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 사용설명서 952화
분위기 (3)
혼자 두는 것보다 곁에 두는 것이 더 안전하다. 그동안의 이기영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불변의 진리였다.
명예추기경을 혼자 내버려 두는 것은 물가에 애를 내놓은 것과 다름이 없다. 세상은 언제나 이기영에게 가혹했으며 빛의 성자를 끊임없이 위협했으니까.
개인의 욕망 때문에,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혹은 단순한 악의 때문에…. 이유는 많다.
그는 항상 피해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용서하는 이해자였다.
파란 길드의 인원으로 이런 종류의 업무를 분담할 수 있을 리 만무, 김창렬과 박리안이 한 번 실수를 크게 했으니 웬만한 보디가드는 성에 차지도 않을 것이다.
김현성과 정하얀 둘 모두 자신들 이외에는 이 막중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둘은 이쪽에게만 붙어 있을 수 없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와 검사가 빠지면 던전은 누가 들어갈 건데.’
김현성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런 종류의 원정에 정하얀이 빠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나마 차선책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박덕구도 자리를 비울 수가 없는 시점, 심지어 박덕구가 남는다고 하더라도 저 듀오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을 것이다.
돼지가 잘하는 건 기껏해야 몸으로 처맞는 거니까.
‘게임 끝.’
한 사람 한 사람 빼먹지 말고 눈을 마주쳐 주자. 절대로 나를 혼자 둘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끔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엘레나의 눈에 굳은 의지가 감돌기 시작한다. 정하얀과 박덕구 역시 마찬가지.
조금 더 집중하려고 했지만….
‘더 이상 하면 안 되겠다.’
계속 메소드 연기를 펼치면 내 기분이 다 더러워질 것만 같다. 효과가 있는 것 같으니 이 정도로 충분하겠지.
아니나 다를까 분위기가 이미 잡혀 있다.
“부길드마스터의 안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방 안에서 기영 씨를 모시는 게… 마법과 주술로 봉인한다면… 타인이 침입할 수 없을 겁니다.”
다른 쪽으로 잡힌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후에 들려오는 소리들에 입꼬리가 올라간다.
“어쩔 수 없지만… 제, 제, 제가 남는 게 좋을까요?”
“하얀 씨는 던전 공략에 중심입니다.”
“…….”
“제가 남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이 새끼들 서로 남으려고 그러네.
“우리 형씨가 빠지면….”
템플러들을 상대하는 게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거야.
“그렇다고 해서 호위 병력을 따로 뺄 수 없습니다. 규격 외 던전이니만큼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겁니다.”
“교단에 맡기는 건 어떨까요?”
“불허합니다.”
교단에 맡겼다가 한 번 피 봤잖아. 그나마 합의할 수 있는 선택지가 붉은용병에게 의뢰하는 것. 물론 이것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그, 그, 그건 안 돼요.”
일단 붉은용병에 거주한다는 것에 대한 하얀이의 반대가 있을 거고….
“차희라 님께서도 원정에 참여하신다는 의사를 보내오셨습니다.”
무엇보다 희라 누나가 이런 이벤트를 스킵할 리가 없다. 가만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사람인 만큼 슬슬 움직일 타이밍을 보고 있을 것이다.
차희라가 없다면 굳이 나를 붉은용병에 맡길 이유도 없지.
“함께 가는 수밖에 없겠네요.”
정말로 다른 수가 없으면 함께 가는 것밖에는 답이 없어.
이기영이라는 어린이를 물가에 내놓고 싶은 어른이 누가 있겠어. 물가에 풍덩 빠지면 어쩌려구. 정말로 내버려 둘 거야?
침묵이 드리운 장내에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서로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모습이 우습다. 방법은 결국 하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아가고 있는 모양.
결국 커다랗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연 것은 김현성이었다.
“던전의 공략보다 중요한 것은 기영 씨의 안전입니다.”
그래?
“그 어떤 것보다도 기영 씨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습니다. 호위 조는 세 개 조로 구성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저, 두 번째는 하얀 씨, 세 번째는 붉은용병 길드에 협력을 요청할 예정입니다.”
희라 누나네.
“각 조에 들어갈 인원은 추후 통보하겠습니다.”
“네.”
“네. 길드마스터.”
“선희영 씨.”
“네.”
“보급품 재확인을 부탁드립니다.”
“네.”
‘길드 직원들 죽어나겠다.’
내가 함께 원정에 떠난다고 하면 짐이 많아지는 게 당연했으니까.
간이 천막 대신에 글램핑 용품들이, 전투식량 대신에 거울연어를 챙겨갈 것이다.
