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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58화 (949/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58화

분위기 (9)

눈이 떠진 시각은 두 시 반 즈음.

무시하려면 애써 무시할 수 있었지만 오늘은 녀석을 달래주기로 한 날인 만큼 몸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보다 더 극심한 악몽을 꾼 모양인지 온갖 불안함이 김현성을 좀먹고 있는 상황.

굳이 망원경을 돌려보지는 않았지만 녀석의 텐트 안의 상황이 어떤지는 훤히 보인다.

보나 마나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일어났을 테고, 숨을 못 쉬게 된 것마냥 헐떡거리겠지.

침대 밑에 놓아둔 무구에 손을 뻗다가 이곳이 텐트 안이라는 걸 깨닫고는 조용히 한숨 쉬면서 찬물만 벌컥벌컥할 거야.

아마 그래도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잠을 잘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아마 세수를 한 다음 바깥의 상황을 확인하러 나가지 않을까.

조용히 가마를 확인한 이후에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그러다 괜스레 우울한 마음이 들어 캠프 주변을 한 바퀴 돌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슬슬 나가봐야겠는데.’

움직일 준비를 해야 하는데 몸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다른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옆 자리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정하얀이 문제. 심지어 다리를 쫙 펴고 주무시고 계시다.

사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정하얀이 침대로 기어들어 왔던 게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주목해야 할 사람은 정하얀이 아니다.

‘한소라 얘는 왜 여기에 있어?’

정하얀의 옆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심지어 얘는 깨어 있는 것 같다.

비슷한 타이밍에 일어난 건지 한참 전부터 일어나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랑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것 같았다.

낑낑대며 정하얀의 몸을 한쪽으로 치우려고 해보지만….

‘얘 왜 이렇게 힘이 세.’

잘 밀려나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는다. 한소라와 잠깐 동안 눈이 마주친 것은 바로 그때. 그녀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저 좀 도와주세요. 소라 씨. 아니, 그보다 소라 씨는 여기 왜 왔어요?”

“정하얀 님이 같이 가자고 하셔서….”

정하얀의 옆자리에서 낑낑대며 정하얀을 잡아당긴 한소라 덕분에 탈출에 성공한 이후 몸을 일으킨다.

자연스럽게 정하얀의 손아귀를 탈출했지만 반대쪽으로 몸을 옮긴 그녀 덕분에 한소라가 꽁꽁 묶인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저, 저도 도와주세요. 부길드마스터.”

“…….”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저… 저 30분 전부터 일어나 있었어요. 정하얀 님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어서….”

“…….”

“부길드마스터.”

하얀이 지금 깨면 곤란하자너. 분명히 따라오려고 할 텐데.

“…….”

“부길드마스터?”

‘미안.’

“부… 길드….”

“…….”

“저 나쁜 새끼….”

“…….”

“씨….”

등 뒤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소라가 정하얀의 근력 수치를 이겨낼 수 있을 리 만무.

오른쪽 자리에 있던 게 사라졌다는 걸 본능적으로 눈치챘을 테니 왼쪽 자리에 있는 한소라에게 달라붙고 있을 것이다.

한소라에게는 잠깐 괴로운 시간이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한소라의 개인 사정보다는 김현성의 멘탈을 안정시키는 게 더 중요한 시점이었다.

대충 나갈 준비를 하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대륙을 위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

‘밤공기가 차네.’

모두가 숙면에 빠져 있는 새벽 3시 28분.

모닥불 앞에 앉아 혼자 청승을 떨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친다.

본래 기척에 굉장히 예민했던 녀석이었지만 깊은 생각에 빠져 있는지 내가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아마 방금 전에 꾸었던 악몽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무슨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상이 가기야 한다.

행복한 대륙에 관한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모두가 하하 호호 웃으며 편안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대륙 말이다.

그 꿈이 악몽인 이유는 유대감으로 하나 된 형제가 그곳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꿈속의 김현성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여기저기를 미친 듯이 싸돌아다니다 결국에는 희생과 부활의 신의 신전에서 발걸음을 멈추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절규하며 비명을 지르다가 꿈에서 깨어났을지도 몰라.

