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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 사용설명서-956화 (947/1,590)

회귀자 사용설명서 956화

분위기 (7)

아마도 한참 과거에 벌어진 일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베니고어 교단이 뿌리내리기 전에 있었던 역사.

심지어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두더지 성녀가 베니고어가 아니라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도 있지만, 정황상 두더지 성녀의 서사는 베니고어의 서사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아니라면 그녀가 이곳을 던전화 시키지 않았을 테니까.

심지어 정문 안에 조각되어 있는 베니고어 모습이 가장 큰 증거가 아니었던가.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지하에 처박혀 대륙의 위기를 막아낸 성녀의 이야기라면….

‘소재 한번 괜찮자너.’

충분히 다른 이야깃거리들을 밀어낼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 선다.

조금 의아했던 것은 베니고어의 이야기가 편집되어 있었다는 것.

실제로 대륙인들은 이곳에서 벌어졌었던 일들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교단에 관련되어 있는 인물의 회고록이나 베니고어에 관련된 종교서적을 찾아봐도 그녀가 평생을 지하에 처박혀서 살았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녀는 대륙의 빛을 가져다준 여신으로 기억되고 있었고, 그녀가 인간이었을 때의 생에는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많은 시간이 흐르며 이야기가 바뀌고, 각색되면서… 그러니까 그녀의 신화가 만들어지는 과정 속에서 사라졌다고 하기에는 의아한 점이 많다.

‘의도적으로 숨긴 거라고 봐도 되는 건가.’

내가 종교관계자였어도 숨겼을 거야.

대륙의 안정을 위해, 멀쩡한 사람 하나를 지하에 처박아 놓고, 대륙의 위기를 수습했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더럽게 느껴질 테니까.

그저 베니고어라는 성녀가 대륙을 구원했다. 라고 포장만 했을 거고… 결국 그렇게 자리가 잡힌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그렇다면 베니고어는 이 이야기를 숨기고 싶어 했을까. 아니면 드러내고 싶어 했을까.

처음에는 자신의 비참했던 삶을 숨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의 던전화 시기가 앞당겨졌을 테니까.

이미 베니고어 교단은 충분히 자리 잡고 있는 상태였으니 굳이 모험을 할 필요도 없다.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을 수도 있고, 부정하고 싶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아예 대륙에 기대를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던전화가 되고, 두더지 성녀의 포근한 안식처가 대륙에 대두되고, 그곳이 공략돼 진실이 드러나게 되더라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얘는 시바 여기서 이 모든 걸 겪었을 테니까.

베니고어가 내린 물음표가 대략적으로 이해될 것 같다.

‘이거 시바 나보고 좀 해달라는 거 아니야. 철의 처녀에 갇혀 있는 시신도 수습해 주고, 실제로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알리라고 하는 거 아니냐구.’

베니고어의 피는 아직도 철의 처녀에서 흘러내리고 있다. 당연히 그녀의 시신도 거기에 방치되어 있겠지.

더불어 전령 겔크도 아직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

만약 이 던전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두더지 성녀의 이야기는 평생 지하에 처박혀 있었을 것이다.

[추… 추기경… 추기경….]

근데… 이거 시바 먹히려나. 세월이 너무 많이 흘렀는데. 그때는 제국도 아니었을 거 아니야. 그냥 평범한 왕국 정도였을 수도 있지 않나.

[추우… 기경…? 너어… 는….]

그때도 추기경이라는 게 있었나. 직책이 조금 달랐을 수도 있잖아.

시바. 생각해 보니까. 얘네 이거 처음에는 베니고어 교단도 아니었을 거 아니야. 교단 이름은 도대체 뭐야? 너무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괜히 나섰나. 전령 겔크는 명을 받들어라 했는데 쟤가 내 명을 안 받들면 모양새가 조금 이상해지지 않나. 심지어 사람들이 다 쳐다보고 있는데. 내가 뭐가 되겠어.

시바 이거 안 되겠다.

애매할 때는 일단 빛이다. 뭐가 됐든 일단 날개부터 뽑고 빛을 뿜어내는 것이 옳다.

조용히 바깥으로 빠져나온 이후에는 찬란한 빛의 날개를 펼치기 시작, 커다란 신성이 주변에 가득 자리 잡기 시작한다.

은은한 빛, 누가 보더라도 질이 다른 빛,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그 빛’.

주변에선 저도 모르게 탄성 소리를 내뱉는다. 가마꾼들 성기사들 할 것 없이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비친다.

