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53화
분위기 (4)
‘바쁘네. 바빠.’
원정에 참가하는 인원은 무려 1만 명. 사실상 대륙 최고 전력이 원정에 참여한다고 생각하는 게 옳다.
린델의 삼대길드, 현 공화국의 대장군들, 왕국연합과 연방의 이름난 모험가들, 교국의 기사들과 교황청의 사제들까지.
이만한 인원들을 한 카테고리에 묶어 놓기는 쉽지 않다. 집단이나 모험가들마다 특성이란 게 존재했으니까.
한 곳에서 훈련받은 군대였다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겠지만 동원된 집단과 개인의 성격은 제각각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격대를 구성하는 것 역시 일, 당연하지만 공격대를 구성하는 게 뭐가 그리 큰일이냐고 묻는 멍청한 놈들은 없다.
이미 각 길드나 집단은 이런 종류의 행정처리를 하는 기관이나 인선을 보유하고 있었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그 중요성이 더욱더 대두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현장을 떠난 지 조금 오래되기는 했지만 아마 무난하게 퀘스트를 완수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의 눈과 빛의 성자의 망원경의 사기성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물론 더욱더 사기적인 것은 이 몸의 천재적인 두뇌와 냉철한 사고. 품위 넘치는 행실과 지휘관으로서의 카리스마.
사소한 문제는 각 길드와 집단에서 차출된 행정지원 인사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는 것이었다.
정확히는 불안해 보인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다음입니다. 명예추기경님. 제4공격대의 인선입니다.”
“네. 거기 놓고 가세요. 그리고 호칭은 공격대 작전사령관으로 통일합니다.”
“네. 사령관님.”
젊은 인사들이 많아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눈빛에는 불안함이 서려 있다.
물론 이해야 한다. 명예추기경은 현장을 오랫동안 떠나 있었으니까. 사실 상징적인 이미지가 더 강한 것 역시 원인 중 하나였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레 대륙의 성자가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공격대 구성을 3시간 안에 바꾸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내가 미친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야 여기 있는 놈들 전원이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천재들이 아니었던가.
어느 시점에서부터 대륙에서 전술 분석가, 전투행정관 같은 부류가 뜨기 시작해 각 길드에서 전폭적인 지원 아래 커온 애송이들. 공략 작전사령부를 구성하자마자 각 집단에서 보내온 엘리트들.
‘근데 그거 알아. 얘들아?’
컨트롤타워 붐을 만든 게 바로 나야. 소위 높으신 분들이 너희들한테 투자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게 바로 나 때문이라고.
이기영이라는 인간이 등장하기 전까지 대륙의 작전체계는 유인원 수준이었다구.
너희들 사장님들이 왜 너희들을 나한테 보낸 것 같아. 경험치 먹이려고, 좀 보고 배우라고, 보낸 걸 거야. 그렇게 계속 숨어서 뒷담이나 하면 배우는 게 있겠어?
“여전히 공격대 구성을 바꾸신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제4공격대를 작업 중이신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변경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한데… 공격대가 혼란스러워할 게 분명해. 현장에 대해 자세히 설명드린 게 맞나?”
“네. 자세하게 설명드렸습니다. 심지어 지금 던전 안에 진입해 있는 제1공격대의 원정 역시 잠정 중단하라고 하셨습니다. 제1공격대 역시 개편하실 것 같습니다.”
“어쩌자고 이러시는 건지… 길드마스터는 도대체 왜….”
“작전사령부의 개편부터 시작해 모든 게 이해되지 않아요. 도대체 어째서 시스템에 끼어드신 걸까요.”
‘너희들이 멍청해서 내 뜻을 이해 못 하는 거야. 그리고 다 들려, 애들아.’
“듣기로는 명예추기경님께서 던전에 들어간다고 선언한 이후에 쓸데없는 보급품들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사실상 사치품들이죠.”
“거울연어를 비롯한 각종 고급 음식… 부식으로는 무지개솜사탕… 하. 심지어 무지개 솜사탕의 직원이 원정대원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급 글램핑키트에 템프 매트리스… 각종 예복… 던전은… 전쟁은 장난이 아닌데….”