아니면 형제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지르는 꿈일 수도 있을 거야.

장소가 장소인 만큼 이곳 가장 지하에 처박혀, 철의 처녀에 갇힌 채로 도와달라고 미친 듯이 소리 지르는 것을 들었을지도 모르지.

당연하지만 꿈속의 김현성은 이기영에게 닿을 수 없다. 아무리 뛰어다녀도, 무슨 방법을 사용해도 녀석은 결코 빛의 성자를 구할 수 없다.

결국 비명 소리는 천천히 멎으면서 마무리되고….

‘기출 변형도 있자너.’

김현성이 이기영을 말렸을 경우다.

희생과 부활의 신이, 빛의 성자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다가 대륙이 멸망했을 경우.

김현성과 이기영을 비롯한 파란 길드원들은 살아남았지만 대륙이 던전에 잡아 먹혔을 경우.

빛의 성자가 자신을 말린 김현성과 파란 길드원들을 원망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지독한 죄책감과 무력감에 휩싸인 빛의 성자가 결국 모두의 앞에서 스스로 목을 매달며 마무리.

‘연극 한 편 나오기는 했어.’

더 심할 수도 있고, 조금 덜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이런 부류의 꿈이었을 거다.

한밤중에 잠에서 깨 다시 잠들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악몽, 가끔 김현성을 지독히도 괴롭히는 악몽 말이다.

다시 한번 기척을 내자 서둘러 검을 집어 드는 놈의 모습이 보인다.

내 모습을 확인한 이후에는 표정이 풀어지기는 했지만 솔직히 조금 쫄 수밖에 없었다.

“기영 씨?”

“…….”

“죄, 죄송합니다. 이건….”

“아니요. 괜찮습니다. 제가 너무 소리 없이 접근했나 보네요. 깜짝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아니야. 나도 이걸로 트집 잡으려고 온 게 아니야.’

이 새끼가 평소에 나를 어떻게 생각했길래….

이기영이 다소 마이페이스인 건 사실이기는 했지만 나를 못 알아봤다고 지랄발광을 할 정도로 싸이코는 아니다.

위로하러 온 이 순간에도 눈치를 보고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조금 짠해지기도 했다. 그래도 대륙을 구한 영웅이 아니었던가.

오늘 조금 구박을 심하게 하기는 했지만 기가 죽어도 너무 죽은 듯한 느낌.

이제는 직함도 없고 권력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진 모습을 보자 더욱더 녀석이 측은해 보이기 시작했다.

어깨도 왠지 축 내려간 것 같고… 심지어 아직도 눈치 보고 있는 것 같고….

‘왜 이렇게 불쌍해 보이지.’

가방 축제 열겠다고 염병할 때가 진짜 행복해 보이기는 했어.

“잠이 오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기영 씨도….”

“네… 오늘 있었던 일이 계속 생각나는 바람에… 제가 조금 심했던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일단 조금 미안한 기색부터 비치는 것이 맞다. 사실 별로 미안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자신을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질 테니까.

“아니, 아닙니다. 기영 씨 말대로 저는 감정적인 상태였습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으니… 기영 씨가 옳은 판단을 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계속해서 원정을 진행했다면 아마 사고가 터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제대로 판단하신 겁니다.”

“아닙니다. 현성 씨… 사실… 사실 어제 오후에 있었던 일은 저도 조금 감정적으로 반응한 것 같아서….”

“네? 그게 무슨….”

“솔직히 말씀드리기 조금 부끄럽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네?”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고 말씀하신 부분에서 조금 화가… 났었습니다.”

잠깐 동안 모닥불이 타는 소리가 들려왔다.

“…….”

“…….”

지금까지 있었던 이 모든 일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었자너.

물론 김현성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을 것이다. 이기영이 희생할 필요가 없었던 일이라고 말한 것이겠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에서는 다르다.

‘그래. 이기영은 화가 났었던 거야.’

어떻게 빛의 성자라고 해서 그 모든 일들을 기억하고 싶었겠는가.