[아아… 아아아아!]

몬스터도 뻑이 갔자너.

“전령 겔크 그대의 임무를 완수하라.”

목소리에도 힘을 실어준다. 강한 어조로 말한다기보다는 부드럽게 타이르는 듯한 어조.

겔크…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망령처럼 떠돌아다녔던 겔크의 지난날. 이 빛의 성자는 모두 이해해요. 다 괜찮으니까. 털어내. 네 안에 있는 걸 전부 쏟아내는 거야.

[아아아아아아아…. 흐어아아아!!]

그래. 그래. 옳지.

어디가 눈인지 모르겠다.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하지만 몸 곳곳에서 박혀 있는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바들바들 떨던 전령 겔크는 이내 행동을 멈추고 입을 열기 시작했다.

[두더지… 두더지이… 성녀가 스스로… 철의 처녀에… 들어가아… 목숨을 끊었나이다아….]

“…….”

[오랫동안 대륙을 지탱해온 성녀가… 스스로 삶을 거부했나이다… 괴로움에 떨던 성녀가….]

‘아 이 새끼. 말 왜 이렇게 못해?’

[찬란하고 영광스러웠던 대륙의… 위기가… 이제는….]

‘아오, 한 대 후려치고 싶네. 진짜.’

[지하… 신전에서는… 이에… 새로운 대응책을… 교단에 알려… 이대로 대륙이 무너지게 내버려 둘 수는 없사옵니다….]

‘…….’

[성녀가 태어날 것이다… 아… 성녀가… 예언대로 성녀가 태어날 것이다아… 이 성녀는 대륙을 사랑하고오… 대륙을 품으며… 대륙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아… 나의 아들딸들이여… 나의 소중한 자손들이여… 이 성녀가 하늘을 볼 수 없게 하라… 이 성녀가 빛을 바라볼 수 없게 하라… 성녀가 빛을 바라본다면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아… 가진 신성력과 기적을 모두 잃어… 버릴 것이다.]

‘뭐야. 그건 예언이야?’

[새로운 예언이… 필요하옵니다. 새로운 신탁이… 대륙을 지탱할 새로운 빛이… 새로운 빛이 필요하옵니다아….]

‘뭐야 시바 이거 분위기 이상한데.’

살짝 빛의 밝기를 낮춰보자. 날개도 두 장 정도는 접는 게 좋을 것 같다.

[대륙이… 찬란하고 영광스러운… 대륙… 대륙이여… 대륙이여어!]

‘뭐야… 저 새끼 이상해.’

[성자가!! 성자가아!! 나타날 것이다!!]

시발 깜짝이야.

[성자가!! 나타날 것이다!!!!]

‘시발!’

[성자가 나타날 것이다!! 예언대로!!! 성자가 나타날 것이다아!! 이 성자는 대륙을 사랑하고오… 대륙을 품으며!! 대륙을 위해 살아갈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라아!! 나의 아들딸들이여… 나의 소중한 자손들이여어!!! 이 성자가 하늘을 볼 수 없게 하라! 이 성자가 빛을 바라볼 수 없게 하라… 성자가 빛을 바라본다면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아… 가진 신성력과 기적을 모두 잃어… 버릴 것이다!!! 성자가!! 성자가 나타날 것이다아!!!]

“으아아아악! 씨발 현성아!”

[성자아아아!!!!!]

“…….”

순간적으로 컨셉을 까먹을 정도로 그로테스크한 장면, 놈의 몸 안에 박혀 있는 입들이 일순간 벌어져 괴성을 지르며 저 말을 반복한다.

[성자가아!! 나타나리라!!! 성자!!! 성자가!!! 왔다!!!!]

수백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성자가 나타났다는 개소리를 지껄인다.

‘시바. 누가 들은 건 아니겠지?’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사람은 없다. 저 괴물의 태세전환에 모든 신경이 쏠린 것 같았으니까.

들은 사람이 있더라도 아마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한 사람은 확실하게 들은 모양이다.

무작정 이쪽으로 달려드는 괴물 새끼의 몸통에서 팔이 순식간에 날아간다.

멍하니 구경할 시간은 없다.

녀석의 폭주에 대한 코멘트를 해야 했으니까.

“완전히… 완전히 타락해 버렸군요….”

나랑 말 안 통하면… 아무튼 타락한 거야.

“…….”

“그에게 안식을….”