“구색 맞추기 같습니다. 어쩌면 교황청과 교국의 압력이 있었을 수도 있었겠죠. 명예추기경님께서 사령관으로 던전을 공략하다니… 그림이 되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방향으로 선전할 수도 있고… 제가 그들이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문제는 이 던전이 규격 외의 던전이라는 거겠죠. 아마 평범한 던전이라고 생각한다면 낭패를 보는 건 우리가 될 겁니다.”
그래. 그거 말 된다. 야.
“시간 안에 맞출 수 있을까요? 출정이 얼마 안 남았는데… 공성부대를 따로 투입한 건 어떤 의미인지… 너무 변화가 커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따르면 될 것 같아요.”
“네?”
그래도 생각이 박여 있는 놈이 몇몇 있었던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이전에 함께 움직인 적이 있었던 사람으로 보인다.
이름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몇 번 마주친 적이 있는 얼굴. 무슨 전쟁인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부관으로 한 번 써 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얼굴의 반을 가린 것 같은 거대한 안경에 단발머리, 나긋나긋한 말투를 들으니 왠지 모르게 기억이 날 것만 같다.
“저분은 명예추기경님 이전의 파란 부길드마스터라는 걸 명심하세요.”
“그건 알고 있지만….”
“당시 파란 길드는 몰락해 가고 있는 길드였고 언제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길드였어요오. 진심으로 파란 길드마스터가 가지고 있는 무력만으로 길드를 키울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 겠죠?”
“…….”
“파란은 당시 인력난이 심각했기 때문에 모든 종류의 행정업무를 부 길드마스터가 소화하실 수밖에 없었답니다.”
‘그래 기억나. 김현성 이 사악한 새끼.’
부길드마스터에 임명된 다음에 개처럼 굴렸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지금의 파란을 만든 게 바로 파란 길드 마스터예요. 명예추기경에 대한 우상화 작업이 아니라 진짜 파란 부길드마스터의 업적이랍니다. 당신들이 지금 공부하고 있는 교본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건….”
“대륙전쟁, 멸망의 날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투에서 나온 교본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아직도… 모르시겠어요?”
“…….”
“우상화 작업의 결과물이 아니에요. 당시 전쟁에서 벌어진 모든 전술은 파란 부길드마스터가 직접 지시한 실제 지시사항… 그러니까 행정, 전술, 전략, 보급, 인사 모두 말이에요. 이지혜 님과 단 두 분이 지시하신 결과물이랍니다. 제가 직접 두 분을 보좌했으니….”
“정말입니까? 그게… 그건 너무 비상식적….”
사실 조금 비상식적이기는 하다. 조금 부풀려진 감도 있고, 누나가 데리고 있는 사단이 워낙 유능하기는 했으니까. 사실 도움을 많이 받았지.
“그게 사실이라면 따로 사령부를 만드실 필요도 없으실 텐데….”
“생각하지 마세요.”
“네?”
“개인적인 생각이나 머릿속에서 피어나는 의문들을 버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우리들은 파란 부길드마스터의 부품이 된 거예요. 당신들은 생각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에요. 파란 부길드마스터의 손과 발이, 그의 생각을 전달하는 톱니바퀴가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거라고 생각해 주세요. 조금 이해 가지 않는 게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제 말에 따라주세요. 그렇게만 해도, 이번 원정이 끝났을 때 얻어가는 게 있을 거예요.”
커버 쳐주는 건 기분이 좋다.
‘이름이 플로헤타. 연합 쪽 출신인가 봐.’
그동안 나름대로 좋은 위치에 올라선 것 같다. 옷도 깔끔해졌고.
근데 너무 과장해서 말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솔직히 저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거든.
아니나 다를까 몇몇 놈들은 눈을 빛내며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아직도 믿겨지지 않는다는 놈들이 대다수이기는 했지만 그런 놈들의 시선도 신경이 쓰인다.
주목받는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결과물이 나오지 않을까 봐 무섭다.
실시간으로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는 모의 전투 프로그램에서 보여지는 적합률은 약 76%.
충분히 높은 수치고 마땅히 만족해야 하는 수치라고 생각하는 것이 맞다.
‘잠깐 자랑하자면 저것도 내가 만들었어. 얘들아.’
여기서 어떻게 해야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을까 기대하는 놈들의 얼굴, 플로헤타 얘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솔직히 쉬운 일이기는 해.’
더미월드 데이터도 있고, 마음의 눈도 있고, 망원경도 있으니까.