괴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고통스럽고 기억하기 싫은 순간들도 많았다. 영혼에 상처를 입고 평생 달고 다닐 후유증을 얻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한계까지 내몰리는 기억들이었지만 그 기억들이… 그 기억들이 지금의 김현성과 이기영을 있게 하지 않았던가.

그 힘든 기억들은… 처음에 타인으로 만났던 우리들을, 친우로… 유대감으로 이어진 형제로 만들어준 과정이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어제의 이기영이 신경질을 냈던 이유가 그것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치 모든 게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이었던 거야.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이 없었던 일들로 되어버리는 것 같았던 거지.’

이기영은 구태여 말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았다. 섭섭했다고 부정당한 느낌이었다고.

김현성과 이기영이 함께 헤쳐나갔던 서사들이 필요 없었던 일이라고 치부한 것 때문에 화가 났다고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김현성이 눈치가 없는 건 사실이었지만 멍청하지는 않았으니까.

화가 났었다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김현성의 얼굴이 천천히 펴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진짜 다루기 쉽자너.’

“그, 그렇습니까?”

“네.”

“저… 저는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네. 하지만 제게는 아픈 기억들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도 모두 소중한 기억들입니다. 파란 길드원들과, 하얀이와, 덕구와, 현성 씨와 함께 이겨나간 일들이니 말입니다. 저도 현성 씨에게 그런 의도가 없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로 작은 오해가 있었던 셈이로군요.”

“네. 그렇네요.”

“커피 한잔 드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괜스레 모닥불을 뒤적거린다. 내가 다른 건 못해도 모닥불 뒤적거리는 건 잘하거든.

김현성은 철제 머그컵을 꺼내 모닥불 위에 올린 이후 다시금 자리에 앉는다.

악몽을 잊게 해줄 정도는 아니겠지만 기분이 조금 풀어진 모양.

자신에게 다소 섭섭하게 대했던 이유에 숨겨져 있었던 작은 비밀은, 평생을 외톨이로 살아왔던 사회 부적응자에게 힘이 되기에 충분했다.

물론 김현성이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래. 그 사건들 때문에 우리가 여기까지 성장한 거고, 이렇게 같이 있어서 커피 한잔할 수 있는 거야.’

앞으로는 필요하지 않았던 일 취급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런 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이 있는 거라고 자위라도 할 수 있겠지 뭐.

물론 이렇게 쉽게 긍정적인 효과가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여전히 김현성에게 이전의 있었던 일은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며 잊고 싶은 기억들이었으니까.

단지 녀석이 느낄 불쾌감을 조금 완화시켜 주는 것 정도가 되지 않을까.

“현성 씨 피곤하지 않겠어요?”

“저는 괜찮습니다. 1회 차 때는 일주일 동안 잠들지 못했던 적도 있었으니까요. 무엇보다 부담스러운 짐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원정길이 한층 더 편해질 것 같으니.”

‘너 지금 비꼬는 거 아니지?’

“비꼬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저….”

“저도 농담한 거예요.”

잠깐 웃어준 다음에는 본론이다.

“그런데… 현성 씨는 이 시간까지 안 주무시고….”

안 자고 뭐 했어? 이기영은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던 건데… 너는 왜 여기에 나와서 청승떨고 있었어?

악몽 때문이다.

하지만 김현성은 입을 열지 않았다.

어째서 녀석이 입을 다물고 있는지는 이해가 간다. 악몽 때문에 잠에서 깼어요. 라고 말하기도 쪽팔릴 테고 괜한 걱정시키기도 싫겠지.

또 진실을 밝히면 꿈 내용까지 입에 담아야 하는 만큼 본인이 나서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저는….”

“네.”

녀석은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기영 씨가 보기에 저는 이기적인 사람입니까?”

‘글쎄….’

“기영 씨가 했던 말씀이 신경 쓰이더군요.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대륙을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는 말씀 말입니다.”

‘…….’

“저는 그렇지 않습니다.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습니다.”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이 김현성의 어린 감수성을 건드린 것일까.

‘이 새끼 사춘기 또 왔어?’

갑작스레 시작된 자아비판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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