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57화
분위기 (8)
“어째서… 제길! 내가 왜….”
‘나를 데려온 건지 모르겠다고?’
“제길… 이럴 줄 알고 있었는데… 제기랄!”
‘아니야. 이번에는 진짜 이럴 줄 몰랐어.’
지나치게 흥분해 있는 모습은 괜스레 눈치를 보게 만든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되돌리고 싶은 심정일 터.
중얼거리는 모든 목소리가 알아듣기 힘들기는 했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명백했다.
‘이 새끼 왜 데리고 온 건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뭔가 사고가 날 것 같았다. 괜찮다고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믿는 게 아니었고 뭔가 낌새가 이상했다. 이것 봐라. 결국에는 다시 위험해지지 않았냐.’
이 정도라고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이 새끼 참 영악해졌어.’
당연하지만 이쪽을 향해 소리치지는 않는다. 어차피 말싸움해서 건질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수차례나 경험한 상태였고….
함부로 윽박지르면 시바, 이기영이 토라져 버린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괜스레 땅바닥을 발로 차거나 이미 움직임이 멈춘 전령 겔크에게 화풀이하는 것이 전부, 물론 저 행동은 나 보라고 행동하는 것이 맞다.
자신의 말이 맞았다고, 이렇게 될 줄 알았다고 시위하는 행동처럼 느껴진다.
‘아니, 그럴 여유도 없나.’
이 새끼도 나름대로 절박한 것이다.
“후우… 후우….”
‘원정대원들이 다 네 눈치 보잖아… 아이템 뭐 떨어뜨렸는지 확인해야지.’
“제길….”
말 그대로 발작 버튼을 누른 것이나 다름이 없다.
대륙의 모든 고통을 떠안고 스스로 희생한 빛의 성자가 다시 부활한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당연히 당시에 겪었던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김현성의 몸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행복한 미래를 바라보고 있던 시점에 갑자기 터진 납치사건이 불을 지폈을 것이고, 대륙을 위한 희생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실제로 듣는 순간 버튼이 눌린 것이다.
희생이라는 단어는 누군가에게는 좋게 비칠지도 모르지만 김현성에게 공포스러울 만큼 무서운 단어다.
희생을 요구당하는 것을 질릴 정도로 두려워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슷한 단어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킨다.
녀석에게 대륙은 언제나 희생을 요구하는 장소였다. 자신이든 타인이든, 이기영이든 김현성이든 대륙은 언제나 희생을 요구했다.
하하 호호 웃고 떠드는 일만 남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 질리지도 않고 찾아온 희생타임.
방심하고 있을 때마다 불현듯 찾아온 그 녀석.
결국 이번에도 모습을 드러내고야 마는 그 단어.
‘시바. 근데 이번에는 진짜 몰랐어.’
그 단어와 접촉한 김현성의 모습은 불안발작을 일으키는 정신병 환자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새끼 가끔 악몽도 꾸자너.’
가끔 김현성이 악몽을 꿔 발작하듯 일어나는 걸 느낄 때가 많았으니까. 이미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부관들을 모아놓은 이후 개소리를 지껄이는 중이다.
“다시 올라가야겠습니다.”
“…….”
“원정은 취소입니다.”
‘취소는 개뿔.’
“이 이상 기영 씨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습니다. 이 던전은 뭔가 이상합니다. 평범한 던전이 아닙니다. 조금 더 준비가 필요합니다.”
당연히 나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원정이 취소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원정은 계속해서 진행될 거예요.”
“방금 들으시지 않으셨습니까. 저 몬스터가 하는 말을 전부 들었잖습니까.”
‘응 들었어. 근데 그건 아무 관계 없어.’
“현성 씨 말대로 이 던전은 무언가 이상해요. 교황청의 지하에 이 정도 규모의 신전, 조각상, 그리고 두더지 성녀… 교황청이, 아니, 지나간 시간 동안 교단이 놓치고 있는 신화가 있을 겁니다. 이 장소는 진실을 밝힐 수 있게 해주는 장소예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우리가 어떤 실수들을 해왔던 건지, 템플러들이 어째서 교황청에 등을 돌린 것인지… 대륙이 모르는 역사가, 교국이 감춰야만 했던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겁니다.”
