

말 그대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던전에 대한 정보도 계속해서 미래로 전달해야 했고.

베니고어를 신성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해야 했다.

사교회를 장악해 알타누스 성녀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템플러들의 힘을 약화시킬 수단도 찾아야 한다.

여기에 균열 수호자의 교육까지 미션으로 떨어졌으니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물론 알타누스 성녀를 바닥으로 끌어내릴 기반은 이미 마련되어 있다. 드락타리스 대주교를 포함한 일부 깨어 있는 사제들은 이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연못에 돌덩이를 던진 이상 그 파문은 연못 끝까지 퍼져 나갈 것이다.

사교회가 끝난 이후에 얘네들끼리도 무언가 대책을 강구할 거고…. 알타누스의 몰락과는 별개로 자신들의 노선을 확실하게 정하게 되겠지.

‘일단 템플러들과 드락타리스 대주교의 관계만 망치면 되니까.’

이것 역시 진행 중이다.

아니, 내가 진행하지 않아도 지들끼리 북 치고 장구 칠 확률이 높다.

드락타리스가 템플러 제니를 쓱싹 하려 시도한 것만 봐도 녀석이 템플러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정황상 쿠데타 같은 사건은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녀석이 지하 신전 내의 미묘한 세력 구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그 사실은 이번 사교회에서도 아주 잘 드러난다.

‘뭔가 잘못한 게 있는 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건가.’

몇 가지 불안 요소들은 있다. 일단….

‘지금까지 드락타리스 공략을 완료하지 못한 건 이상해.’

내가 필요 이상으로 드락타리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

기도실은 넓다.

차분히 공략을 진행하고 있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 역시 무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까지 공략이 늦어지고 있다는 건….

나를 바탕으로 녀석의 세력이 성장하고 있을 가능성을 떠올리게 해준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겠지.

지하세계 내의 복잡한 세력 구도를 떠올려보면 녀석이 견제하고 있는 것은 템플러뿐만이 아닐 수도 있다.

필연적으로 놈의 세력이 커졌을 때 다른 세력들이 작아진다는 건 환호할 만하지만 혹시라도 사상자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 보자 머리가 아파올 수밖에 없었다.

‘혹시 드락타리스를 아군 NPC로 영입할 수는 없나?’

나쁜 판단은 아니다. 가능, 불가능의 여부를 떠나서 한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드락타리스가 템플러들을 더 적대하게 만들고, 템플러들을 쓸어버리는 걸 숙원처럼 느끼게 해준다면 녀석의 망령이 원정대에 힘이 되어줄지도 모르지.

“아까 전 일 좀 처리하고 올게요.”

“저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

아직 파티가 한창, 다시 사교회 속으로 섞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일단 발걸음을 옮긴 것은 아텐타들이 머물러 있는 장소였다.

‘베니고어랑도 다시 한번 이야기를 해봐야 하니까.’

“안녕하십니까.”

“네. 사제님. 혹시 도와드릴 일이 있나요?”

“갈색 머리에 코에 주근깨가 난 아텐타님을 찾고 있습니다. 귀엽고… 그리고… 아름다우신… 베니고어 님이라고 하면….”

“아!”

이윽고 본인들 끼리 속닥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새 이야기를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호의적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지는 않다.

‘그새 소문 퍼뜨렸자너.’

“어떻게 하죠? 사제님이 찾으시는 아텐타는 지금 다른 업무 때문에 바쁜데….”

“잠깐이라도 안 되겠습니까?”

이미 본인을 찾아도 이야기해 주지 말라는 전언을 들었겠지.

“글… 글쎄요. 이야기는 드려보겠지만….”

“도서관에서 기다린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네?”

“오실 때까지 도서관에서 기다리겠다고 전해주세요.”

전형적인 클리셰. 상대가 올 때까지 한 장소에서 기다리는 순애보.

솔직히 백 퍼센트 먹힐 것 같기는 했다.

얘가 진심으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나온다기보다는 그냥 이 상황을 즐기고 싶어서 등장할 확률이 높다.

‘드라마 퀸이기는 해.’

인정하기는 싫지만 베니고어와 내가 어느 정도 닮은 부분이었으니까.

‘나도 그 심정 이해하거든.’

얘 심리를 대충은 이해할 수 있다. 야심한 시각에 자신을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는 지상의 사제, 물론 전에 작은 오해가 있기는 했지만 모든 건 두 사람의 관계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련이다.

심지어 갈등을 해결하는 장소가 처음 만났던 도서관이다.

좋다 싫다 이전에 무대가 있으면 나가고 싶어지는 게 드라마 퀸들이 사는 법이 아니었던가.

일단 이야기를 들었으면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서는 못 배길 확률이 높다. 막말로 내가 베니고어였더라도 일단은….

‘무조건 나가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안 오고는 못 배기지.’

“꼭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처연한 표정을 선보인 것은 당연, 이 자리에 있는 아텐타들이 베니고어에게 지금의 상황을 전할 테니 지금은 미안한 감정을 가득 담은 얼굴을 보이는 것이 옳다. 힘들게 발걸음을 옮기는 뒷모습까지 완벽했겠지.