암. 당연히 그래야지. 보급품 낭낭하게 챙겨. 배고픈 거 싫어.
“혜진 씨.”
“네.”
“믿을 만한 길드를 선별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길드마스터.”
던전에 들어가기로 되어 있는 몇몇은 졸지에 호위 의뢰를 받게 생겼다.
흘러가는 상황은 나쁘지 않은 것 같았지만 던전 공략 따위는 아무래도 별 상관없다는 분위기가 주변에 감돌기 시작, 차라리 던전에 들어가지 않는 게 더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다.
다들 김현성에게 한마디씩 듣고 분주하게 움직일 준비를 하는 중, 여기쯤에서 입을 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진짜 중요한 게 뭔지 알려줘야 하니까.
“대충 결정이 난 것 같으니 손님을 모셔와야겠네요.”
“네?”
“들어와.”
‘얘네들 너무 기다렸는데.’
내 목소리와 함께 등장한 것은 외신 꼬맹이들이다.
“어머.” 하는 황정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황청 안에 있는 던전을 발견한 1등 공신들, 우르르 몰려오는 것이 꽤 귀엽게 보이기는 했지만 표정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녀석들 역시 귀가 있었으니 지난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겠지.
아니, 모르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들 내 모습을 확인한 이후에 크게 안심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 벌을 받지 않은 케루빔과 세라핌은 살짝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중.
그 와중에 정하얀은 세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김현성이랑 쓰로누스가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쟤네 좀 문제 있는 거 아닌가.’
“시… 시작해도 될까요? 아버지?”
‘응, 시작해. 귀여운 도미.’
“네. 그럼 본론부터… 짧게나마 던전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
“던전의 위치가 발견된 것은 14시간 전입니다.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는 작은 신전에서 라파엘 님의 파티가 조사한 것과 비슷한 기운을 추적할 수 있었고 근처 500미터 내에 있는 공용서재에서 지하로 통하는 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도미니온스 말 잘하네.’
“책을 꺼내면 비밀 방이 열리는 간단한 트릭이었지만 교단의 신성력을 사용해야 하는 조건이 붙어 있는 탓에… 조사에 혼선을 겪었습니다. 지하층은 총 184층으로 약 2,430m 아래 위치한 곳에 던전으로 향하는 입구가 자리해 있습니다. 지금 보고 계시는 것이 바로 던전의 입구입니다.”
여신의 거울에 보이는 것은 무척 커다란 문이다. 웬만한 신전과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은 커다란 문, 종교와 관련된 장식물인 만큼 여러 가지 조각들도 보인다.
천사, 신, 악마,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박혀 있는 탓에 뭐가 뭔지 알아보기도 쉽지 않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무척 부정적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전쟁, 탐욕, 살인, 서로가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악마에게 뜯어 먹히는 인간까지 보인다.
‘다 누구야?’
혹시나 벨리알이 있는 것은 아닐까. 둘러보기도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악마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아래쪽에 조각되어 있는 이의 모습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베니고어네.’
눈을 감고 손을 모으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기도를 올리는 것 같은 모양새, 그 위의 조각상들이 개판이 나 있는 것을 보노라면 그녀가 그것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는 것만 같다.
전쟁을 막기 위해, 기근을 막기 위해, 악마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륙인들을 위해 그녀가 기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예상이 가기야 한다.
조금 흔한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지하에 처박혀 신성력을 뽑아내는 공장으로 사용됐을 수도 있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지하 184층에 처박아 둔 건 심하기는 했어.’
시바 괜히 들어간다고 했나. 어떻게 내려가지. 덕구가 엎어주겠지?
하얀이가 마법으로 띄워줄 수도 있고….
아무튼 간에 걸어가는 건 적절한 선택은 아니다.
이동 방법에 대해 걱정하고 있을 때 도미니온스의 말을 받은 것은 세라핌. 살짝 의아하기는 했지만….
‘공 몰아주기자너.’
곧바로 이해가 된다. 내게 미운털이 박히기도 했으니 이번 퀘스트에서의 성과를 몰아주려고 하는 거겠지.
단순한 프레젠테이션 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공을 논하는 자리이기도 했을 테니까.
도미니온스가 첫 번째로 발표한 것은 그녀의 공이 제일 컸기 때문이고….
솔직히 세라핌이 잘했을 리가 없으니 형제들이 쟤를 배려해 준 거라고 판단하는 게 맞다.