“그건… 그건 기영 씨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기영 씨는….”
“저는 교단의 명예추기경이며 베니고어 님의 신도입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은 저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어요. 그분께서 저를 이곳으로 인도하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놈들이 원하는 건!”
“…….”
다시 한번 흥분하려다 눈빛을 쏴주자 잠잠해지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그래. 여기 성기사랑 사제들도 있는데 욕하면 안 되지.’
그들을 전부 물린 다음에 입을 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예언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
“평생 지하에 처박혀 살게 된 두더지 성녀의 이야기 말입니다. 일생을 대륙을 위해 착취당한 두더지 성녀가 누군가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위에 있는 놈들은 인간들 개인의 고통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대륙이 잘 돌아가게 만드는 것뿐이며 그걸 위해서라면 누구든지 희생시킬 수 있는 놈들입니다.”
“…….”
“이 장소에 갑자기 던전이 생겨난 것도 이상합니다. 이건 덫입니다. 모든 게 기영 씨를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처럼 보입니다. 이 모든 게 말이에요.”
‘아니. 그건 아닐걸.’
“틀림없이 이 시스템에 문제가 생긴 겁니다. 그 문제를 감당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기영 씨일 거예요. 두더지 성녀의 다음으로 위에 있는 놈들이 기영 씨를 내정한 게 분명하단 말입니다.”
‘이 새끼 피해망상이 너무 심해. 무슨 편집증이라도 걸린 것 같아. 그 위에 있는 새끼 중 하나가 나인지도 모르고.’
어느 부분 맞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정말로 대륙에 위기가 찾아온다면, 인간 하나를 갈아 넣어 안정화를 추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게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정말로 위에 있는 신 중 하나가 개인을 희생시켰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신성이 부족하다면 충분히 그런 조건들을 내걸 만도 하다.
대륙을 안정화시킬 수 있을 정도의 신성력을 가진 성녀를 내리는 것.
당연히 위에서는 어마어마한 손실을 감내할 수밖에 없을 수밖에 없는 사업이다.
초기투자비용을 깎아내릴 수 있는 방법은 페널티를 내리는 것 정도, 두더지 성녀 같은 경우에는 빛을 쬘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게 페널티라는 거지.
‘근데 그건 아닐 거야.’
녀석들은 악마가 아니다. 도덕적인 관점이 인간과 다르기는 하지만….
‘그 정도로 쓰레기들은 없을 거야. 제 자식들은 누구보다도 아끼는 놈들이니까.’
두더지 성녀의 경우에는 뒷이야기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악마가 개입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템플러 측에서 예언을 날조한 것일지도 모르지.
“애초에 제정신이 아닌 몬스터였어요. 너무 불안해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단언하건대 현성 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예요.”
“대상이 저였다면 이렇게 불안해하지 않았을 겁니다. 기영 씨. 지금까지 기영 씨가 겪은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정말로 이게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고 단언하실 수 있습니까? 무언가 이상하단 말입니다… 제길….”
목소리가 커질 듯 커질 듯 커지지 않는다.
‘차라리 화를 냈으면 다루기 쉬웠을 텐데….’
입 꾹 닫아버리면 되니까.
근데 이 새끼가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다.
“괜찮을 겁니다.”
“괜찮지 않습니다. 항상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괜찮을 거라고 이제 전부 괜찮다고… 근데 결과를 보세요.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제가 일일이 다 설명해야겠습니까?”
‘화 좀 내봐. 현성아. 소리 좀 질러봐.’
“필요한 일이었어요.”
“결코 필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시바. 네가 이런 식으로 얌전하게 나오면 내가 다시 발작 버튼을 누르는 수밖에 없어요.’
“현성 씨가 어떻게 생각하시든 간에 저는 그 모든 일이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숨 한 번 멈추고….
“이번에도… 이번에도 만약에… 필요하다면….”
“…….”
“만약… 제가 필요한 상황이 온다면….”
“제기랄!!”
걸려들었죠?
“제기랄! 도대체 뭐가 문제야!”
역정 내죠? 흥분했죠?
“도대체 뭐가 문제길래 매번 이런 식이야! 도대체… 어째서! 매번!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겁니까! 제기랄! 대체!!”