정확히 베니고어와 처음 만났던 곳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어차피 퀘스트도 넣어야 하니까.’

현재 원정대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인 작업도 필요하다.

물론 적당히 마무리 지은 이후, 오매불망 베니고어를 기다리는 모션을 취한다.

초조한 듯이 손톱을 물어 깨문다거나 한자리를 빙글빙글 도는 정서가 불안한 모습도 선보이는 것이 옳다.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근처를 기웃거리는 것이 보인다.

입가에 미소가 피어 있는 걸 보니 지금 펼쳐지고 있는 이 상황이 만족스러운 모양.

종류는 조금 달랐지만 이기연과 이지후를 연기했을 때의 지혜 누나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좀 빨리 좀 와라.’

조금 더 내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이후였다.

손가락 두 개를 꼼지락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온 드라마 퀸의 얼굴에는 방금까지 본 적 없었던 슬픈 표정이 잠들어 있었다.

“베니고어 님!”

“지, 지금 뭘 하시는 건가요? 사제님.”

“…….”

“이렇게 무작정 사람을 불러내면 뭐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

“저도 제 나름대로 사정이 있어요. 아텐타로서의 일도 있고… 개인 사정도 있는데… 이렇게 무작정… 제 동료들에게 그런 말을 남기시다니… 너무 무, 무례하신 거 아닌가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베니고어 님.”

“흥. 또 입에 발린 소리를… 사제님은 보면 볼수록 실망만 안겨주시는 군… 요….”

성큼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선다. 베니고어가 말끝을 흐린다. 계산에 이런 상황은 없었다는 듯한 얼굴, 다시 한번 한 발자국을 내딛자 왠지 모르게 기대하고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이 시야에 비쳤다.

‘아니야. 그런 건 아니야.’

“갑자기… 이렇게 다가오시면….”

“신께 맹세하건대 베니고어 님. 제 감정은 아직도, 베니고어 님을 처음 마주쳤을 때와 같습니다.”

조용히 베니고어의 손을 잡고 내 가슴 위로 그녀의 손을 얹힌다.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느껴지도록 말이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그대로 느낀 베니고어는 제법 흡족한 얼굴이 되어 있다. 물론 티가 날까 살짝 새침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 그럼 메텔 님은….”

“제 눈에는 베니고어 님밖에 보이지 않아요.”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한들….”

솔직히 연애감정은 아니다. 두근두근한다든가 설렌다든가 하는 것들이 아니라….

‘이것도 참 이상해.’

정확히 말하면 놀고 있다는 듯한 느낌이 더 강했다.

지혜 누나와 했던 것처럼 상황을 연출하고 자기한테 맞는 캐릭터를 입히고 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 같은 느낌.

나만 그런 생각을 했다면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겠지만… 눈앞에 있는 베니고어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 오히려 주도하는 쪽은 저쪽이었으니까.

‘서로 드라마 퀸이라서 그런 것도 있는데….’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는지, 혹여나 내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저는 볼일이 생각났네요. 사제님. 그, 그럼 이만!”

“…….”

“그리고….”

티가 날 정도로 쪽 소리를 내며 볼에 입을 맞춘 베니고어는 우당탕탕 도서관 밖으로 뛰어 도망쳤다.

“사제님 마음은 잘 알았어요.”

‘뭔가 기분이 편하지 않은데….’

베니고어의 갑작스러운 스킨쉽 때문이 아니라 정말로 찝찝하다.

‘드락타리스… 공략이….’

아니야. 갑자기 드락타리스로 넘어가지 마.

‘드락타리스로 물타기 하지 말라고.’

처음부터 떠올려 봐.

베니고어에 대한 것부터.

왜.

“왜. 베니고어는 나를 모르는 척했지?”

현대에 있는 베니고어는 어째서 나를 아는 척하지 않았을까. 기억이 사라진 것도 아닐 텐데 어째서….

인간 생에 있었던 일을 언급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베니고어를 보고 있자면 가끔 인간이었을 때의 삶이 아예 없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저 아텐타가 베니고어가 아닌가? 내가 잘못 짚은 건가?’

드문드문 떠오르는 것은 많다. 베니고어가 지금까지 내게 했던 말들이나 저 아텐타의 태도. 머릿속에서 교차 편집되듯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

메텔이 베니고어를 봤을 때의 반응이 어땠지?

‘방금… 저분은….’

‘뭔가 잠깐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방금 아텐타 님이 하신 말씀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게 아니라….’

여신의 손거울을 보기 전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지?

어째서 지하신전의 출입문에 베니고어의….

너무 뻔한 결론이다.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음에도 정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 마치 스스로 기억의 일부분을 삭제했던 때처럼….

‘내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거야.’

이건 나 자신이 막고 있는 거라고 판단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메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알타누스 성녀님은 잘 뵙고 오셨나요?”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