이를테면 조금 어려운 퍼즐 맞추기다.
여신의 손거울에 있는 개인 계정으로 더미월드 데이터를 맞춰 프로그램을 돌린다.
특수 네임드 캐릭터들은 따로 분류해 망원경과 마음의 눈으로 정보를 확인 후 다시 한번 데이터를 업데이트한다.
프로그램에 쫙 나열된 인사들을 따로 분류해 공격대로 묶어주는 것은 마치 결혼정보회사에서 남녀의 궁합을 매치해 보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예가 그렇다는 거야.’
이건 그거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니까. 프로그램은 전투특성이나 전투정보, 그동안의 전투기록, 개인적 특성과 개성을 총합해 궁합에 맞는 파티원들과 집단을 매치시킨다.
모든 걸 자동으로, 중간중간에 손이 가는 곳이 있기는 하지만 커다란 문제는 아니다.
행정 병아리들이 이쪽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으니 쇼맨십도 조금 보여줘야지.
막 코피 흘리는 건 오바기는 한데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 있잖아. 눈 정도는 안 깜빡여 줘야 얘네들이 감동하지.
아. 시바. 먼지 들어갔어.
수치는 계속해서 올라가기 시작한다.
77%
78%
커피 한잔 마시며 자판을 두드리면서도 바쁜 척 대화를 한다.
손가락을 까닥거리니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것은 작전사령부의 고참 플로헤타.
“보급품들 마지막 확인 후에 보고해 주세요. 파란 길드에서는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물론 이 와중에도 모니터에서는 눈을 떼지 않는다. 눈에 먼지가 들어가기는 했지만 이미지를 위해 꾹 참고 여신의 거울에 집중하는 모습을 선보인다.
“전부 끝났나요?”
-네. 기영 씨. 시키신 일은 전부 완료했습니다.
“기다려요. 현성 씨. 지금 그쪽으로 사람 하나 보냈으니까요.”
-기, 기영 씨… 너무 무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쉬엄쉬엄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스피커폰으로 해놨었네. 이상한 소리 하기 전에 빨리 끊어야지.
79%
80%
쭉쭉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손이 조금 남는다. 뭘 동시에 처리하는 게 인상적일까 고민하지만 굳이 처리할 일이 없다. 야전지휘관들도 하나씩 넣어주는 게 좋으려나.
81%
좋아.
82%
그제야 슬슬 입을 벌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놈들이 눈에 띈다. 본인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말도 안 돼….”
다들 그렇게 말하기는 하는 것 같기는 하다. 근데 이건 말 되는 경우야. 멍청이들아.
“이기영 님. 부르셨다고 들었사옵니다.”
“오랜만이네요. 유노 님.”
스폐셜 게스트 카스가노 유노. 밀린 이야기는 차차 하면 될 것이다.
“변수를 최소화하는 작업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네. 뜻에 따르겠사옵니다.”
한정적이지만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것만큼 기분 좋은 메리트는 없잖아.
84%
85%
엘리오스와 조혜진을 같은 공격대에 넣기 싫은데… 둘이 왜 이렇게 궁합이 좋아. 프로그램에 오류라도 생겼나.
89%
어느덧 지표는 90%를 가리키고 있다. 당연히 이 멍청한 놈들의 눈에 선망이 들어선다.
아니, 그것보다는 마치 괴물을 바라보는 눈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전술 김현성 하는 걸 보면 아마 뒤집히지 않을까. 그건 이거랑 비교도 안 되는 데 말이야.
규모가 큰 던전인 만큼 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출정 준비합시다. 제2공격대, 제3공격대 던전에 진입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확, 확인했습니다.”
98%
조금은 아쉬운 수치, 내키지는 않지만 마지막으로 엘리오스와 조혜진을 묶어 배정한다.
99.1%
0.9%를 뺀 인간적인 수치.
더미월드 데이터의 힘이 조금 들어가기는 했지만….
“사령부는 호위대, 제7공격대와 함께 진입합니다.”
이기영은 틀림없이 천재처럼 비치고 있을 것이다.
‘내가 느끼기에도 나 천재 같아.’
현시점에서 걱정되는 것은 단 하나. 지하층을 내려가는 방법에 대해서였지만….
‘너희들… 가마를 대령했구나.’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타시죠. 기영 씨.”
쓸데없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마가 눈앞에 있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