버튼이 눌려 발악하듯 커다란 목소리를 내뱉는 녀석, 아마 여러 가지로 답답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발언에 이성이 날아가 버린 것 같이 느껴졌다.
커다란 목소리로 화를 내며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지만 본인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지 못할 리가 없다.
나를 노려보는 눈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이미 언성이 높아진 목소리는 줄어든다.
“너무 흥분하신 것 같으니 이야기는 다음에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저는 단지… 단지….”
“이곳이 제일 안전한 곳이라고 제가 말씀드렸었죠. 만약 위로 올라간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겁니다. 만약 정말로 이 던전이 만들어진 목적이 희생양 찾기에 있다면 그들은 언젠가 바깥으로 올라올 거예요.”
전령 겔크도 바깥으로 나오려고 했잖아.
“언제까지 던전의 입구를 틀어막을 수 없습니다. 던전의 이상 현상은 이미 대륙 곳곳에서 심화되고 있는 중이고, 공략하지 않는다면… 생각하기 싫은 일이 벌어질 거예요. 현성 씨 말대로 이곳은 평범한 던전이 아니니까요.”
“…….”
“공략이 최우선입니다.”
“…….”
“그게 이번 원정의 목적이에요. 많은 이들이 그것을 위해 모인 겁니다. 대륙을 지키고자, 자기 자신을 희생하고자 하는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에요. 모인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물론 게임 한판 뛰려고 참전한 새끼도 있어.
근데 대부분의 지원자들이 다들 숭고한 뜻을 품고 있을 거라구.
“많은 일을 겪은 대륙의 상처를 다시 들쑤시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모두가 자신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지키고 싶어 모인 이들이에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를 보호하는 게 목적이 아니에요. 원정대가 만들어진 이유는 어디까지나 던전의 공략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들이 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뒷정리를 하고 있는 이들이 보인다. 전투태세를 아직 풀지 않은 채로, 부상자를 수습하거나 방어구들을 정비하는 이들 말이다.
전령 겔크에게서 나온 전리품을 확인하는 이들도 있다. 저거 빨리 확인하고 싶은데 김현성 이 새끼 때문에 하지도 못하겠네.
동시에 샘플을 채취하는 연금술사나 마법사들도 보이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하는 우리 자랑스러운 원정대원들.
딱 좋은 타이밍에 기분 좋은 땀을 흘려주는 우리 원정대원들 아주아주 칭찬해. 더 열심히 일해. 더 열심히 땀 흘려.
“현성 씨가 이 원정대를 이끌 수 있을지… 잘못된 판단으로 다른 이들을 상처입히지는 않을지… 솔직히 걱정이 앞서요.”
“저는….”
바로 결정타.
“조금 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머리를 식히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널 감정적으로 만들어서 미안하기는 한데… 내가 네 발작 버튼을 건드려서 미안하기는 한데… 너 지금 너무 감정적인 것 같아. 공격대장을 계속해서 역임하기에는 조금 상황이 안 좋은 것 같은데….
“공격대에서 빠지라는 게 아니라… 잠깐 자리에 내려오시는 게….”
‘일시적인 좌천이야. 내 맘 이해하지? 정신 차리면 다시 복직시켜 줄게.’
물론 내가 독단적인 결정을 내릴 만한 위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말이다.
김현성은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가 한 말들은 전부 정론이었고 녀석 역시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인지하고 있다.
김현성은 지금 감정적인 상태다.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다.
지나치게 흥분해 있고, 던전 공략에 대한 생각 따위는 머릿속에 지워진 지 오래다.
“네… 네….”
지나치게 풀이 죽은 모습이지만 괜찮아.
이따 새벽에 조금 풀어주지 뭐.
아마 김현성은 오늘 잠들지 못할 것이다.
‘이 새끼… 김현성 이 새끼… 오늘 악몽 각이자너.’
무조건 악몽 한번 갈기고 비명 지르면서 잠에서 깰 거야.
‘장담하는데 무조건 악몽 각이라구.’
“…….”
“…….”
최소한의 불침번들을 세워놓은 이후, 모두가 숙면에 빠져 있는 새벽 3시 28분.
아니나 다를까….
모닥불 앞에 앉아 혼자 청승을 떨고 있는 김현성의 모습이 시야에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