문제는 안식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

김현성에 의해 날아간 팔이 분열한다. 녀석이 처먹은 것들을 뱉어내듯, 그 자리에서 백색의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온다.

[성자가아!!!]

‘좀 꺼져!’

[성자가 오리라! 성자가 오리라!!!]

천장이나 벽에 달라붙어 기어들어 오는 녀석들의 모습은 질릴 정도로 징그럽다.

[성자가가가가!!!]

무작정 팔을 뻗으려고 하고 자신의 몸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이쪽에 달라붙으려고 한다.

목표가 무엇인지는 뻔할 뻔 자.

당연하지만 본대는 당황하지 않는다. 숫자가 많고 적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 봐야 녀석은 초입에 나타나는 수문장 같은 몬스터 였으니까.

분열한 녀석들에게 순식간에 원정대원들이 달라붙고, 형형색색의 마법들이 흩뿌려진다.

그 와중에 김현성은 날개를 달고 움직이는 놈들을 도륙 내는 중, 숫자는 한 사람이 감당하기 많은 것 같았지만 김현성에게는 무의미하다.

날개 한 쌍을 꺼내 공중에서 한 바퀴 돌자 놈들이었던 것들이 바닥에 떨어져 내린다.

떨어진 고깃덩어리들이 신체의 일부를 내뻗으며 전진하려 하고 있지만 그래 봐야 고깃덩어리일 뿐이다.

‘분열.’

그리고 다시 합칠 수도 있네.

전진할 수 없는 살덩이들은 다시금 겔크에게 몸을 의탁한다.

[성자가!!!! 대륙은… 대륙은 다시 한번 구원받을 것이다!!! 영원토록 찬란하고 위대하게… 그렇게 남게 될 것이다아!!]

‘이건 쉽네.’

슬쩍 한소라를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주문을 외우는 그녀가 눈에 보였다.

독 속성의 마법을 살덩어리들에 쏘아 보내는 것으로 준비는 끝.

자체 정화를 할 수 있는지 보라색 표면이 점차 완화되는 것 같았지만 영향이 없을 리가 없다.

몸은 둔해지고, 융합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살덩이가 뚝뚝 떨어져 내린다.

[대륙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성자르으으을!!!]

녀석은 형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공격대의 공격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시험하는 것 같은 무대.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육중한 몸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지 최대한 내게 손을 뻗으려고 하지만,

치이이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팔이 녹아내린다.

‘하얀이.’

옆에서 조용히 주문을 외우고 있는 정하얀이 보였다.

‘이 새끼는 아이템 뭐 떨구려나.’

기능적인 것도 좋지만 기왕이면 던전에 대한 아이템들이 떨어졌으면 좋겠다.

전령 겔크의 일지, 아니면 편지나, 문서처럼 공략을 도와줄 수 있는 것들. 비싼 게 나오면 당연히 좋은 거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도 사냥은 진행되고 있지만 딱히 보거나 코멘트할 부분은 없다.

각자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해 주고 있어 고개가 다 끄덕여질 정도, 물론 그 와중에도 눈에 띄는 부분은 있다.

‘이 새끼들 진짜 징그럽네.’

생긴 것도 징그러운데 하는 짓은 더 징그러워.

새까맣게 탄 살덩이와 난도질당한 살덩이들이 계속해서 이쪽으로 몸을 옮기려고 하고 있다.

어떻게든 성자를 손에 넣겠다는 듯이… 하나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것처럼 손과 발을 뻗고 목소리를 높이며 외치고 있다.

[성자아아아아아!!!! 성자아아아!!!!]

‘으… 시바.’

[게헤으윽! 성자아아아아아아아!!]

동요하고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니다. 전선에 나가 있는 병력들 모두가 질린다는 얼굴로 놈을 바라보고 있다.

놈은 다치는 것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던전에는 많은 유형의 몬스터들이 있지만 이런 놈들은 대부분 꺼림칙하다.

[하하하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하!!! 성자가!!! 오리라!!! 성자가!!!! 나타나리라!!! 성자다!!!! 성자가!!!! 찾아왔다아아아!!!]

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한 사람도 표정을 풀지 않는다. 던전이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기괴하고,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시바… 나도 꺼림칙해.’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진짜야 얘들아. 진짜야 현성아…

“제길….”

“…….”

“제길! 제가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투를 끝낸 김현성의 모습은….

단언하건대.

발작 버튼이 눌린 모습이라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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