“이, 이후부터는 제,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라파엘 님의 파티가 던전의 입구로 향하는 동안 7회의 전투가 있었고 상대는 모두 인간이었습니다. 현, 현재는 던전 입구까지 향하는 길… 길, 길을 교황청의 성, 성, 성기사들이 점거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와중에 정하얀의 입꼬리가 슬슬 올라가고 있다. 세라핌이 공을 세워 대중들 앞에서 피티하는 게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말도 더듬고 솔직히 목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는 않지만 의미는 제대로 전달된다.
“그, 그, 그리고 던, 던전의 이름은 두더지성녀의 포근한 안식처입니다. 모, 모두 들으신 것처럼 등급판정을 받지 않은 규격 외 던전이며 전문가들은 최소 전설 등급 이상의 던전일 거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확 인상 한번 찡그리고 말 똑바로 하라고 펜이라도 집어 던지고 싶지만 참아야지.
“현재 라파엘 님의 파티가 던전의 초입에 진입했으면 레인저들을 통해 정보를 전달받고 있는 도중입니다. 라, 라파엘 님의 파티에서 예상한 던전의 규모는 사상 최대이며 입장인원의 제한도 없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 있습니다. 원, 원정대는 최대 1만 명을 파견할 예정이며….”
“1만, 만 명이나?”
“네, 네 어머… 아니, 엄, 아니, 정하얀 님. 던전 입구의 아래로 지하층 3층 이상이 있다고 확인됐습니다.”
“그, 그렇군요. 잘… 잘 들었어요. 세, 세라핌 조사원.”
“네, 네. 감사합니다. 엄… 아니, 정하얀 님.”
규모는 클 만하다. 교황청 자체가 웬만한 도시 규모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
이만한 공간이 지하로 계속해서 뚫려 있다고 가정하면 아마 소규모 파티로는 턱도 없을 것이다.
라파엘 파티가 지하 3층까지 조사를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제대로 된 조사를 할 수 있을 리 만무, 그 커다란 규모를 들쑤시려면 그만한 인력이 필요하다.
‘전쟁 이벤트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규모가 크다고 해서 큰 전투가 일어날 거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의심스럽기는 해.’
“검은백조 길드와 공화국의 있는 유, 유력 길드 몇몇으로 구성된 제1 공격대가 현재 진입 준비 중, 중입니다. 지, 지금부터는 현재까지 발견된 몬스터에 대해 설명을… 샘, 샘플과 함께….”
“그건 이후에.”
“아, 네… 알, 알겠습니다.”
아쉬워하는 쓰로누스가 보이는 걸 보니 몬스터는 얘 파트였나 봐. 조금 미안해지네.
“그, 그럼 이상입니다.”
정하얀이 이상입니다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박수를 쳤고, 한소라를 비롯한 다른 길드원들 역시 박수를 보냈다.
“고생했구나.”
뭐가 그리 불안한지 눈치를 보는 녀석이 눈에 보인다.
‘왠지 재수 없어.’
정하얀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안심하는 것 같은 얼굴도 눈에 띈다.
‘진짜 재수 없기는 해.’
그래도 친절해져야지.
하얀이가 그걸 바라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노력했구나. 세라핌. 네가 자랑스럽단다.”
‘너 이 새끼 확 쥐어박고 싶어 진짜. 한 번만 걸려봐. 진짜. 딱 한 번만 더 걸려봐.’
무척 안심한 것 같은 정하얀의 뒤로 나는 길드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출발은 세 시간 뒤에 하겠습니다. 그때까지 원정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세요. 바쁘신 길드마스터를 대신해 제가 직접 주도하겠습니다.”
“기영….”
‘닥쳐. 김현성. 시바. 내가 할 거야. 이런 건 내가 해야지 직성이 풀려.’
“원정에 참가하는 모험가와 단체 모두 전달해 주세요. 제1공격대를 제외한 나머지 구성은 제가 직접 처리하겠습니다.”
아무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그래. 3시간이면 충분하긴 해. 이제 너희들도 아는구나.’
“추가로 보급품 목록에 마법화포를 비롯한 기본 공성병기를 추가하겠습니다. 아영 씨는 드워프 기술자들과 함께 보급대로 편입됩니다.”
“네. 부길드마스터.”
어째서 공성병기를 가지고 가는지도 묻지 않는다.
‘이런 거 좋아.’
나를 동정하던 눈빛이 점차 믿음으로 뒤바뀐다. 자다가도 이기영 말을 들으면 떡이 생긴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 내가 굳이 버리지 말라는 눈빛을 쏘지 않아도….
‘얼굴 닳겠다.’
파란의 병아리들이 나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뭐 하세요. 다들? 움직여요.”